النص الكورى للفصول الجانبية

النص الكورى لأول 30 فصل من الفصول الجانبية ، ولم يتم ترجمة هذه الفصول حتى الان للأنجليزيه

< 몽중화 (1), (2) >

외전, 몽중화 (1)

······적의······ 합니다······
는······ 수······ 있을······
그······ 생······ 장은······
하지······ 일······ 두고······
유······ 어나······ 바라······

귓속에서 지저분한 노이즈가 울렸다. 이리저리 뒤엉킨 듯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누군가 칠판이라도 긁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고장난 TV가 제멋대로 지껄이는 것일까.
뭐가 되었든 거슬렸다. 듣기 싫었다. 그러나 온몸을 비틀어도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떠야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노력하니 움직였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이윽고 올라갔다. 그러자 세상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유리창으로 스며든 햇볕이 동공을 찔렀다.
그제서야 레이첼은 자신이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들었음을 깨달았다.
몽롱한 시야에 어떤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넓고 텅 빈 공간의 한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하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남자의 맑은 눈이 자신을 쳐다보았다. 레이첼은 제 책상 위에 놓인 문서를 한 장 보고, 시선을 옆으로 던졌다. 영국 왕실 길드의 면접관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중 인사팀 책임자 데이크가 말했다.

“좋습니다. 한데 당장 면접에 합격하여도, 입단시험은 남아 있습니다. 입단시험에 대한 대비는 해두셨습니까?”

입단시험. 레이첼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단시험이 뭐였더라······ 아니,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면접장인 건 알겠지만······ 맞다, 영국 왕실 길드 공채면접.
인재가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지.

“예. 왕실 길드의 방패가 되고자 연마한 재능이 있습니다. 가감없이 보여드리겠습니다.”

남자가 크게 외쳤다. 레이첼은 책상 위의 문서를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 면접자의 신상과 스펙이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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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핀리]
신체 : 179cm, 75kg.
나이 : 22세 남자.
국적 : 영국 연방
재능 : 방벽 형성, 마력 폭주.
역할 : 전사.
약력 : 2029년 ‘라 길드 뤼미에르(La guild-Lumière)’ 27위 졸업, 6개월 수습
독일 ‘펜저부르크’ 6개월 연수.
특이사항 : 길드 입단 시, 영웅 서임이 확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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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최고의 길드 ‘라 길드 뤼미에르(La guild-Lumière)’ 27위.
큐브 27위였다면 졸업과 동시에 영웅 서임까지 받았겠지만, 뤼미에르의 27위는 졸업하고 1년이나 무료로 봉사하며 스펙을 쌓은 뒤에야 영웅으로 임명 받을 수 있다.
그것도 뤼미에르 27위라서 1년이지, 타 길드의 50위 아래면 영웅은 고사하고 요원 혹은 용병 자리나 알아봐야 한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영국 왕실 길드에서 제임스 핀리는 누구보다 유력한 합격 후보다. 오히려 ‘왜 뤼미에르 출신이 왕실 길드에 지원했지?’ 라는 말을 들을 만큼.
명색이 영국에서 제일이라는 왕실 길드의 현실이 이렇다.

“예!”

핀리가 밝은 얼굴로 인사한 뒤 면접실을 나섰다.
면접자가 사라지자 공간 자체가 텅 비어버린 듯했다. 쓸데 없이 넓고 높고 화려하기만 한 중세식 강당은 오늘따라 유독 알멩이가 없어 보였다.

“자,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부단장님?”

데이크가 운을 띄우자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아홉 명의 면접관도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레이첼은 아직 할 일이 많았으므로 사무실로 올라갔고, 면접관들은 오늘 왕실을 찾아온 인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걸었다.
그래도 이번 공채에는 재능 있는 영웅들이 많이 지원했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것도 다 레이첼 부단장님 덕 아니겠습니까······ 따위의 말들이 공허하게 울렸다.

“······.”

사무실로 돌아온 레이첼은 책상 앞에 앉아 데스크탑부터 켰다.
당장 할 일이 많았다. 일단 모든 길드가 바쁜 공채시기이니만큼 시험과 면접을 생각해야 했고, 영국에 나타난 던전들도 정리해야 했으며, 가장 중요한 ‘전당(殿堂)’ 건을 조율해야 했다.
그러나 레이첼은 업무를 하면 할수록 진창으로 가라앉는 듯한 탈력감을 느꼈다.
당장 1월달 공채 기간 동안 지원한 인재는 103명, 그 중에서 즉시 전력감은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지원자들은 전부 ‘길드에 입단하여야만 영웅 서임을 받을 수 있는 지망생’ 들이었다.
물론 소명의식이 출중하다면 어떻게 키워볼 수도 있겠으나, 그들에게도 영국 왕실 길드는 ‘징검다리 길드’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아.”

속 깊은 곳에서 한숨이 치밀었다.
제 인생과 노력을 갈아서 쏟아 부었지만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요즘에는 그저 회의감만 가득 일었다.
자신이 세웠던 목적은 처음부터 달성이 불가능한 신기루였던 것일까. 이 길드에는 정말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레이첼은 나락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느꼈다.
답답한 가슴과 척박한 현실을 잊기 위해 서류 작업에 매진했다. 서류의 활자들은 전부 영국의 암담함을 말하고 있었으나, 그나마 활자였기에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왕실 길드가 현실에서 겪는 수모와 비할 바는 아니었다.
레이첼은 한참동안이나 결재와 구상을 반복하다가,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짧은 휴식 겸 인터넷을 켰다.

[HERO— COMUNITY]

일명 영웅 커뮤니티. 자색연회나 다크웹은 아니고 아카데미를 졸업한 자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비공개 정보 교류 사이트다.
눈팅을 하다 보면 가끔씩 생각지도 못한 정보나 팁을 얻을 수 있기에, 레이첼도 하루 20~30분 정도는 이곳을 둘러보고는 했다.

드르륵 드르륵—

어떤 정보가 있나 대강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던 중에 게시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 좋은 제목은 아니었지만, 눈에 안 들어올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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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 세계 여러 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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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왕은 아직도 별로인가요?]
열무김치 │ 2030.12.30 │22:49:36

영왕 아직도 발전 없나여?? 큐브 3위먹은 레이첼 간지 삼년정도 지난 것 같은데, 그래도 잘 안 풀리는 중? 라이벌이라던 채나윤이나 유연하는 정협가서 승승장구 하던데.

[댓글]
─ㅇㅇ. 요즘 영국 상황이 워낙 안좋아서 걍 추락만 하고있는 중임. 레이첼도 고작 3년차라 햇수로나 능력으로나 아직 유망주 수준인데 부단장이잖아. 얼마나 인물이 없으면 그러겠냐;; 정협 봐봐. 유진웅 딸은 바닥부터 시작해서 겨우겨우 팀장달았더라.
─옛날에야 영프독이었지, 요즘은 그 라인에 끼지도 못함. 유럽은 프독이 압도적이고 영국은 그 다음 스페인 이탈리아 라인 정도?
└근데 요즘은 걔네보다 스위스가 뜨던데? 거기 세히트, 바르가, 발스, 틸마, 마리츠 황금라인 짱짱하고, 이번에도 큐브에 입학한 유망주만 3명이래.
└그러게 스위스 잊고 있었네 ㅋㅋ 그 다섯명 다 애국심도 쩔어서 미래는 밝은 것 같더라 ㅋㅋ 암튼 영국은 별로임.
─영웅 서임 필요하면 추천 ㅇㅇ 그래도 왕실이라는 이름빨이 있어서, 나중에 길드 옮길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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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아악!
레이첼은 마우스를 조금 거칠게 움직여 사이트를 껐다. 그러나 별로 화가 나지는 않았다. 어차피 영웅 커뮤니티는 창조주의 성은도 까이는 곳이니까······.

“······‘영웅 서임 필요하면 추천’?”

쿵. 레이첼이 주먹 쥔 손으로 집무책상을 살짝 내리쳤다. 곱씹을수록 짜증나는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단원이 보고 있을 수도 있는데, 대놓고 징검다리 취급하는 건 너무하잖아.

“열무김치, 열무김치······.”

레이첼은 다시 커뮤니티를 켜서 아이디 ‘열무김치’가 쓴 글의 목록을 검색했다. 혹시 길드알바는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런데 스윽 훑어보니, 요리 보고 저리 보고 아무리 보아도, 몸 담을 길드를 찾고 있는 평범한 아카데미 졸업생이었다.

“······.”

레이첼은 말 없이 사이트를 껐다.
그때 마침 내일 일정이 떠올랐다.

[정오 — 신여화 스승님의 수업]

“······앗.”

격주마다 돌아오는 신여화 스승님의 정령사 수업.
레이첼은 자신도 모르게 울상이 되었다.

물론 신여진은 세계 최고의 정령사이고, 그녀에게 정령의 힘을 배우는 것은 좋다. 그 배움이 상상 이상으로 힘든 것까지도 괜찮다.

그러나 문제는 비용이다.
한 번의 수업료가 자그마치 150만 파운드. 처음에는 50만 파운드 였던 것이 2년 사이에 3배나 불어나버렸다.

“1년에 36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국세가 레이첼 부단장의 교육비로 사용된다.”

레이첼은 언젠가 읽었던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되뇌었다.
1년 3600만 파운드, 한화 500억에 달하는 비용이 정령사로서의 자신을 위해 쓰여진다.
그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 레이첼은 생각해보았다.
물론 총리는 나의 강함이 곧 영국의 자존심이라며 수업을 계속하라 하였다. 그러나 내가 강해지더라도, 길드 전체가 성장하지 않으면 영국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스승님의 자질까지 의심할 생각은 없지만, 수업보다도 잡담이나 체벌만 훨씬 많아진 기분이었다.

지친 채로 흔들거리던 레이첼은 문득 사무실 한 켠에 놓여진 액자를 보았다. 큐브의 졸업사진들이었다.

“······뭘 하고 있을까.”

지독하게 바쁘고 지겨운 일상이지만, 이렇듯 가끔씩 떠오르는 사람은 있었다. 그만큼 그의 등장은 강렬했고 퇴장은 신비로웠다.

1학년, 2학년, 3학년의 단체사진에서, 그는 1학년의 사진에만 존재했다. 1학년을 마치자마자 홀연히 자퇴했기 때문이었다.
순위가 급상승하여 많은 길드의 주목을 받던 상황이라 모두가 의아해했었지.

······김하진.
그와 함께 겪었던 사건들은 아직까지도 꿈처럼 아득하고 비현실적이다.

레이첼은 액자를 들여다보며 큐브에서의 나날들을 회상했다.
3년 간의 큐브 생활은 분명 경쟁과 책임감에 짓눌려 있었으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가장 순수하게 자신을 정련하고 단련할 수 있었던 소중하고도 유일한 시간이었다.
어른인 줄 알았던 그 시절의 자신은 여전히 어린아이였고, 이제서야 비로소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성장통을 겪고 있는 것일까.

레이첼은 옅은 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스산한 달빛이 창틈사이로 흘러들었다.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큐브를 졸업하고 3년이나 지난 지금.

하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해야할 것이 더욱 많아서 모든 것을 눌러두었다. 그러나 해야할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해내어지지 않았고, 해내지 못한 것들 위로 다시 해야할 것들이 산사태처럼 쌓였다.

하여 레이첼은 너무 지쳐 있었다. 그저 ‘포기할 수 없다’는 맥없는 의지와 각오가, ‘일국의 공주로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빈곤한 애국심과 책임감이 그녀를 붙잡고 있을 뿐······.

고요히 눈을 감은, 어린 부단장의 얼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내내 꼿꼿하던 허리와 고개가 편안하게 굽어졌다. 이윽고, 새근새근— 아이가 자는 듯한 가벼운 숨소리가 흘렀다.

영국 왕실 길드의 최연소 부단장은 오늘도 사무실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잠들었다.


외전, 몽중화 (2)

이튿날, 새벽 네 시가 되자마자 긴급 상황이 발생했다. 에식스주의 영공에서 유피(Yupi) 무리가 출몰했고, 대거넘에서는 지맥을 뚫고 골렘이 솟아올랐다는 급보였다. 그 외의 지방에도 11군데의 괴수 출몰이 있었으나, 다행히 거점 길드의 영웅들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레이첼은 출동 신호를 받자마자 갈라틴을 챙기고 뛰쳐나갔다. 스마트 워치로 좌표를 전해받은 뒤 바람의 정령 ‘윈디’를 불렀다. 윈디는 상승기류를 만들었고, 레이첼은 그 속에서 매처럼 날았다.

그렇게 레이첼은 런던의 대거넘에 도착했다. 채 3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골렘들은 이미 주택과 도로를 파헤치고 있었다.
투두두두—
상주 병력들이 자동소총으로 마탄을 쏘았으나, 골렘은 회복력과 재생력이 까다로운 괴수다. 핵을 단번에 뚫지 않는 이상 어떠한 피해도 입힐 수 없다.

레이첼이 갈라틴을 뽑아들었다. 왕실의 보검에 불의 정령이 깃들었다.

─Gra!

마력의 불씨를 느낀 골렘들이 레이첼에게로 시선을 비틀었다. 레이첼은 지면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골렘이 긴 팔을 휘둘렀으나, 레이첼의 속도는 놈들을 가볍게 압도했다.
쏴아아—!
한 줄기 섬광이 골렘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갈라틴의 검신에서 은빛 화염이 타올랐다.

─그으······.

핵이 파괴된 골렘은 모래처럼 으스러졌다. 레이첼은 무너진 골렘의 잔해를 디딤발 삼아 더 높이 뛰었다. 육안으로 확인한 골렘의 수는 여덟. 아직 처치해야 할 골렘은 많이 남아 있었다······.

온 사방에 여덟 골렘의 잔해가 흩뿌려졌다. 진흙과 모래와 시멘트와 쇠의 부스러기들이 태풍에 휩쓸린 듯 난잡하게 퍼졌고, 그 쓰레기장의 한복판에서 레이첼은 온몸에 쌓인 흙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왕실 길드의 부단장님을 뵙니다!”

상주병들이 다가와서 경례했다. 레이첼은 피곤한 내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 상황은?”

레이첼이 그렇게 묻고 나서야, 왕실 길드의 비번 영웅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레이첼은 그들을 흘끗 보고 병사에게 말했다.

“저들에게 보고하라.”
“예, 알겠습니다!”

레이첼은 다시 몸을 움직여, 이번에는 에식스로 달리려 했다. 에식스까지는 아무리 빨리 뛰어도 10분은 걸린다. 그러나 유피 무리라면 30분이 지나도 진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생각하며 윈디를 부르던 순간이었다.

[에식스, 유피 무리 진압 완료]

“······?”

스마트 워치에 이상한 보고가 왔다. 레이첼은 천진한 얼굴로 갸웃거리고는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나마나 에러일 테니 걸으면서 뛰었다.
에식스 쪽의 책임자가 전화를 받자마자 레이첼은 물었다.

“진화가 되었다니요?”
─아 예. 저희가 다 진화를 완료 했습니다. 굳이 안오셔도 될 듯 합니다.

상대방은 영국 남동부 거점 길드 ‘레이튼’ 의 시버트였다. 거드름 피우는 듯한 음색이 왠지 불쾌했다. 레이첼이 의심 가득한 투로 되물었다.

“······유피 무리를 어떻게 10분 만에 진압할-”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피는 중하급 3품의 비행괴수다. 하피의 먼 친척 뻘 되는 녀석으로, 외양은 평범한 독수리지만 웬만한 성인남성보다 몸집이 크고 흉포하여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정평이 나 있다. 게다가 ‘무리’라 보고되었으니 적어도 12마리 이상일 터인데.
레이튼 길드는 한 순간에 유피떼를 진압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한 길드가 아니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아 당연합니다. 저희가 다 진압을 했습니다 공주님. 가끔은 저희도 좀 믿어주십시오.

레이첼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호칭은 교정해달라 분명 말했을 텐데요.”
─아~ 맞다 맞다.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조기진압이라 기분이 좋아서 말입니다. 다음부터는 신경쓰겠습니다 왕실길드 ‘부단장’님!
“······현장 상황이나 보내세요.”
─예. 지금 바로 보내겠습니다!

시버트가 영상을 보냈다.

과연, 시버트의 말대로 유피의 사체들이 도보에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의 상태가 이상했다. 몸통과 날개 가릴 것 없이 웬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고, 상흔 위로 새하얀 김이 푸시식 일어나는 듯보였다.

“······?”

레이첼은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력을 탄처럼 응집하여 쏟아내었나?
아니, 그런 재능을 지닌 인재가 레이튼 길드에 있을 리 없다. 만에 하나 있다 하더라도, 이처럼 무식하고 비효율적인 공세를 퍼부을 이유가 없다. 굳이 사체 전부를 스트리폼처럼 짓이겨놓을 필요 없이 심장만 뚫어도 되는 걸.

현장 영상을 지그시 들여다보던 레이첼은 문득 투정하듯 중얼거렸다.

“······다 얼마일까.”

비행괴수 유피는 그 깃털과 발톱이 꽤나 비싸서 시체 한 마리당 3~4억은 가볍게 호가한다. 그 중에서도 상태가 좋거나 우두머리를 뜻하는 ‘뿔’이라도 달려 있으면 최대 15억까지도 치솟는다.
전부 구멍이 숭숭 나 있어서 가죽으로 쓸 만한 부위가 별로 없긴 하나, 레이첼은 현장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유독 큰 유피의 정수리에 달린 뿔을.

“······.”

레이첼이 그 뿔을 톡톡 두드렸다. 톡톡- 톡톡- 거릴때마다 화면 속 뿔이 확대되고 또 축소되었다.
10억짜리 뿔.
최소 2억짜리 시체가 열 두 기.
그 가운데에서 히죽거리며 쌍따봉을 하고 있는 시버트.

골렘은 거의 가치가 없다시피한 괴수이니 만큼, 지금으로서는 마냥 부럽기만 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신여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동시에 날쎈 돌풍이 레이첼의 손등을 할퀴었다. 레이첼은 눈을 질끈 감고 통증을 견뎠다.

“너는 왜 자꾸 내가 시키는 대로 안 하는 거야?!”

신여진이 미친 듯이 손을 휘저으며 레이첼을 쏘아붙였다.

“이제 머리가 조금 컸다고 내가 우습니? 어! 우스워!”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의 뜻은 레이첼이 수행의 동작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레이첼은 정령을 다루면서 어느 날보다 조금 더 손을 뻗었고, 조금 더 발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순간 신여진은 야수처럼 격노했다.

“죄송합니다.”

레이첼은 그저 죄송하다 말했다. 신여진의 정령이 휩쓸고 간 손등이 뜨거웠다. 그럼에도 신여진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제 이를 잘근잘근 갈면서 뇌까렸다.

“어디 족보도 없는 년 제자로 받아줬더니, 메스컴에서 띄워주고 하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

레이첼은 고개를 숙였다.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레이첼이 무슨 말을 하든 신여진은 변명이라 여길 터였다.

“쯧. 제 분수를 알아야지. 아니, 얘. 너 그거 아니? 나 있잖아~ 어디가서 너 말하는 것도 쪽팔려~”

신여진이 레이첼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밀었다. 레이첼은 미는 대로 밀려나면서도 꿋꿋이 다가갔다. 그러면 신여진은 다가온 레이첼의 이마를 다시 밀었다.

“왜, 너도 생각해봐~ 어디 거지같은 나라에서 거지같은 길드 부단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제자라고, 내가 어디 쪽팔려서 말할 수 있겠니?”

레이첼은 드러나지 않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지끈거렸다. 거지같은 나라, 거지같은 길드. 레이첼의 근원을 후벼파는 말이었다.

“내가, 내가 말이야, 너 때문에 내 스승님 볼 면목이 없어. 창운(昌雲) 스승님은 한국 대통령이랑 호형호제 하던 사이였고, 나도 그 정도 지위와 명망을 갖췄는데······ 어휴. 하필 너같은 거한테 정령이 깃들어서 이게 뭔 일이니? ······아 참. 너 설마, 아직까지도 그 개짓거리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신여진이 말하는 ‘개짓거리’란 ‘정령검’을 뜻했다. 레이첼은 정령과 검술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다 생각하였으나, 신여진은 오직 정령의 순수함만을 강조하여 검술에 접목하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네.”
“쯧. 의심은 되는데 감시할 수도 없고······ 아무튼 너, 그딴 짓 두 번 다시 하기만 해봐. 곧바로 제명이니까. 나한테 제명당하면 한국에 발도 못 붙이는 거 알지?”
“······.”

레이첼이 침묵한 채 고개를 숙였다 . 신여진은 그런 레이첼을 강하게 노려보더니,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갑갑하다 갑갑해. 암튼, 오늘 수업은 이만 할게. 네 태도가 너무 구려서 할 맛도 안 나. 숙제나 해와. 아니, 하든지 말든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여진은 빙글 돌아섰고, 레이첼은 얼굴을 내보이지 않은 채 호흡을 골랐다.
스승이 떠나가고 나서도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연무장에 있었다.
속이 아팠다. 창자가 울렁거렸다. 그녀는 문득 손을 들어 제 눈가를 닦았다. 작은 눈물방울이 묻어나왔다. 뚝뚝뚝. 손등에서 흐른 핏방울이 흙바닥에 자국을 새겼다.

“상처를 치유해드리겠습니다.”

어디선가 노집사가 다가왔다. 노집사는 안타까움 따위의 감정은 배재한 채, 포션에 적신 붕대로 레이첼의 오른손을 감쌌다. 상처가 치유되고 새살이 돋아나는 고통이 일었다.
바로 그때였다.

“큰일입니다!”

정령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한 수행원이 급박하게 외쳤다.

“무슨 일이냐.”

집사가 묻자 수행원은 가타부타 어떤 종이부터 내밀었다. 전단지만한 종이가 집사에게, 그리고 레이첼에게 전달되었다.

[왕실이여, 15년 전 그 날을 기억하는가. 아직 내 이름을 잊지 않았는가······]

랭커스터의 전언이었다.

< 몽중화 (1), (2) > 끝

< 몽중화 (3) >

랭커스터의 경고문이 날아들었다— 는 사실은 비밀로 남지 못한 채 새어나갔다. 레이첼은 외부에 누설할경우 엄중 처벌하겠다고 경고하였으나, 길드의 단원들은 남몰래 랭커스터에 대한 말을 나누었다.
랭커스터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왕실에 집착하는 것이냐, 예전에는 자기 가족보다도 조국을 우선하던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것도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인 것이냐······.
‘왜 하필 지금이냐’라는 물음에는 명쾌한 해답이 있었다.
머지 않아, 중앙아시아에서 ‘전당회의’가 개최되기 때문이었다.

쏴아아─!

길드의 연무장에서 레이첼은 검을 휘둘렀다. 갈라틴의 섬광이 직선으로 뻗었다가 사선으로 휘어졌다. 검로는 유려했고 몸짓은 우아했다. 동작 사이사이에 땀방울이 튀었다. 선과 선이 그림처럼 교차하는 검술의 현장에서 레이첼은 아주 작은 흐트러짐도 없었다.

레이첼은 자신을 단련하며 고뇌하고 있었다.
랭커스터가 직접적인 경고문을 보냈다. 이렇듯 대놓고 왕실을 겨냥한 것은 처음이었다. 길드의 간부들은 협회에 도움을 부탁하자 하였으나, 레이첼이 반려했다.
이것은 오롯이 왕실과 자신이 매듭지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공주에게 원한을 가진 악한을 퇴치해달라’는 부탁을 영웅협회에 보냈다가는 비웃음만 살 것이 뻔했다······.

레이첼은 어떤 시선을 느꼈다. 연무장의 입구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레이첼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집사였다.
레이첼이 땀을 닦아내고 집사를 보았다. 집사가 방긋 웃었다.

“드디어 3주 뒤입니다, 공주님.”

올해 여든에 접어드는 노집사는 레이첼에게 ‘공주’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노인은 레이첼이 있기 전부터 공주를 모시던 자였고, 레이첼이 공주가 된 이후로는 공주의 심복이 되었다.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레이첼은 조금 퉁명스레 대답했다. 숨길 수 없는 긴장감과 열패감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제, 중앙아시아의 전당(殿堂)에서 길드회의가 벌어진다. 중앙아시아에 형성된 ‘거대규모필드’에 참여하기 위한 일종의 자격 시험이다.

본래 이런 회의는 한국에서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나, 회의 자체가 ‘어느 누구도 소유하지 못한 거대필드의 통행권리’를 협의하기 위함이고, 또한 해당 필드의 특수성으로 인해, 필드의 입구에 건축된 전당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호위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집사가 걱정스레 물었다.
영국에서 중앙아시아까지는 포탈로 이어져있지 않다. 따라서 가장 가까운 문명인 인도나 중국에서 차 또는 말을 타고 가야하나, 랭커스터라는 위협에 노출된 레이첼에게 육로는 너무 위험하다.

“네. 믿을만한 단원들을 부관으로 합류시켰어요.”

전당회의에 참석하는 이백 길드의 대표자들은 모두 내부 인력과 더불어 용병을 고용했다. 아무래도 ‘호위’라는 직분을 주종목으로 삼는 영웅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었다.
어떤 사사로운 개인을 지키기에 영웅이라는 이름은 너무 거창했다.
그러나 용병계에는 ‘영웅이 되기에는 부족하나, 실전에서는 곧잘 써먹을 수 있어서, 요원 따위의 공무원이 되는 것보다 용병으로 살아가는 게 더 많이 벌어먹을 수 있는 재능’을 가진 부류가 많아 이런 임무에 전문인 자들이 몹시 많았다.

“······그래도, 염려가 되는군요. 그들은 전문 호위 인력이 아니잖습니까. 호위는 무력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습격을 물리치는 것보다, 보다 먼 곳을 관측하여 습격의 전조를 알아차리는 예방적인 호위가 더욱 어렵고 전문적입니다.”

물론 레이첼도 용병을 알아보기는 했다. 그러나 왕실 길드는 그들을 고용할 재정이 부족했다. 백아흔아홉 길드가 서로 경쟁하는 지금, 능력이 출중한 용병단의 수가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괜찮아요. 저는 저희 길드원들을 믿어요.”

다만 레이첼은 그렇게 노집사를 달랬다.

“그러니, 집사도 걱정하지 말아요.”

어쩌면 레이첼 자신을 달래는 말일수도 있었다.


한편, 영국 왕실 길드의 인사팀장 데이크는 용병 섭외를 생각하고 있었다.
부단장 레이첼은 괜찮다고 말하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길잡이’만큼은 필요할 것 같았다. 다발적인 마력폭발로 지형이 미로처럼 복잡해진 중앙아시아를 어떻게 길잡이도 없이 헤쳐나간다는 말인가.
좋은 길잡이를 고용하는 것만으로도 기습 확률이 절반은 줄어들 터였다.

[이 사람 어때요?]

고민하던 찰나 메신저가 왔다. 이번 전당 호위에도 참여하는 단원 ‘페르민’이었다.

[여기 링크 있어요. 한 번 보세요.]

링크를 누르자, 자색연회의 알림과 함께 어떤 용병단의 사이트가 떠올랐다.

[Xtra]
─장거리 호위, 암살, 저격, 길잡이 전문.
─호위와 길잡이의 경우 지형·국가를 가리지 않습니다.
─임무 의뢰 시기에 따라 답장이 늦을 수 있습니다.

Xtra.
들어본 적은 없지만 일단 자색연회에만 거점을 둔 용병단이었다.
그러나 자색연회에서‘만’ 활동하는 길드를 고용하면 레이첼의 분노를 살 가능성이 컸다. 자색연회라는 음지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영웅으로서의 의식이나 윤리······ 는 이미 어느정도 현실과 타협이 되었으나, 일단 값이 비싸고 용병단에 마인이 포함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용병단을 고용했는데 마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레이첼에게 들켰다?
부단장은 ‘왕실과 길드의 기사서약’이라는 형이상항적인 맹세에 의거하여 자신을 엄벌할 터였다.
데이크가 페르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팀장님~
“인마. 너 왜 갑자기 자색연회를 서치했어? 부단장님 자색연회 꺼리는 거 몰라?”
─에? 아, 그.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가 어물적거리는 사이에 이미 쓸만한 길잡이는 다 팔렸거든요.
“그래도 자색연회는 아니잖아. 마인이면 어쩌려고.”
─아~ 하하하. 아녜요. 그건 걱정 안하셔도 돼요. 이 Xtra는 절대 아닙니다. 자세히 보시면, ‘저격이나 암살 의뢰는 대상이 마인이나 괴수일 경우에 한정’이라고 적혀 있어요. 사람은 안 죽이고, 마인만 죽인다는 거죠.
“······흠.”

데이크가 직접 보니 실제로 그런 조항이 있었다.

─그러니까 한 번 믿어보죠? Xtra 여기 값도 되게 싸고, 조금 게으른 거 빼고는 나름 평판도 좋단 말예요~
“게을러?”
─네. 용병단 설립은 2026년에 했는데, 지금까지 수임한 임무가 20개 남짓이에요.
“······그 정도면 벌써 망한 거 아니냐?”

중간 규모의 용병단이 1년에 대략 300개 정도의 임무를 수임하는데, 5년에 20개면 이미 도태될 대로 도태된 뒤 부패까지 진행중인 것이나 다름 없다.

─에이, 망하긴요. 의뢰 문의했더니 곧장 답장 오던데요.
“아니 답장이고 자시고, 왜 그런 용병단을 추천하는 거야 너는?”
─평판이 은근 좋다니까요?
“평판이 어떻게 좋냐고 그러니까.”

데이크는 어이가 없었다. 1년에 4개의 임무를 수행하는 용병단이 평판이 좋다니?

─들어보세요 팀장님. 그니까 이 용병단이, 20개의 임무 중에 16개를 용병단 설립하고 1년만에 해치웠단 말예요? 근데······ 이거 보세요. 후기 링크 보내드릴게요. 후기가 엄~청 신기해요!

페르민이 링크를 보냈다. 자색연회에서 가장 대중적인 정보 상점 [알카라카]였다.
상점 사이트에 접속하자, [‘Dr.Pmin’이 구매하고 ‘Rocallist’에게 전송한 정보입니다. 2회에 한하여 무료로 정보 전송이 가능합니다.] 라는 메시지가 먼저 나온 뒤 후기가 열렸다.
후기는 총 아홉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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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 Reca****]
[평점 ─ ★★★★★]
위험지역 경호, 호위에 최적. 덕분에 판데모니엄의 외곽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위험도 사전에 차단되었고, 불시의 기습이 발생하여도 금세 상황이 마무리되었고요.
뭐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네요.
그저······ 가장 위험한 곳을 거닐면서도 가장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 용병단은 우리에게 자신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높고 먼 곳에서 우리를 굽어보며 지켜주었습니다.
이번 여행은 앞으로 제 마음 속에 깊게 남을 것 같네요.
당신은 정말 인상적인 수호자였습니다.

[ID ─ 마녀****]
[평점 ─ ★★★★★]
희안한 용병이다. 병적일 만큼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며, 고용인의 얼굴조차 보려하지 않는다. 피고용인 입장에서는 상당히 거만하고 무례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아마 이 용병을 선택한 대부분은 몹시 만족스러워하지 않을까.
오직 한 명으로 이루어진 용병단이지만, 이 자는 충분히 용병‘단’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그는 혼자서 군단의 임무를 수행한다.

[ID ─ 수박****]
[평점 ─ ★★★★★]
지금은 아직 후기도 리뷰도 몇 개 없는데 곧 유명해질듯.
추가리뷰) 근데 여기 이제 의뢰 안받나요? 첫번째에 잘해줘서 한 번 더 맡기려고 문의했는데 3개월째 답장이 없네요;
──────────────

과연, 페르민의 말대로 신기하는 했다.
본디 [알카라카]의 리뷰에는 거짓이 없다. 리뷰 한 줄 한 줄도 전부 돈이기 때문이다.
[알카라카]에서는 아주 간단한 리뷰조차 포인트(돈)를 지불하여야만 열람할 수 있고, 그렇기에 리뷰에 거짓이 포함된다면 얄짤없이 ‘이용정지’다.

“이거 뭐야.”

그런 알카라카의 후기가 이 정도라면 웬만큼은 믿을 수는 있다는 뜻인데······ 데이크는 반신반의하면서 되물었다.

“조작 아니냐?”
─에이~ 어떤 미친놈이 알카라카를 조작해요~ 들키면 이용정지당하는데.
“······것보다, 여기 용병이 한명이라는데?”
─예. 모든 임무를 혼자서 했답니다! 대단하죠!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차는 용병단이었다. 아니, 혼자서 활동할거면 왜 용병‘단’으로 등록한거야? 개인 용병으로 하면 되는 걸.

“비용은?”
─길잡이 비용만 한화 3억원. 거기에, 솔직히 요즘 랭커스터도 있고 불안하잖습니까? 그래서 3개월 경호까지 옵션으로 넣으면 얼마냐고 물어봤는데!
“그런데?”
─왕실 길드 디스카운트 해서 달에 1억! 전당이 끝날때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면 1억 추가! 해서 총합 7억원인 거죠!

쓸데없이 자신감 넘치는 말투가 오히려 데이크의 심기를 거슬렀다.

“······됐고. 넌 일단 시말서 쓸 준비해.”
─에? 아니, 아니, 아니 팀장님. 잠깐-

데이크가 곧장 통화를 끊었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긴 그는, 그러나 곧 곰곰히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등받이에 몸을 눕힌 채 자기자신에게 설명하듯 되뇌였다.

“······말도 안 되지. 이 용병도 다 랭커스터의 계략일 수도 있는데······. 흠······. 아니지. 랭커스터가 5년 전부터 이런 걸 준비했다면, 저렇게 허술하게 디스카운트 해주겠다고 하지는 않았겠지······ 오히려 그럴 시간과 비용으로 우리 길드에 끄나풀을 심었을 거다······ 그런 점에서는 페르민이 가장 믿음직한
녀석이긴 한데······.”

의심을 하면 할수록 믿어볼 만한 용병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왜일까.
아닌 게 아니라, 10년동안 자색연회를 하면서 저렇게 호평만 일색인 용병 리뷰는 처음 봤다. 물론 리뷰가 아홉개 뿐이긴 하지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대목이 마음에 든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레이첼에게 들킬 염려가 전혀 없다.
더해서 가격적인 어드벤테이지도 있다. 아무리 한 푼 한 푼이 아까운 왕실 길드라지만, 7억 정도는 충분히 감당 가능한 지출이므로.

푹 한숨을 내쉰 데이크는 다시 페르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에~ 팀장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시끄럽고. 일단 이건 우리만 알고 있는 걸로 해. 임무 내용은 그대로 가고.”
─그대로요? 호위까지?
“그래. 길잡이 플러스 경호원으로. 당장 랭커스터가 경고장까지 보냈는데 뭐 기다릴 게 더 있어? 선금은 내 사비로 입금할테니까, 부단장님께서 절대 알지 못하도록 하고.”
─아뇨아뇨, 괜찮아요! 저도 반은 부담하겠습니다!
“괜찮아. 너 시집가려면 지금부터라도 돈 많이 모아야지. 네가 돈까지 없으면 어떤 미친 놈이 너랑 결혼하냐. 나는 어차피 임무 끝난 다음에 길드에 청구하면 돼······.”

< 몽중화 (3) > 끝

< 몽중화 (4) >

······나, 김하진은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인생을 누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어놓았기에 잉여 시간이 너무 많았다. 걱정할 만한 것은 괴수나 마인에 의한 돌연사 뿐이었으므로, 나름 죽지 않기 위한 훈련을 반복했다.
이따금씩 ‘이럴 거면 차라리 영웅 노릇을 그만두지 말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는 정말 모든 의욕을 잃어서 큐브라는 섬에 발을 딛는 것조차 싫었으니.

“스읍— 후우—.”

근력 운동을 반복하며 생각했다.
이제 나는 지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갑자기 그렇게 되었다.
정말 갑자기였다.
내가 어떤 잘못을 했다거나, 누군가의 방해공작 때문이었다면 그토록 허무하지도, 절망스럽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저 어느 날 문득 잠에서 깨어나고 보니─ 다수의 알림창이 떠올라 있었다.

[기적의 탑이 발현되었습니다!]
[비원의 탑이 해소되었습니다!]
[바알은 소멸되었고, 세계는 안전해졌습니다.]
[모든 에피소드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당신은 이제 이곳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개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내가 뭘 했다고 바알이 소멸돼?
나는 시스템에게 묻고 싶었었으나, 그 날 이후로 시스템은 어떤 메시지도 보내오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성흔’과 ‘설정 개입’을 비롯한 권능은 남았다. 하지만 증발된 멘탈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의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귀환이라는 희망 뿐이었으므로······.

띠리리링—

스마트 워치에서 알람이 울렸다.

——————
[Rocallist가 Xtra에 임무를 의뢰합니다.]
[원거리 경호, 전당 길잡이]
─보호 대상 : 영국 왕실 길드의 부단장 레이첼.
─보상 : 길잡이 3억원 (선금 1억원), 경호 3억원 (매달 1억원), 임무 성공시 추가금 1억원
─주의사항 : 당신의 존재가 부단장에게 발각되지 않을 것.
[자세한 의뢰 내용은 Rocalist와 대화를 통해 확인하세요.]
——————

자색연회를 통한 용병단 임무 의뢰, 의뢰인은 영국 왕실 길드였다.

“흐음.”

보아하니 영왕(영국 왕실 길드)의 단원이 레이첼 몰래 나를 고용하려는 듯했다.

사실 임무의 언질은 일주일 전부터 있었다. 길드의 평단원인 ‘Dr.Pmin’이 자색연회 메시지로 직접 물어왔다. 왕실 길드의 부단장을 경호해줄 수 있겠느냐고.

용병 노릇은 4년 전에만 조금 하다가 싫증이 나서 그만두었으나, 레이첼의 이름을 듣자 괜한 구미가 당겼다. 레이첼은 누가 뭐래도 내 이야기의 주연 중 한명이고,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아주 큰 빚을 진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할까 말까.”

‘전당’ 당일까지 레이첼을 위험요소로부터 관찰·보호하며, ‘전당’ 당일에는 직접 중앙아시아까지 동행하여 길잡이 노릇을 하는 것.
그 모든 수고에 대한 비용이 고작 7억이다.

“······7억.”

저도 모르게 코웃음이 흘렀다.
나는 지금 내가 서있는 플로어를 휘둘러보았다.
마공학을 십분 활용한 최첨단 운동기구들이 즐비하고, 중력장이니 홀로그램실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모두 완비된 이곳은, 웬만한 길드의 단련장보다도 시설이 월등한 ‘김하진 전용 연련실(硏鍊室)’.
이만큼 갖추는 데 거진 삼백억에 가까운 비용이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나에게 6억은 걸레로 써도 되는 돈이다. 방금 내가 조물딱거리던 마공학 아령 세트만 해도 6억은 넘겠네.

그때였다.

“하진~!”

연련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맑은 외침이 울려나왔다. 나는 스마트 워치를 끄고 그쪽을 보았다.
에반젤이 제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세어보니 열 세 명. 아이들은 모두 세상 행복하고 천진한 얼굴로 까르르 웃어대었다.

“이거봐~ 우리, 테레인 언니 만나고 왔어~”

에반젤이 쪼르르 달려와 방금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한 가운데에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에반젤이 몸을 베베 꼬고 있었다.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재밌었겠네.”
“응! 엄청 재밌었어~”

이 빌딩의 47층에 마련된 프라이빗 영화관에서는 오늘, 에반젤과 에반젤의 친구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시리즈 ‘마법소녀 테레인’의 VVIP 시사회가 열렸다.
참석인은 에반젤과 그 친구들까지 열 한명.
영화의 주인공 두 명도 흔쾌히—물론 출연료를 조금 크게 부르긴 했지만— 시간을 내어 아이들을 보러 와주었다.
나는 큐브를 포기하는 대신 에반젤의 일상을 얻은 것이었다.

“아직 잘 시간은 안 됐는데, 뭐 더 하고 싶은 거 있어?”
“음······ 애들이 하고 싶어하는 걸로 할래!”
“오~ 착하네. 얘들아. 너희는 뭐하고 싶니? 워터파크에서 놀래?”

내 물음에 아이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네에에—!
유치원에 온 기분이었다.

“그래. 저, 이 실장님?”
“예. 알겠습니다.”

아이들 뒤에서 그림자처럼 대기하던 남자가 나섰다. 그는 밝게 웃으며 아이들을 데리고 밑으로 내려갔다.

“잘 다녀와.”
“응~!”

나는 그들을 미소로 배웅하고 다시 연련실의 중앙에 섰다.
사방이 통유리로 탁트여 서울의 한강이 훤히 보이는, 서울의 여러 마천루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서초 시가지의 107층 빌딩.

이 전부가 나 김하진의 소유다.

“······많이 벌긴 했네.”

5년 동안 돈에만 몰두한 결과였다.
나는 귀환 실패로 황폐해진 마음을 돈으로 채우고자 했다. 편히 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거의 미친 사람처럼 집착했다.

이미 어느 정도 미래를 알고 있었으니 돈을 끌어모으는 것은 쉬웠다. 솔직한 말로 ‘정수의 해협 관련주는 무조건 떡상한다’ 는 한 문장만 알고 있으면 되었다. 거기에 더해 ‘레버리지’라는 개념을 습득하고 적용하니 돈을 갈퀴처럼 긁어모을 수 있었다.

물론, 단지 미래를 알고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으니 유연하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유연하도 역시 유연하 답게 직접 나를 찾아왔다.
물론 현실 세계는 아니고, 내가 만든 가상의 세계—[진실 사무소]로.

사족이지만 진실 사무소는 이제 고위층이라면 누구나 아는 정보상점이 되었다. ‘웬만하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아주 심플하지만 강력한 업계 일인자로서, 의뢰의 수가는 최소 수십억 이상.
목이 뻣뻣하기로 유명한 메이저 길드 단장이나 재벌 총수들도 [진실 사무소]를 대할때는 언제나 세상 공손하다.

─하진 쨔응~

때마침 익숙한 목소리가 스마트 워치에서 전송되었다. 진실 사무소의 동업자, 김호섭이었다. 요원사관학교 졸업식에서, 그러니까 프롤로그에서 내 옆에 있었던 아기돼지같은 남자.
나는 곧장 대답했다.

“어. 마침 잘 됐다 할 말 있었는데.”
─응~? 뭐냐능~?
“이번에 왕실 길드에서 의뢰가 하나 들어왔다.”
─오~ 그렇냐능~?
“부단장 레이첼 경호야. 승낙할 생각이니까, 대충 주변 조사해서 알려줘.”
─알았다능~

그렇게 통화를 끝낸 뒤, 나는 지하의 에반젤에게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달빛의 난반사가 눈가를 스쳤다. 살짝 감았다 뜬 눈으로 창밖을 보니, 가고일 무리가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이러니 이 세상에 정을 붙일래야 붙일 수가 있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놈들은 보름달의 한 가운데에서, 위용 넘치는 모습으로 지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금속처럼 반질거리는 표피가 달빛을 날카롭게 반사했다.
아마 저렇게 지켜보다가 때가 되면 마천루에 몸통 박치기를 시전하겠지. 물론 모습이 노출되었으니 곧 영웅들이 당도하겠지만, 굳이 그것을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이 주변의 땅과 건물은 전부 내 소유인데.

성흔 속에서 사막의 독수리를 꺼냈다. 손바닥만한 권총은 곧 에테르와 결합되어 흉악한 저격소총이 되었다. 나는 가고일에 총구를 겨냥한 채 플로어의 통유리를 개방했다.

철컥—

장애물이 사라지자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고요히 뻗어나간 여섯 궤적의 섬광이 가고일을 꿰뚫었다. 심장이 파괴된 놈들은 공중에서 죽었다.

먼 하늘에서 수직낙하하는 괴수떼를 지켜보며, 나는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깥에 가고일 시체 있습니다. 회수해주세요.”


[······2주 뒤 월요일, 드디어 중앙아시아에서 전당 회의가 개최됩니다.]

레이첼은 곧 시작할 입단 시험을 기다리면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프랑스는 라 길드 뤼미에르, 독일은 펜저 부르크, 스위스는 라이슬로이퍼(Reisläufer), 이탈리아는 레기오니스(Legiones)가 대표로 선정된 가운데······.]

세상은 오직 ‘전당’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다. 그러므로 역시, 랭커스터가 이런 때에 경고를 보낸 이유도 ‘전당’이겠지.
‘전당’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영국의 미래는 없다는 것을, 랭커스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두려워하지 않기로 하였다.
랭커스터와 영국의 악연을 매듭지을 수만 있다면, 운명의 그 날에 자신의 몸이 부수어지는 결말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었다.

“부단장님,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레이첼이 스마트 워치를 끄고 고개를 들었다. 상층부에 꾸며진 심사위원 전용 발코니석 아래,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흙과 모래로 뒤덮인 저곳은 오직 입단 시험을 위해서 마련된 무대였다.

“이제 관중들을 들여보내겠습니다.”
“네. 그래요.”

이윽고 다수의 민간인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모두 ‘왕실 길드 입단시험’의 티켓을 구매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메마른 들판과 구분된 관중석에 앉았다. 불투명한 마공학 배리어가 시험장과 관중석의 경계였다.
더불어, 상층부의 발코니에 귀빈들이 자리했다. 각 기업의 총수, 혹은 영국의 장관, 유명 영웅 등 셀럽이었다. 그들은 무슨 오페라를 관람하러 온 듯 호화로운 차림새였다.

이러한 ‘민간 개방 시험’은 영국 왕실 길드의 오랜 전통이었다.
시험자들은 오늘 저 무대에서 자신의 진가를 세상에 드러내고, 관중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게 될 것이었다.

천장 스피커에서 사회자의 음성이 내려앉았다.

─모두 대기하여 주십시오. 이제 십오분 뒤, 본격적인 왕실 길드 입단시험, ‘개방’을 시작하겠습니다.

입단시험의 첫번째 관문은 ‘개방(開放)’.
쉽게 말해 자신의 재능을 자유로이 선보이는 것이다.
이 시험에서 열두 명의 시험자는 5분의 시간을 부여 받고, 그 5분 동안 자신의 실력을 이곳 모두에게 선보여야 한다.

─‘개방’에는 다수의 환수가 동원될 수 있으니 주의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레이첼은 눈을 감고 정령과 소통했다. 정령은 시험장 주변에 위험 인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하기야, 아무리 그래도 왕실 길드 부지의 한복판이다. 랭커스터도 처음부터 이곳을 들이박지는 않겠지.

탁- 탁- 탁-

그때, 소등이 되었다. 불빛이 사라지며 어둠이 들어섰다. 웅성이던 관객석이 조용해졌고, 스포트라이트가 시험대의 중앙을 비추었다.
그곳에서 정장을 입은 사회자가 등장했다. 사회자는 Ladys— AND— Gentleman— 를 외치며 입단시험의 시작을 알렸다.

─나눠드린 팜플렛에는 오늘 시험을 치르는 기사(Knight)들의 명단과 순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제야 레이첼도 팜플렛을 보았다.

“첫 번째 순서가 핀리입니다. 순서를 조금 수정할걸 그랬습니다.”

레이첼의 눈치를 살피던 데이크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핀리는 팡파레 보다 피날레가 어울리는 유력 합격자였다.
그러나 정작 레이첼은 순서 따위에 관심이 없는 얼굴이었다.

“······부단장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왕실 길드 부지 안입니다. 경호원 뿐만 아니라 저희 단원들도 확실히 지키고 있고, 일반인들의 검열도 확실히 했습니다. 게다가 제가 따로······. 크흠흠. 아, 저기 핀리가 나오는군요.”

데이크는 뒷말을 삼켰다. 괜히 부단장님 기분 풀어주려다 전부 말할 뻔했다.
다행히 레이첼은 게다가- 다음의 말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자,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던 첫 번째 시험자입니다. 왕실의 방패를 자처하는 용맹스러운 사자 기사. 그의 이름, 제임스— 핀—리—!

시험대의 문이 열리더니, 리뮈에르 출신의 제임스 핀리가 걸어나왔다. 수려한 외모의 유망주가 등장하자 관객석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핀리는 심사위원 측에 경례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어 발자국 물러서더니 양 손에 마력을 모았다. 응집된 마력은 거대한 방패가 되었다.

오오오—

관중석에서 감탄이 일렁였다.

철컹─!

그때 마침 전방의 철창이 개방되고, 연출의 도구로서 환수 무리가 등장했다.
열둘의 자이언트 울프였다.
핀리는 의연하게 서서 놈들의 쇄도를 기다렸다.

─크르르, 크르르릉!

늑대들이 지면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핀리는 정면으로 맞이했다.
늑대는 무리였고, 인간은 한 명이었다. 그럼에도 전투의 진행은 명백했다.
자이언트 울프는 핀리의 방패를 뚫어내지 못했으나, 방패에 얻어맞은 늑대는 깨갱거리며 물러났다. 핀리는 휘청거리는 늑대의 미간을 방패로 후려쳤다.
과격하고 대담한 방패술이었다.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탄성을 내질렀다.

쿵······ 쿵······.

그렇게, 자이언트 울프가 모두 제압된 순간.

쿵······. 쿵······.

어디선가 스산한 진동이 울렸다.
관객들은 다시 숨을 죽였다.

쿵······ 쿵······!

핀리는 배우처럼 과장 섞인 몸짓으로 고개를 들어 진동의 근원을 보았다.
적어도 중급 3품은 되어 보이는 환수, 산군 ‘대호’가 제 어깨를 씰룩이고 있었다.

“······씁.”

핀리는 이를 악물더니 허리를 숙였다. 포기한 듯 보이는 그의 태도에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곧, 그의 굽혀진 몸에서 마력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크으으······.”

핀리는 신음을 억누르며 마력을 방출했다. 마력이 그의 전신을 아우라처럼 감쌌고, 주변만 신경쓰던 레이첼도 그제야 핀리를 보았다. 예상을 뛰어넘는 포텐셜에 눈이 살짝 커진 채로.

“오~ 저런 것도 할 수 있었군요.”
“환수로 대호를 요구할때는 걱정을 좀 했는데, 저런 기술이 있었다니.

모두의 감탄 속에서— 핀리가 몸을 튕겨 올린 그 순간이었다.

기묘한 섬광이 실처럼 반짝였다가 소멸되었다.
불씨처럼 튀어올랐고, 연기처럼 흩어졌다.
모두가 그것을 관측할 수 있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희미했던 현상은— 무엇보다 명백한 결과로써 자신을 드러냈다.

“······어!”

늙은 관객의 외침이었다.
그는 눈이 좋지 않아 무대를 스친 광선을 포착할 수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제임스 핀리만을 지켜보았다.
그 결과로써, 그는 제인스 핀리의 몸이 맥없이 거꾸러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스으으······.

핀리의 미간에서 새카만 그을림이 아지랑이처럼 일었다. 노면에 처박힌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동공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떤 사실이 모두의 머릿속을 관통했다.

저격과 암살.

소란스럽던 공간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차분한 적막이었다.
그러나 ‘방금까지 제임스 핀리였던 것’의 미간에서 핏물이 솟구치자, 찢어질 듯한 비명이 천장을 뒤흔들었다.

—꺄아아아악!
—뭐야, 뭐야 저거! 저거 저거!
—죽었어, 죽었어 저거 죽은거, 죽은거 맞지! 죽었어! 죽었다고!
—마인, 마인이다! 마인이다!

나가려는 자와 넋을 잃은 자가 서로 얽히며 쓰러진다. 보호하려는 자는 도망치려는 자를 막지 못하고 밀려난다. 사람이 사람을 밟고, 외침과 비명과 울음이 혼란스레 뒤엉킨다.
그토록 순시간에 아수라장이 된 곳에서, 레이첼은 밀랍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아득하게 멀어진 세상.
그 위로, 오직 시험장의 시체만이 보였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재능을 선보이던, 영웅이 되고자 했던 젊은이의 죽음이 있었다.

“공주, 공주님! 어서 대피하셔야······!”

데이크의 외침을 뿌리치고 레이첼은 질주했다. 윈디가 그 어느때보다 흉폭한 형상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콰과과과과과—!

제 주인의 분노를 대변이라도 하듯, 바람은 폭풍이 되어 있었다.

< 몽중화 (4) > 끝

< 몽중화 (5) >

······3시간 전.

[임무 수임서 ─ Xtra는 Rocalist가 제안한 임무를 받아들였음을 확인합니다.]

나는 출장에 앞서 빌딩의 지하로 내려왔다. 오직 나만이 입장할 수 있는 최하층에는, 웬만한 냉장고보다 큰 탄약통들이 가득 늘어서 있었다.
그것들 중 하나의 뚜껑을 열자, 가지런히 정돈된 마탄들이 영롱한 푸른빛을 뿜어내었다.

제품명 .308-X.
308 윈체스터를 모델로 삼아 파괴력과 휴대성을 동시에 잡은 탄환이다. 내가 직접 공장을 만들어서 제작한 것으로, 시중에서 판매되는 탄보다 마력의 질이 훨씬 정순하다.

나는 탄약통을 닫고 버튼을 눌렀다. 거대했던 탄약통이 끼리릭— 기계처럼 움직이며 축소되었다. 운반하기 쉬운 수트 케이스의 형상이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런 기술들은 당연히 [설정 개입]으로 해결했다.

탄약 케이스를 들고 지하층의 중심부로 나왔다. 광활한 플로어에 SUV와 바이크를 비롯한 탈것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흠.”

무엇을 골라야 할지 나름 고민이 되었다. 바이크? SUV? 헬기? 아니면 말?
생각하다가 SUV를 선택했다.
차체가 장갑보다 단단하고, 엔진과 타이어에 [사일런스]를 비롯한 여러 마법 문양이 각인되어 있어, 자동차보다 ‘병기’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녀석이다.

나는 SUV에 성흔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SUV도 탄약통처럼 수트 케이스 형상으로 재조립되었다.
그렇게 두 개의 준비물을 양 손에 쥐었을 때, 연락이 왔다.

─하진 쨔응~

김호섭이었다.

“어 왜.”
─부탁한 게 왕실 길드 위험요인 수색하는 거 맞냐능?
“어어. 특히 레이첼 쪽.”
─아~ 그럼 일 다 끝냈다능~

역시 일처리가 빠르다.
솔직한 말로 김호섭은 아무런 생각 없이 설정한 캐릭터인데, 정보적인 측면으로는 세계관에서도 손꼽히는 인재인지라 내 현생에 어마어마한 도움을 주고 있다.

“오케이. 고맙다. 파일 보내고 쉬어.”
─알겠다능~

김호섭이 개인 서버를 통해 정보를 보냈다. 나는 파일 목록을 보자마자 새삼 감탄했다. 정보의 정확함은 물론이거니와, 열람하기 쉽게끔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랭커스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단락은 역시 랭커스터였다. 랭커스터가 영국 왕실 길드에 ‘경고장’을 보냈다는 소문이 있었다.
물리적인 위험 요소는 랭커스터였으나, 여타 보이지 않는 위험 요소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빈약한 재정, 많은 부채, 국내 길드와의 알력, 독일과 프랑스의 압박 등등······.

“쓰읍.”

괜히 입안이 썼다.
원작대로 진행되었다면 레이첼은 김수호의 도움으로 자신을 깨닫고, 보다 정진하여 왕실 길드도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틀어졌다.
나 때문일까, 아니면 제 멋대로 변한 이 세상 때문일까.

······뭐가 되었든 할 건 해야지.

나는 일단 랭커스터와 관련된 정보만 정독하기 시작했다. 김호섭이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여 표시한 덕분에 금세 읽을 수 있었다.

“왕실길드 입단시험?”
─응! 그곳에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능.

김호섭이 대답했다.
나는 입단 시험의 장소부터 참석자, 심사위원, 관중 숫자까지 자세히 들여다보았고, 종국에는 한 남자의 이름이 남았다.

[제임스 핀리]

현재 가장 치명적인 위험 요소였다.
제임스 핀리는 랭커스터로 추정되는 세력과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저번 주에는 아예 블랙마켓에서 마력폭탄까지 매입했다.
놈들은, 김호섭이 아니었다면 추적할 수 없을만큼 복잡한 관계망을 이용했다.

“2차 시험이 언제지?”
─오늘이라능. 두 시간 뒤에 시작한다능.
“뭐? 그걸 왜 지금 알려줘?”

나는 곧장 일어나서 겉옷을 챙겨 입었다.

─거기 통신 회선은 나도 방금, 겨우 해킹한 거라능! 오랜만에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거라능!
“······그 정도야? 그럼 인정. 일단 난 바로 간다.”

Rocalist가 내건 임무는 이미 어젯 밤에 수락했다.
수락하자마자 할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방법은?
“사살.”

시간이 넉넉했다면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금의 사태는 전혀 여유롭지 않다.
이처럼 촉박한 상황에 위험 요인을 배제하는 최적의 방법은, 암살 뿐.

“포탈 순서 좀 앞으로 땡겨줘.”
─알았다능~ 맘 놓고 가라능~


······제임스 핀리가 살해당했다.

입단 시험은 그 즉시 중단되었고, 대대적인 수색이 개시되었다.
왕실 길드는 물론 수사 당국의 인력까지 모조리 동원되었으나, 암살자는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아주 작은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레이첼은 다시 시험장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추리를 시작했다.

가느다란 섬광이 고요하게 날아들어 핀리의 미간을 꿰뚫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일격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 즉 시험장 내부에서 마력을 쏘아냈을 확률이 높아요. 외부에서 마력을 사용했다면 필히 경보가 울렸을 테니까요. 범인은 아마 관중이나 경호원으로 위장했을 거예요.”

레이첼은 세상 진지한 얼굴로 추리를 설파했다.

“그러니 민간인 틈에 파묻혀 쉽게 도망갈 수도 있었겠지요. 또한······ 하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호흡이 진정되지 않았다. 온몸이 뜨거웠다. 레이첼은 그만큼 분노했다.
자신이 지키고 있는 시험장에서, 자신이 보는 앞에서 저격이 발생했다.
분명 랭커스터의 소행일 터였다. 아마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겠지.
고작 그딴 사소한 것 때문에 무고한 젊은이를 희생시키다니. 레이첼은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애써 억누르려 해도 자꾸만 의분이 치솟았다.

“······야이 새끼들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관중들 관리 안 했어?!”

레이첼이 그러는 와중에, 인사팀장 데이크는 장내를 경호했던 영웅들을 닦달하고 있었다.

“저는 진짜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검열 검색했는데, 진짜 아무도 없었어요 관객 중에는”
“여왕님께 맹세하고 결계를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반경 1km 내에서 마력이 발생했다면 분명히 느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마력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예, 예 맞아요. 설마 저희가 소홀히 했을까요. 랭커스터가 경고장 보낸거 다 아는데요.”
“아오 이런 쓸데 없는······”

데이크는 뻗친 머리털을 아무렇게나 쓸어넘겼다. 농담이 아니라 지금 머리통이 깨질 것만 같았다.
왕실 길드의 상급 단원 서른 명은 물론, 레이첼 부단장까지도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시험자의 뇌수가 박살날 수 있느냔 말이다!

─들리십니까.

찰나, 서늘한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데이크는 흠칫 놀라 스마트 워치를 보았다.
일전에 고용했던 용병— ‘Xtra’였다.

“이게 뭐······ 아.”

그 순간 레이크의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호위 임무의 유효 기간은 당장 사인을 한 직후부터였다.
그렇다면, 이 용병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겠지? 아니, 지켜보지 못했더라도 이것을 구실로 가격 정도는 깎을 수 있지 않을까?

“당신, 이 근처에 있습니까?”
─예. 보입니다.
“후, 다행이군요. 그렇다면 혹시, 방금 상황도-
─제가 죽였습니다.
“······예?”

데이크는 잠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어로 말해서 그런가, 이해가 잘 안 되네.
데이크는 ‘제가 죽였습니다’ 라는 문장을 천천히 영어로 해석해보았다.

─제임스 핀리. 제가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

뒤늦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갑작스레 오한이 올랐다. 데이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레이첼의 눈치를 살폈다. 레이첼은 아직도 경관들과 수사를 펼치고 있었다.
데이크가 속삭이듯 물었다.

“당신, 당신 지금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네가 죽이다니?”
─제임스 핀리는 랭커스터에게 세뇌되었거나, 사주를 받은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관련 파일 보낼 테니 확인해주세요.
“뭐? 야!”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너무 크게 외쳤기 때문일까, 레이첼도 이쪽을 보았다.
“생각해보니 부단장님의 추리가 아주 설득력이 있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렇다면······”
그러나 경관의 칭찬에 금세 시선을 돌렸다.

─파일을 보내겠습니다.
“뭐?”

어리둥절하는 데이크의 스마트 워치로 다수의 파일이 전송되었다. 데이크는 레이첼의 동태를 살피면서 파일을 보았다.

[제임스 핀리의 랭커스터 추정 비밀회선 해킹 내역 (극비)]
[제임스 핀리의 이동 경로]
[제임스 핀리의 활동 반경]
[제임스 핀리와 의문의 남자가 찍힌 CCTV······]

방금 사살당한 ‘제임스 핀리’의 6개월 간 행적이 저장된 파일이었다.
데이크는 멍하니 그것들을 보다가, 우선 CCTV 파일부터 열었다.

3주일 전. 런던의 구석진 곳에서 제임스 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핀리는 누구와 말을 하는 듯했고, 곧 무엇인가를 건네받고는 자리를 떴다. 바로 다음 장면에 웬 로브를 뒤집어 쓴 작자가 CCTV를 스쳤다.

─저기서 핀리가 건네받은 물건을, 저는 ‘마력폭탄’이라 추정합니다.
“······.”

데이크는 급히 손가락을 움직여 [제임스 핀리의 랭커스터 추정 비밀회선 해킹 내역 (극비)]을 눌렀다.
다운로드가 불가능하고 열람만 가능한 특수 보안 파일이었다.

「······저는 이제 그 분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었습니다」
「제 한 몸 바쳐서 불사지르겠습니다.」
「예. 영광스러운 선택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My lord. 비루한 왕실에 징벌을.」

상대방의 메세지는 삭제되었는지 누락되었는지 없었으나, 핀리가 직접 보낸 메시지가 맞다면 심각한 문제였다.

“What the······.”

그런데, 이 정도 정보를 어떻게 반나절 만에 다 조사했지? 랭커스터의 비밀회선은 또 어떻게 해킹했다는 거야? 사건과는 별개로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아니. 저기요. 이거 조작, 조작 아닙니까?”

데이크로서는 그렇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마음대로 믿으시면 됩니다.
“뭐라요?”
─당신이 어떻게 믿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제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데이크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이상하게 신뢰가 갔다.
Xtra는 이곳에 있는 영웅과 용병들을 전부 압도하며,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제임스 핀리를 암살했다.
만약 Xtra가 랭커스터의 편이었다면 핀리가 아닌 레이첼을 사살했겠지.

─제가 드린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지는 당신의 마음입니다.

데이크는 주변을 휘둘러보고는 자리를 피했다.
홀의 구석탱이에서 속삭이듯이 물었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잖습니까. 언질은 주고 쏘시지······.”
─영국행 포탈에 문제가 생겼었습니다. 늦게 도착해서 급했습니다.
“아니, 언질 말이오 언질. 지금 당신이 나한테 통화하고 있는 것처럼, 고장난 포탈 기다리면서-”
─제가 핀리를 사살하도록 놔두셨겠습니까? 3초라도 늦었으면, 핀리가 이 홀 전체를 터트렸을 겁니다.

데이크는 잠시 천장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핀리가 정말 마력 폭탄을 지니고 있었다는 가정 하에─ Xtra의 말이 옳았다.

─아무튼. 거기서 제가 극비라고 표시한 파일이 보이시지요.

Xtra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파일들의 이름을 다시 훑었다.

[제임스 핀리의 랭커스터 추정 비밀회선 해킹 내역 (극비)]

“예. 발견했습니다.”
─그것 만큼은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마십시오.
“······예? 그것을 공개해야 핀리가 랭커스터의 끄나풀이었다는-”
─지금 저와 당신이 쓰는 회선은 해킹이나 유출의 염려가 전혀 없지만, 다른 사용자에게 보내는 순간 랭커스터에게 유출이 될 겁니다. 그러면 제가 놈들의 비밀회선을 해킹했다는 것이 발각되고, 놈들은 다시 회선을 바꾸겠죠. 제 해킹이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아. 예.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과연, 일망타진할때까지는 제 이빨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웬만하면 제 정체도 숨겨주십시오. 저도 공개되지 않는 편이 활동하는 데 좋으니.
“당연합니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데이크는 곁눈질로 제임스 핀리의 시체가 있는 쪽을 보았다. 현장을 훼손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레이첼과 경관들은 시체와 멀찍이 떨어져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단, 제임스 핀리의 시체를 확인해보세요. 놈의 몸 어딘가에 마력폭탄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흐흠, 흠. 여기 뭐가 있나······.”
─조심하세요. 폭탄을 반입하는 데 도움을 준 다른 끄나풀도 그곳에 있을 겁니다.

데이크는 노면에서 뭔가를 찾는 척 시체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

Xtra의 말대로, 핀리가 장착한 플레이트 흉갑 속에 정체불명의 물체가 있었다.
데이크는 핀리의 갑옷을 벗겨내려 했다.

“잠시만요! 시체는 저희가 회수하겠습니다.”

하필 그때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MI6의 요원들이 출동한 것이었다.
데이크는 아주 잠깐 그들에게로 한눈을 팔았다.

“좀만 기다려 보세요. 일단 뭐 확인 좀 하고······?”

그러나, 데이크가 다시 핀리를 돌아보았을 때.
암적색 흉갑 속에 언뜻 비쳤던 보랏빛 물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게 뭔······.”
“비켜주십시오.”

MI6가 데이크를 밀어냈다. 경관과 대화를 나누던 레이첼도 이쪽 현장을 돌아보았다.

“거기, 무슨 일 있나요?”
“예? 아, 부단장님. 아니 그······ 이게······.”
“네?”
“······.”

데이크는 다만 우두커니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부단장과, 시체를 회수하는 MI6의 요원들과, 주변을 서성이는 영웅과 경관들을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 몽중화 (5) > 끝

< 몽중화 (6) >

‘제임스 핀리 암살 사건’은 발생 3분 만에 전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에 올랐다. 각국의 언론들은 랭커스터의 소행일 것이라 추측하였으나, 수사당국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사실이 없다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런 점에서— 데이크는 이 사건을 랭커스터의 소행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런데 당장 내일 아침이 되자 사건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먼저 언론 쪽에서 교묘한 음모론을 설파했다. 제임스 핀리의 죽음에 의문점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실 길드가 어떤 변호를 내놓기도 전에, 더 큰 폭탄이 터졌다.

[어긋나고 뒤틀린 경호. 제임스 핀리의 살인범은 사실 왕실 길드가 고용한 용병이었다?]
[왕실 길드가 고용한 초보 용병······ 5년 경력에 수임한 임무는 고작 스무 개.]

데이크가 자색연회의 용병을 고용했다는 사실이 갑작스레 유출된 것이었다. 그 뿐 아니라, Xtra라는 용병의 신상까지도 언론은 이미 알고 있었다.

데이크는 가장 먼저 페르민을 의심했다. 그러나 페르민은 결백을 주장했고, 그때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의 사무실을 포함한 ‘왕실 길드’ 전체가 랭커스터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면? 놈들이 페르민과 나의 대화를 도청하고 언론에 유출한 것이라면?

“······왜 저에게 알리지 않은 겁니까!”

영국 왕실 길드 부단장의 집무실.
레이첼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일년에 한 번도 보기 힘들다는 부단장의 분노였다.

“죄송합니다. 전당회의에 앞서 너무 우려가 컸던 것 같습니다.”

그 앞에서 데이크는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제임스 핀리 암살 사건’이 Xtra의 소행임이 밝혀진 지금, 그는 모든 사실을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변명은 필요 없어요. 어서, 주세요.”

레이첼이 손을 훽 내밀었다.

“저······.”
“어서.”

그럼에도 데이크가 머뭇거리자 레이첼이 손을 파닥거렸다. 파닥파닥. 파닥파닥. 당장 내놓으라는 몸짓이었다.
데이크는 하는 수 없이 제 스마트 워치를 부단장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Xtra는 여기 있나요?”
“예. 거기 개인 회선에······.”

레이첼은 뚝딱뚝딱 스마트 워치를 조작하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뚜— 뚜— 하는 신호음이 몇 번 가더니 통신이 연결되었다.
레이첼이 시계 째로 귀에 대고 말했다.

“당신이 Xtra입니까?”

그렇게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레이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대답하세요. 저는 왕실 길드의 부단장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눈을 가늘게 좁힌 레이첼이 지이잉— 레이저 같은 눈으로 스마트 워치를 노려보았다.

“침묵하셔도 소용 없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데이크는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

“······제 인내심을 시험하려 들지 마세요.”

레이첼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반응이 없자 무심코 헛웃음까지 흘렀다. 금세 미소를 거둔 레이첼은 더없이 싸늘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말하세요.”
“······.”
“당신 뭐야.”
“저······.”
“말해.”
“······부단장님?”
“당신 지금- 왜요.”

레이첼은 데이크에게도 쌀쌀맞았다. 데이크는 레이첼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시계를 차시거나, 스피커 모드로 하셔야 목소리를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

그제야 레이첼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헛기침을 험험 하고는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기계는 익숙하지 않아서······ 이제 들리시나요?”
─······들리기는 예전부터 들렸다. 네가 못 듣고 있었던 것 뿐이지.

드디어 대답이 돌아왔다. 무겁고 눅눅한 음색이었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레이첼은 시계를 바꿔 쥐었다.

“확실히 말하십시오. 정말-”
─나는 내 의뢰인이 아닌 자와는 통화하지 않는다.
“당신이, 네?”
─끊는다.
“메?”

뚝-
전화가 끊겼다.
레이첼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만 껌뻑거리며 데이크를 쳐다보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는 듯했다.

“그······ 부단장님. 일단 파일부터 확인하시지요. 저 용병이 저에게 건네준 파일이 있습니다. 제임스 핀리가 랭커스터의 세작이었다는 증거입니다.”
“······파일.”

레이첼의 얼굴이 다시 심각해졌다.
데이크는 Xtra에게 건네받은 파일 목록을 레이첼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증거—[제임스 핀리의 랭커스터 추정 비밀회선 해킹 내역]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Xtra의 강권이었다. 만약 랭커스터가 자신들의 회선이 해킹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해당 통신 루트를 곧장 폐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레이첼 부단장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데이크의 불신은 다만 이 공간 전체로 향한다. 이곳에는 랭커스터의 눈과 귀가 널려 있다.

“······증거는 이게 다인가요.”

파일들을 모두 확인한 레이첼은 다시 평정을 되찾은 듯했다.

“예.”
“이 용병은 이런 것들이 증거라고 생각했나요.”

아니, 지금 보니 평정이 아니었다. 레이첼은 차갑게 얼어 붙어 있었다.
데이크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가장 유력한 증거를 제외하고 남은 것들은, 수상한 행적과 애매모호한 CCTV 화면 정도 뿐이었으니.
레이첼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뒷골목, 블랙마켓, 매음굴, 미신고 던전······ 그리고, 클럽?”

레이첼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임스 핀리는 매음굴에서 매춘을, 뒷골목에서 마약을 했을 수도 있어요. 블랙마켓에서는 밀수를, 미신고 던전에서 불법을 저질렀을 수도 있어요. 클럽에서 춤을 출 수도 있지요.”

영웅은 수도승처럼 살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영웅에 어울리는 짓은 아니지만, 제임스 핀리가 정말 그랬다 하여도 자격박탈이나 징역이면 충분했을 거예요. 그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어요.”

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는 지탄을 받고, 죄를 저지르면 걸맞은 처벌을 받으면 된다.
그러나 그 처벌이 ‘사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백번 천번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부단장님. 아직 증거가 부족하긴 하지만, 제임스 핀리의 몸에는 수상한 것이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똑똑히 봤습니다.”

레이첼의 얼굴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데이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용병 계약은 파기하는 걸로 하겠어요.”


[사실은 ‘제임스 핀리’가 테러범이었다?]
[제임스 핀리의 수상한 행각 조명······]
[하원의장 렌지에 블라어, “제임스 핀리가 테러범이라는 증거는 빈약하다. 과도한 경호로 무고한 영웅의 목숨을 앗아간 왕실 길드는 억측이나 선동을 자제하고, 제대로 된 사과와 성명을 발표해야 할 것.”]
[화제의 용병— 제임스 핀리를 암살한 ‘Xtra’는 누구?]
[자색연회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Xtra.]
[영국 정부, 용병 Xtra의 추적을 지시······]

펜트 하우스의 소파에 누운 채, 나는 영국 언론의 헤드라인들을 대조하며 보았다.
무슨 한 시간 마다 기사의 논조와 여론이 훽훽 뒤바뀌었다.

처음에는 ‘랭커스터가 저격한 제임스 핀리’였다가, 그 다음에는 ‘왕실 길드가 고용한 용병에게 오인사격 당한 제임스 핀리’였다가, 또 다음에는 ‘제임스 핀리는 랭커스터에게 사주를 받은 테러범이었다’였다가, 돌고 돌아서 ‘테러범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니 용병 Xtra와 그를 고용한 왕실 길드가 잘못했다’까지······.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같구나.”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일단, 지금 여론은 왕실길드의 부주의가 제임스 핀리를 헤쳤다는 쪽에 쏠렸다. 덕분에 왕실을 비롯하여 Xtra까지도 집중 포화를 맞고 있다.

더불어, 제임스 핀리의 몸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또한 랭커스터의 소행일 것이었다. 랭커스터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영국의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렸으니.

「용병 계약을 파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약 30분 전에, 레이첼이 나에게 계약 파기의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당장 10분 뒤, 세상 정중한 문자가 데이크로부터 도착했다.

「설득을 해보았으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부단장님도 완고하신 분이라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임무는 계속 하는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저번에 말씀하셨던 대로, 의뢰인은 부단장님이 아닌 저이니까요. 완수금은 두배로 드리겠습니다······」

지금 영국의 상황은 이렇게나 복잡하다.

“······그냥 내가 죽였다고 레이첼한테 말하는게 낫지 않을까?”
─비추한다능!

김호섭이 곧장 외쳤다.

“왜.”
─레이첼 주변에는 어마어마한 첩자와 프로그램이 깔려 있다능! 당장 네가 레이첼에게 모습을 드러내면, 네 정체가 그들에게도 발각될 것이라능. 하진쨔응, 혼자서 랭커스터 막을 수 있냐능? 지금 구악이랑 대등할 정도라는 소문도 파다하다능.
“어렵겠지. 그래도······ 뭐? 구악?”

방금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 앉아서 되물었다.

“랭커스터가 어떻게 구악이랑 대등해?”

랭커스터는 절대 구악과 대등할 수 없는 놈이다. 설정이 그렇다. 오히려 구악에 기생충처럼 달라붙어서, 그들의 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배역인데······.

─찾아보니까, 3년전부터 판데모니엄에서 세력을 어마어마하게 불렸다능. 그래서 막 첩자같은 것도 각국에 어마어마하게 보냈다능. 놈들한테 세뇌되다시피한 사람도 어마어마하게 많다능! 제임스 핀리도 그 중 한명인 것 같다능.
“그게 뭔.”

솔직한 말로 랭커스터는 거의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바알이 사라지고, 비원의 탑은 아예 존재 자체가 삭제되고, 괴수왕 오르덴도 그 정체 묘연한 지금, 그나마 위협이라고 할 만한 세력은 구악 뿐이었으니.
그런데 왜 갑자기 랭커스터가?

“이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때였다.

[기적의 탑의 파편 ─ ‘흔들림’이 발생합니다!]
[당신에게 ‘깨우침’이 일어납니다!]
[비원의 탑 보너스 ─ ‘특전 계승’이 주어집니다!]
[플레이어 창고에 보관된 아이템 하나를 계승합니다!]
아이템 계승 ▶「검은 연꽃의 활」
[플레이어 창고에 보관된 특성 하나를 계승합니다!]
특성 계승 ▶ 「어린 드워프의 손재주」
[플레이어 창고에 보관된 스킬 하나를 계승합니다!]
스킬 계승 ▶ 「랜덤 주사위」

근 4년만에 처음으로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으억!”

천장에서 갑자기 내 상반신만한 물체가 떨어졌다. 깔린 채로 보니 웬 활이었다. 활등부터 시위까지 죄다 시커멓고, 활대에는 연꽃 비스무리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다.

“이건 또 무슨······.”

나는 멍하니 활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돌연히 발생한 이적(異跡)의 성능 따위에 대한 심사는 아니었다.

“왜 하필 지금?”

4년 가까이 침묵하던 빌어먹을 시스템이 이제서야 나타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지만, 나의 ‘어떤 행동’이 스토리의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일까.
나는 그 방아쇠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이윽고, 팽팽하게 돌아가던 머릿속에서 어떤 단어가 섬광처럼 번졌다.

“랭커스터.”

사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요 근래 내가 한 일이라고는 ‘제임스 핀리 저격’ 뿐이니까. 아마 내가 랭커스터와 레이첼 간의 스토리에 개입했기 때문에······

윙-

갑자기 거실 문이 열렸다.

“으어!”

나는 거의 날다시피 굴러서 소파 뒤에 숨었다.
그리고 고개만 빼꼼 내밀어 전황을 살폈다.

“······하아아암~”

에반젤이 눈을 부비적거리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보디가드 하양이와 함께였다. 하양이는 하양하양 걸었다.
에반젤은 소파 뒤에 있는 나를 힐끔 보고, 그러나 별 반응 없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더니 다시 아장아장-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크음. 크으음.”

나는 그런 에반젤의 뒷모습을 조금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아 씨.
이거 괜히 쪽팔리네.

< 몽중화 (6) > 끝

< 몽중화 (7) >

나는 지하 공방으로 내려왔다.
세계가 내어준 ‘계승’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어린 드워프의 손재주」
▶「랜덤 주사위」
▶「검은 연꽃의 활」

「손재주」가 업그레이드 되었고, 이상한 장비와 스킬을 각각 하나씩 얻었다. 장비는 아예 모르는 것이었으나, 스킬은 내가 비원의 탑에 안배해둔 설정 중 하나였다.

“검은 연꽃은 뭐야?”

뭔지 모르겠으니 내 설정에 있었던 스킬 [랜덤 주사위]부터 꺼냈다.
주사위는 시전자의 바람에 반응하므로 그냥 좋은 것이 되어라— 생각하며 굴렀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던 랜덤 주사위는 곧 푸른빛을 발하는 돌멩이가 되었다.
마력과 탄소가 응집된 결정, 블루 다이아몬드였다.

“······오호라.”

이 정도 크기면 한 5억 정도 할 것 같은데. 나쁘지 않네.
나는 보석을 주머니에 넣었다.

「어린 드워프의 손재주」
[상급] [환상 속성] [성장형 ─ 3등급] [성장형─ 63%]

다음으로는 어린 드워프의 손재주.
왜 어린 드워프인지는 모르겠으나, 하기야 어른 드워프였다면 밸런스에 문제가 생겼겠지.

나는 손바닥을 쫙 펼쳐봤다. 뭔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뭘 좀 만들어봐야 알겠는데”

에반젤 침대나 새로 만들어줄까.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하진쨔응. 영국 뉴스 봤냐능?!

김호섭이 다짜고짜 통신을 걸어왔다.

“뭔 뉴스?”
─보내줄테니까 보라능!

여러 기사의 헤드라인이 전송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초 전에 터진 영국발 뉴스들이었다.

[저격범 Xtra의 결정적인 증거 발견!]
[Xtra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 영국 정부, 영웅 협회에 수사 의뢰 고민 중.]

제임스 핀리를 저격할 때, 사정거리는 4km였다. 성흔이 부여된 탄환은 관통력과 살상력이 증대되어 제임스 핀리를 일격에 사살하였고, 명중 즉시 소멸되어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었다.
당연히, 랭커스터의 조작일 것이었다.

─녀석들이 우리를 끌어내려 하고 있다능. 그리고, 이거.

김호섭이 랭커스터의 ‘비밀회선’을 해킹한 내용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Xtra에 대한 정보는 이 이상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행적이 묘연하고, 그 외의 신상은 단 하나도 공개되어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일단 의회의 윗선부터 움직여 영웅 협회를 끌어들이도록 해보겠습니다. 어차피 일개 용병입니다. 협회가 관여한다면 무슨 반응을 보이겠지요.」
「제임스 핀리의 정보가 어떻게 새어나갔는지도 확실히 알아보도록······」

김호섭의 해킹은 어느덧 랭커스터의 내밀한 곳까지 파고들어 있었다.

“흠······ 생각보다 쎄게 나오네. 괜히 죽인 건가?”
─아니라능!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그게 최선이었다능. 안 죽였으면 왕실 길드는 오히려 더 크게 흔들렸을거라능. 걔네가 샀던 마력폭탄, 엄청 좋은거였다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염려가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장 영국 왕실 길드의 상황이 개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영국 몰락 가시권, 입단 시험자를 직접 살해한 최초의 길드]
[영국증시 ‘핀리사건’ 쇼크······ 런던증권거래소 문 열자마자 13% 폭락······]
[영왕 주가, 1월 8일 하룻 동안 33% 폭락. 영국 2위 길드 ‘아서 나이트’에게 시총 역전]

“여론이 이 상태면 비밀회선까지 공개해도 조작이라고 얻어맞겠는데?”
─맞다능. 게다가, 저쪽에도 만만찮은 해커가 있다능. 지금으로서는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라능!

김호섭은 그렇게 말했으나, 만약 랭커스터가 정말로 구악과 동격의 세력을 이루었다면, 이렇게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호섭아.”
─응?
“그럼 우리 돈이나 좀 벌자.”
─돈? 돈은 이미 많이 벌지 않았냐능?

거의 쓸어모으다시피한 정수의 해협 테마주가 전부 대박나고, 그 외 「진실 사무소」의 수가는 물론, 내 특성 [손재주]로 직접 제작한 물품들을 어마어마한 고가에 판매하면서, 나는 적어도 세계 30위 안에 드는 대부호가 되었다.
현금으로만 따지면 아마 1위겠지. 진실 사무소는 현찰만 취급하거든.

“많을수록 좋잖아. 그러니까 지금 영왕 떡락하고 있는거, 네가 저점이라고 생각할 때 전부 사버려. 웬만하면 거의 전부.”

이 세상도 철저한 자본주의인지라, 길드에게 가장 치명적인 위협은 구설수 따위가 아니라 ‘주가’다.
따라서 주가만 방어한다면 왕실 길드가 받는 압박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영왕은 51:49라능. 51는 왕실 소유, 49는 민간 소유. 49밖에 못산다능.
“죄다 사버려.”
─49를 전부?
“어. 최대한 많이.”
─돈 꽤 많이 들거라능?

나는 작게 웃었다.

“예전부터 말했잖아. 나도 길드 하나 굴려보고 싶다고. 내가 왕실 길드 이사장하지 뭐. 그리고, 어차피 내 통장은 써도 써도 안줄어.”

랭커스터가 구악에 준하는 세력을 갖추었다 한들, 대저 나보다 부유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침 안개가 초겨울의 서릿빛으로 물든 2031년 1월 10일.
영국 왕실 길드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가 갑자기 노선을 틀었다. 대폭락하던 주가가 갑자기 상승세로 돌변한 것이었다.

“······상황 브리핑 부탁해요.”

레이첼은 집무실에 앉아 퀭한 눈으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사건이 발생하고 120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숨도 자지 않았다.

─브리핑이라고 할 것이······ 지금 상세불명의 누군가가 왕실 길드 주식을 전부 매입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희도 상황을 파악하려 하고는 있지만, 영 모르겠습니다.

[영국 왕실 길드(ERG) +24.5%]

전일대비 -20%, 전전일대비 -43%까지 하락했던 주가였다.
그만큼 ‘공채 면접자를 살해했다’는 불명예는 치명적이었고, 자신의 퇴단은 물론 간부진 전원을 물갈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었는데······.

─너무 막대한 탓에 개미들도 깜짝 놀라서 따라붙고 있습니다.

실시간으로 차트가 치솟고 있다.
세계를 주무르는 여의도 애널리스트들도 회생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였건만, 매입의 규모와 추세는 그들의 예상을 직격으로 깨부쉈다.

“그렇다면······ 아, 올라간다!”

레이첼은 요동치는 차트를 두 손 꼭 모은 채 지켜보았다.

“으······ 우!”

차트가 확 올라갈때마다 아기 옹알이같은 비명이 울렸다. 혼자 롤로코스터를 타는 듯 그녀의 몸도 부웅 떴다가 내려앉았다.

“······하아.”

허나, 약 30분 정도 이어지던 상승세는 금세 하락장으로 돌아섰다.
지분을 보다 많이 확보하기 위한 김호섭의 전략적인 개미털이였지만, 그것을 모르는 레이첼은 금세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의자에 몸을 묻었다.

문득 레이첼은 이러는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도대체 이 무슨 추태냐. 지금은 주가 따위에 일희일비할 때가 아닌데. 당장 전당이 코앞일 뿐더러, 제임스 핀리 사건도 끝나지 않았다. 대국민 사과를 하든, 아니면 제임스 핀리와 랭커스터의 관계를 수사하든, 대중에게 길드의 뜻을 확실히 전해야만 한다······.

똑똑—

그때 집무실에 노크가 울렸다. 레이첼은 자세를 바로 한 뒤 방문객을 불러들였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굳은 얼굴의 데이크가 있었다.
데이크는 천천히 다가와 레이첼에게 묵례를 했다. 그리고 품 속에서 어떤 봉투를 꺼내었다.
퇴단서였다.

“퇴단서입니다.”
“······.”

레이첼은 아무 말 없이 데이크를 바라보았다. 반면 데이크는 부단장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제 뼈를 갈아서라도 공주의 힘이 되어주겠노라 맹세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짐이 되어버렸으니, 최선은 이렇게 퇴장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저는 퇴단을 원하지 않습니다. 파면을 부탁드립니다.”

데이크는 언제나 일신의 안위보다 조국과 길드를 우선하여 생각했다.
그렇기에, 부단장도 그럴 수 있길 바랐다.
어린 부단장에게 너무 고된 일을 강요하는 것 같아 속이 쓰리지만, 레이첼은 영국의 미래이자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다.
데이크는 그녀가 버틸 수 있길 바란다.

“제가 퇴단서를 제출하였으나, 부단장님께서는 퇴단이 아닌 파면을 내렸다고 언론에 발표하시면 될 겁니다. 저도 기자회견을 할 테니, 적어도 전당이 끝날때까지는 언론도 잠자코 있어 줄 겁니다.”

레이첼의 입술이 떨렸다.
데이크는 그녀가 큐브를 졸업하기 전부터 곁에 있어준 동료였다. 그녀가 ‘믿을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단원이었다. 그녀가 아이였던 시절부터 조국에 헌신해온 영국의 영웅이었다.

그런 사람이, 또 다시 자신을 떠나려 하고 있다.
레이첼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파면까지는-”
“죄송합니다. 머지 않은 전당 회의,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라겠습니다. 저는 조금 먼 곳에서 부단장님을 지켜보겠습니다.”

그러나 데이크는 완고했다.
다시 한 번, 레이첼은 자신의 심장이 잡아뜯기는 것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파하는 내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네. 가보세요.”

레이첼은 흔들림 없이 퇴거를 고했고, 데이크는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부단장실의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그곳에서, 적막한 그곳에서, 레이첼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이 흐르는지 그녀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다만 무너지듯 책상에 몸을 기대었다. 고운 숨을 몰아쉬며 조용히 울었다. 아득 깨문 잇새로 바람소리같은 울음이 흘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한 번 견뎌내면, 혹은 한 숨 자고 나면 사라질 슬픔이다. 그러니 울음이 아니다. 단지 미련을 털어내는 것 뿐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북한산과 맞닿은 서울 외곽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금싸라기 땅이다.
산의 정기와 냇물의 흐름이 만나는 명당. 모든 부동산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서 ‘값을 측정할 수 없는 영맥’이라 말하는 그 자연 속에, 고풍스러운 한옥 여러 채가 녹음과 조화를 이루며 늘어서 있다.
배산임수의 원칙을 충실히 지킨 채, 나무들과 함께 숨쉬는 이곳 부지는 신선이라 불리는 채주철 일가의 거처다.

“······아~ 진짜. 이해 안 되네 이거.”

‘대현화선’이라 불리는 이 명지(名地)의 주인 중 한 명, 정수의 해협 제 1 대적자 채나윤은 방바닥에 앉아 황금빛 수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적석]

이것은 기적의 탑을 완등함으로써 쟁취한 보석. 기적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가장 최상위의 현상─ ‘회귀’를 가능케 해주는 수정이다.

“암튼 내가 잘못했다는 거 아냐.”

그러나 채나윤은 마지막에 일을 약간, 아주 약간 그르쳤다. 기적석을 코앞에 두고 극도로 흥분한 바람에 너무 과격하게 행동한 것이다.

“······진짜 손톱 만큼 부서졌는데.”

엄지손가락만한 기적석의 우측면에 새겨진 자그마한 흠집. 아주 가벼운 손상이었으나 그것을 바라보는 채나윤의 마음은 타들어가는 듯했다.

아무튼.
그러니까.

채나윤은 이것 때문에 ‘진짜 회귀’를 미룰 수 밖에 없었다.

“어휴.”

사각사각─
그녀는 펜을 쥐고, 어젯밤에 산 일기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채나윤의 일기]
[오늘은 2031년 1월 13일이다.]
[내가 2030년 10월 1일으로 가짜 회귀를 했으니까, 지금은 약 3개월 정도가 지났다.]
[조사해본 바, 이 세계에는 비원의 탑과 기적의 탑이 없고, 바알도 없고, 울 오빠도 없다.]

울 오빠도 없다.
그 단락에 밑줄을 쫙쫙 그었다.

[그래서 이 꿈 속에서 내가 뭘 해야할지 아직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대충 나는 여기서 기적석의 파편을 찾아내고, 이 가짜 세계에 갇힌 사람들—특히 레이첼—을 구해야 한다.]
[아 근데 뭔 탑 보상이 바닥에 떨어트렸다고 깨지냐;; 진짜 생각할수록 어이없네 ㅅㅂ;]
[음······ 일기 끝]

“······이만하면 됐지 뭐.”

‘오늘부터 쓰는 일기’를 대충 마무리한 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머리 썼으니까······.”

그대로 노트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부 비스무리한 것을 자그마치 15분이나 했으니, 이제는 뇌를 식혀줄 필요가 있다.
채나윤은 방의 구석에 있는 가상현실캡슐로 쪼르르 달려가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접속!”

그렇게 외치자마자 캡슐의 뚜껑이 갇히고, 현실과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나윤짜장맨님의 접속을 환영합니다.]
[게임을 선택해주십시오.]

“온라인 게임. 중세의 시대.”

요즘 한창 캡슐방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는 게임, 중세의 시대(Age of Middle).
원래 세계에는 없었던 게임이라 채나윤도 나름 즐기고 있다.

[‘나윤짜장맨’님의 접속을 환영합니다.]
[나윤 짜장맨]
[199cm, 115kg]
[레벨 93]
[직업 ─ 에토르닉 부족 전사(히든)]
[칭호 ─ 전설적인 바바리안]

접속과 동시에 새로운 풍경이 솟아났다.
어젯밤에 로그아웃 했던 장소, 도시의 시장판이었다.

“손님들~ 이거, 이거 사고 가세요~”
“어이구 몸 좋으시네. 형님. 포션, 포션 하나 사고 가세요~”

수많은 상인 플레이어들이 채나윤에게로 다가왔다.

“됐어요 됐어. 안사요 안사.”

채나윤은 그들의 호객을 뿌리치고 걸었다.
당장 워밍업이나 할 겸 성 밖으로 나가려는데, 웬 캐릭터가 나타나서 앞을 가로막았다.

“야 채나윤. 너 여기서 뭐해?”
“······?”

채나윤은 둥그래진 눈으로 플레이어를 보았다.
이상한 캐릭터였다. 레벨도 낮고 뭣도 없는데, 옷차림만 화려하다. 왜 대낮 시장판에서 드레스를 쳐 입고 있는 거야?

“······누구세요?”
“뭘 누구야. 나 유연하잖아.”
“어? 아······ 어. 그래. 왜.”

과연 듣고 보니 유연하 특유의 몸짓이 보였다. 왜 왼팔을 허리에 두르고, 오른팔을 그 위에 얹는, 중세 귀족이나 할 법한 제스처 말이다.
유연하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너, 곧 전당인데 자꾸 이럴거야?”
“뭐가. 지금 너도 겜하고 있잖아.”
“······게임을 하긴. 네가 나 차단해서 일부러 캐릭터까지 만들어서 쫓아온 거 아냐.”
“엥? 근데 옷차림이 어째 그리 화려해.”
“아무리 게임이라도 남루하게 다닐 순 없잖니~ 옷이랑 악세사리에만 현질 좀 했지. 아 참, 내 이름 딴 상단도 하나 세우긴 했어. 접속한지 고작 ‘15분’ 만에.”

유연하가 음하하핫 웃었다. 그러나 금세 정색하고는 말했다.

“됐고, 빨리 나오기나 하렴. 오늘 합동 훈련 있다고 했잖아.”
“응 너 차단.”
“뭐? 아, 안돼. 야. 하지-!”

곧장 유연하를 차단했다. 화려하고 다채롭던 유연하의 캐릭터는 그 즉시 새까만 실루엣이 되었다.

“!@#$#@!@# !@#$%#@! @@#!@#”

자신을 붙잡으려는 새까만 덩어리를 무시한 채, 채나윤은 [이동 주문서]를 사용했다. 목적지는 이 게임에서도 고렙들만 입장할 수 있는 [검은 장미 백작의 성]이었다.

슈웅─ 하는 파동과 함께 몸이 전송되었다.

[검은 장미 백작의 성]
─레벨 80 이상 입장 가능

장소 자체가 체크 포인트로 기능하는 이 ‘검백성’에는 역시 퀘스트를 기다리는 네임드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채나윤은 그들의 닉네임들을 훑다가, 어떤 아이디를 발견하자 설핏 웃으며 멈춰섰다.

[엑스트라7]

채나윤은 저 아이디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았다. 지금은 오히려 저쪽이 자신을 모를 수도 있었다.

“······쟨 어떻게 맨날 있냐.“

사실, 이 게임을 설치한 이유는 그를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이건 그가 플레이하는 유일한 게임이니까.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으니,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마침 엑스트라7이 뒤를 돌아보았다. 돈을 얼마나 발랐는지 온갖 최고급 장비 투성이에다가 캐릭터의 얼굴도 본판보다 훨씬 잘생겼다.
그러나 채나윤은 그 캐릭터 속에 있는 어떤 남자를 떠올렸다.

“······?“

시선을 느낀 듯, 그가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하지만 채나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굳이 다가가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어딘가 구석진 곳에 앉아, 은은하게 웃으며 그를 훔쳐볼 뿐.

나는 아직, 그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

< 몽중화 (7) > 끝

< 몽중화 (8) >

세계 유수의 길드들이 ‘전당 행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왕실 길드도 그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없는 살림을 최대한 쥐어짰다.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면서 먹을 식량, 야영에 필요한 마공학 텐트와 취사도구, 여러 마법적인 통신구슬과 아티팩트, 현지 관료에게 지불할 뇌물, 포탈 이용비 등등······ 수백억에 가까운 예산이 한순간에 소모되었다.

이동 수단은 고민 끝에 말을 채택했다. 왕실에서 기르던 준마 중 열한 필을 선별하여 각 영웅들에게 배정했다. 영국은 나름 ‘기사의 나라’였던지라 말의 품종만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레이첼은 기자회견을 통해 데이크의 파면을 발표했다. 그 덕분에 들끓던 국내 여론도 어느 정도는 가라앉았다.
“아직 석연찮긴 하지만 제임스 핀리도 그렇게 좋은 녀석은 아니었던 듯하고, 당장 너네 아니면 전당 나갈 길드 없으니까, 전당 끝내고 오면 두고보자—”, 뭐 이런 상황이었다.

“중국 시닝에서 포탈을 열어주겠답니다.”

그렇게 길드가 안팎으로 바쁜 시점. 레이첼의 집무실에서 페르민이 말했다. 건강한 구릿빛 피부에 긴 머리를 말총처럼 땋아 내린 그녀는 파면된 데이크의 후임자로 승격되었다.

“······한국의 길드는 전부 뉴델리에서 출발하겠죠?”

뉴델리는 ‘전당’과 가장 가까운 문명 도시였다. 그러나 뉴델리가 포탈 사용료를 어마어마하게 올린 바람에, 영왕은 그곳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단원 한 명당 10억은 도대체 어느 세상의 가격이란 말인가.

“옙. 근데 별로 좋을 것 없습니다. 거긴 벌써부터 헬리랑 드론들이 수십기씩 떠다닌답니다. 취재판, 지옥이죠 지옥. 아, 그것보다 단장님. 이거 보십시오. 이번에 구매한 마공학 텐트입니다.”

페르민이 자기 주머니에서 웬 고무공 같은 것을 하나 꺼냈다. 레이첼의 눈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뭐예요?”
“자, 보십시오~ 겉보기에는 축구공보다 작지만, 이렇게 굴리면!”

페르민이 호기롭게 외치며 공을 굴렸다. 공은 데굴데굴 굴러가 집무실의 벽에 닿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페르민과 레이첼은 두 눈을 깜빡거리면서 공을 쳐다보았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중고라 그런가? 잠시만요.”

페르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가던 순간, 촤르르륵—! 텐트가 펼쳐졌다.

“와악!”
“!”

페르민은 크게 놀랐고, 레이첼도 덩달아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추스르고 텐트를 바라보았다.

“나쁘지는 않은데, 벽에 박혀버렸네요.”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벽에 맞닿은 상태에서 펼쳐졌기 때문일까, 텐트의 뼈대가 벽면을 뚫어버렸다.
저거 하나에 천만원 짜린데. 사자마자 부서져버렸네. 페르민은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때 돌연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저, 부단장님! 여기, 여기 한 번 나와보세요!”

이번 전당 행렬에 호위로 차출된 상급단원 ‘마커스’였다. 노크도 없이 달려든 것은 분명 무례였지만, 마커스는 이상할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다.

“어서, 어서요!”

성화에 못이긴 레이첼과 페르민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길드의 앞뜰로 나왔다.
앞뜰에는 이미 많은 단원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레이첼을 보자마자 경례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윽고, 레이첼과 페르민도 마커스와 비슷한 얼굴이 되었다.

“이게······ 다 뭐예요?”

레이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웬 물자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왕실 길드가 장만하려 했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물품들이었다.
마커스가 흥분 가득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후원이 이만큼이나 왔습니다! 이거, 이거 보세요. 최상급 마공학 텐트예요! 중앙아시아 마력 폭풍도 일주일은 버틸 수 있게 설계됐답니다. 그게 24개나 세트로 왔어요.”

중앙아시아에는 ‘마력 폭풍’이라는 재해가 드물지 않다. 따라서 특수 제작된 텐트가 아니라면 그 폭풍을 버티지 못하고 불타 없어질 것이다.

“······후원자는 누구인가요.”

마공학 텐트는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었으나, 레이첼은 먼저 의심부터 했다. 그녀는 대가 없는 호의를 경계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카드 한장이 왔습니다.”

마커스가 카드를 내밀었다. 산적한 후원품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조그만 카드였다.
크리스마스처럼 꾸며진 배경에 길지 않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To Rachel.
From 큐브 동창.]

김하진이 혹시나 레이첼이 후원을 거부할까 염려되어 적어놓은 문구였다.
그럼에도 레이첼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큐브 동창이 워낙 많아야 말이지.

“엥? 부단장님, 글씨가 뒷장에도 있습니다?”

곁눈질로 카드를 훔쳐보던 페르민이 말했다. 레이첼도 곧장 카드를 뒤로 돌렸다.

[코트는 아직도 잘 쓰고 있습니다. 이건 과거에 제가 받았던, 그리고 지금도 받고 있는 신세의 답례라고 생각해주세요.]

“······아!”

그제서야 레이첼의 입가에 생각지도 못한 놀람이 번졌다. 페르민은 카드를 힐끔거리면서 물었다.

“지금도 받고 있는 신세······ 어찌, 부단장님이 아시는 분입니까?”

갑작스런 놀람은 어느덧 작은 미소가 되었다.
역시 성공하셨구나. 하기야, 머리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 어떻게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어?
레이첼이 웃음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군지는 알 것 같아요. 그런데, 신세는 오히려 제가 졌었는데······.”
“오. 그렇습니까? 역시 부단장님 인맥이었군요~ 아주 대단하십니다. 어디, 키다리 아저씨라도 사귀셨습니까?”
“아뇨. 키가 그렇게 큰 사람은 아니에요.”
“······아. 예.”

아무렴 랭커스터가 그 시절의 추억까지 흉내내지는 못할 것이었다.
레이첼은 카드를 소중히 갈무리하고 마커스에게 다가갔다. 마커스는 후원품들의 목록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디에서 보냈는지 주소는 없었나요?”
“네네. 없었습니다. 일단, 이거 받아도 되죠 부단장님?”

레이첼은 약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창이 내어준 선물을 거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먼저 고맙다는 말부터 전하고 싶긴 하지만, 주소를 남기지 않았다면 따로 이유가 있겠지.

“네. 믿어도 되는 사람이에요.”


─지금, 전당에 참여하는 길드들이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잿빛 하늘과 칼날같은 바람. 여전히 한겨울처럼 매몰찬 중국의 상공에서, 나는 행렬의 시작을 굽어보고 있었다. 재능 [명사수] 덕분에 먼 지상의 풍경이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듯 선명했다.

─우리 도시를 선택한 길드는 영국의 ‘왕실 길드’, 스위스의 ‘라이슬로이퍼(Reislaufer)’, 일본의 ‘여명’입니다.

중국의 특파원이 도착한 길드들을 촬영하면서 말했다.
도시에 모인 영웅의 숫자는 총 35명이었다. 일본 12명, 스위스 12명, 영국 11명. 행렬에 동원할 수 있는 최대 인원수는 12명이었으나, 데이크가 도중에 제외된 탓에 영국에만 한 명의 공백이 생겼다.

─출발합시다.

레이첼이 말에 올라타며 씩씩하게 말했다. 다른 단원들도 그녀를 따랐다. 근처에 있던 영국 방송국 BBC의 카메라가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날씨가 무지 춥네요.

페르민의 말이었다. 중국은 영국과 달리 바람이 얼음송곳같았다.

─영국과는 기후가 판이하니 조심하세요.

나는 으스스 몸을 떠는 영웅들을 지켜보다가, 다시 전방의 광활한 들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기까지 언제 가냐.”

이제 여기서 300km만 나아가면 문명이 사라지고, 열 세 갈래의 길이 나온다. 열 세 갈래의 길은 다시 각각 여덟 갈래로 나뉘고, 그 여덟 갈래의 길은 또 여섯 갈래로······
아무튼, 모든 경로와 지형이 험난하기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전당’이 열리는 과거 아프가니스탄의 영토까지는 적어도 열흘 이상이 걸릴 터.

─왕실의 성공과 조국의 번영을 위하여!

그럼에도 왕실 길드는 힘차게 파이팅을 외치며 길을 나섰다.
나도 헬리콥터의 운전석에 앉아 천천히 비행을 시작했다. 헬리콥터는 고요하게 움직였고, 아마 지상에서는 이 동체를 관측할 수 없을 것이었다.

——————
[EH-64 Elioch] [고급] [탈것]
─에센셜 다이나믹스에서도 손꼽히는 장인들이 제작한 헬리콥터. 헬기 고유의 기능을 극대화한 역작이다. 여러 마법 각인이 성공적으로 새겨졌다.
─각인 효과 목록.
1.「상급 사일런스」
2.「상급 보호색」
3.「상급 내구 강화」
4.「중상급 마력저항」
——————

나는 이 헬리콥터에 직접 마법 각인을 새겼고, [어린 드워프의 손재주]와 [성흔의 마력]을 합치면 밸런스 파괴에 가까운 시너지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손재주로는 엄두도 못냈던 「중상급 마력저항」을 부여하여 마력 폭풍도 뚫을 수 있으며, 「상급 사일런스」와 「상급 보호색」의 조합은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기가 막히다.
거기에 더해 [무작위 강화 체계]까지 적용되었으므로 웬만한 비행 괴수는 하늘에 헬기가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릴 수 없을 터.

나는 여유롭게 비행하며 왕실 길드의 행렬을 지켜보았다.


······행군을 시작하고 3시간이 지났다. 그 동안 길드는 도시를 지나 해체된 문명에 닿았다. 걸음 걸음마다 부서진 건물과 콘크리트의 잔해가 이정표처럼 박혀 있었다. 그것들은 풍화되고 침식되어 자연의 일부로 남았다.
길드는 문명의 끝이라 불리는 길목과 인류가 흔적으로 전락한 풍경을 지나, 광막한 들판의 초입에 섰다.

“저기부터가 시작이네요.”

페르민이 말했다. 레이첼은 고삐를 쥐었다. 앞서가던 두 말이 멈추자 대열도 함께 섰다.

“도대체 저게······ 몇 갈래야?”

마커스가 기가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득한 대지의 저편, 지평선이 열 세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마력 폭풍의 여파로 생성된 수많은 갈래는 전부 협곡처럼 가파르고 비좁았다. 어떤 길은 급격하게 위로 솟았고, 어떤 길은 까마득할 만큼 아래로 패였다.
도시인이 보기에는 비현실적일만큼 압도적인 경관이었다.

“어스, 어디가 괜찮은 것 같아?”

레이첼은 정령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땅의 정령은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했고, 다만 그들의 근처로 다가오는 또 다른 행렬의 존재를 알렸다.

“다른 길드가 오고 있네요.”

레이첼의 말에 모든 단원이 그쪽을 보았다. 폐허의 틈바구니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스위스의 명문 ‘라이슬로이퍼’였다.

왕실 단원들은 다소 부러워하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라이슬로이퍼의 행렬에는 ‘스위스의 황금세대’라 불리는 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각각 세히트, 바르가, 발스, 틸마, 마리츠······ 모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자들이었다.
그들의 리더인 세히트가 먼저 다가와서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유럽의 동료들이여.”

레이첼이 목례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레이첼도 세히트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당장 그녀보다 2년 먼저 큐브에 입학하고 10위라는 호성적으로 졸업한 선배였다.

“우리가 항상 꿈꾸며 자랐던 왕실 길드와, 명성이 드높은 레이첼 부단장을 만나 반갑습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잠시 동안이라도 동행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세히트의 자비로운 말에 왕실 단원들이 반색했다. 반면 라이슬로이퍼의 몇몇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으로 보아 이 동행이 누구에게 이득이 될지는 명백했다.
그러나 의외로 레이첼 쪽에서 거절을 전했다.

“너그러운 제안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저희는 그저 짐만 될 것입니다.”

레이첼은 자신이 랭커스터에게 습격당할 위험이 있음을 알았다. 따라서 자신과 아무 관련없는 그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세히트가 눈썹을 살짝 들썩였다.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 지리에 익숙한 용병과 길잡이를 고용하였으니, 함께 가면 편하실 겁니다.”
“아. 저, 저희도 길잡이를 고용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페르민이 손을 번쩍 들었다. 라이슬로이퍼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페르민은 쭈뼛거리면서 손을 내렸다.

“······아. 그러십니까? 공식적으로 고용하지 못하셨다고 들었는데. 왜, 그······ 사건 때문에요.”
“혀, 현지인이에요, 저희는. 저희는 현지인을 고용했습니다. 그 분도 이곳 지리에 엄청 익숙하죠.”
“아하. 역시, 계획이 있으셨군요.”

세히트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라이슬로이퍼의 단원들도 따라서 웃었다. 명백한 조소였다.
페르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명예와 행운이 그대들과 함께 하길.”

세히트는 세 번 권유하지 않고 갈림길로 나아갔다. 그들은 여섯 번째 길을 선택했고, 왕실 단원들은 원망스런 눈으로 페르민을 노려보았다.
특히 마커스는 흡사 불한당같은 몸짓으로 페르민에게 다가갔다.

“왜 그랬어.”
“뭐가.”
“왜 그랬냐고.”
“아니, 나 진짜로 현지인 고용했다니까?”
“어디서.”
“······말했잖아. 현지에서. 사전 섭외 했어.”
“진짜 현지인이야?”

마커스가 표독스레 캐물었다. 페르민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어, 어. 현지인인데, 한국 혼혈.”
“혼혈인데 중국에서 살고 있었어?”
“어, 어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일단, 기다려봐.”

페르민이 수정 구슬을 꺼냈다. 중앙아시아의 마력 폭풍은 전자기기의 작동을 차단하므로 이런 통신 아이템이 필수였다.

“예. 접니다 페르민. 예, 예예. 아, 예. 반갑습니다. 예예······.”

페르민이 구슬을 귀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커스를 비롯한 영국의 단원들은 그녀를 의심스레 노려보았다. 그러나 눈치 없는 페르민은 세상 환하게 웃더니, 세 번째 갈림길을 가리켰다.

“세 번째. 세 번째래. 부단장님, 저기로 가시죠.”

단원들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페르민의 믿음이 너무 강력했고, 어차피 길잡이가 없는 이상 어딜 선택하든 운의 영역일 테니, 하는 수 없이 세 번째 길로 전진했다.

“자, 전진~”

세 번째는 비좁은 협곡으로, 지독한 오르막길이었다. 준마도 힘겨워하는 그곳을 한 시간 정도 걷자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여덟 갈래였다. 앞서가던 페르민이 잠깐 멈춰서서 수정구슬을 귀에 대었다.

“네. 여덟 갈래길이요. 네, 네. 아, 네······ 자, 다들 따라오세요. 이쪽이시랍니다.”
“아오, 씨. 야, 거 현지인은 어디서 어떻게 보고 길을 찾는 거야? 지금 어딨대?”
“시끄럽고 따라오기나 해. 그리 불만이면 니가 직접 길 찾던가.”
“아니 불만이 아니라······ 어휴.”

마커스를 비롯한 다른 팀원들은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레이첼이 묵묵히 페르민을 따랐기에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도 페르민은 “여기랍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오오. 얼마 안 남았대. 조금만 걸으면 된대.”, 따위의 근거 없는 말로 길드를 이끌었다.

그렇게 밤이 저물고, 말들도 완전히 지친 무렵.
어느 정도 평평한 대지가 나왔다.
마커스가 말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야 페르민. 더 가면 얘네 죽겠다. 얼른 자리 잡고 쉬자. 야영지는 어디래?”
“기달려. 마, 내가 말 했지? 이 현지인이 길 엄청 잘 안다고.”
“아직 12시간도 안 지났거든? 전당 끝날때까지 잘 찾으면 인정한다.”

말은 그렇게 해도 단원들은 어느 정도 길잡이를 신뢰하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까지 오면서 단 한 번도 괴수와 마주치지 않았으니.
페르민은 통신구슬로 잠깐 대화를 나누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꽤 깊은 동굴 나온대. 괜히 맨땅에 텐트 설치하면 눈에 띄니까, 거따 텐트 치자.”
“······동굴?”
“어어. 동굴이 있대. 가자 가자. 자자, 갑시다 부단장님~”

아무리 지리에 빠삭하더라도 설마 동굴의 위치까지 알고 있을까?
단원들은 반신반의하며 걸었으나,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이 나타났다.

“와 뭐야. 진짜네?”
“오오······.”

그 순간 단원들의 의심은 거의 없어졌으나, 레이첼의 의심은 어느 정도 확신이 되었다.

“말 했잖아 챠샤~ 이분 대박이라고. 얼른 들어가기나 해.”

페르민이 뿌듯하게 웃으며 단원들을 동굴 안으로 밀었다. 그들은 오늘 고생한 말과 함께 아늑한 굴로 들어갔다.

“아, 부단장님도 들어가시지요?”

그러나 레이첼은 페르민을 따라가지 않았다. 페르민이 동굴을 가리키며 갸웃거리자, 레이첼이 눈을 가늘게 좁히고 손을 내밀었다.

“그거, 줘보세요.”
“네? 뭐를요?”
“그거요, 수정구슬.”
“······.”

페르민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침이 울대를 넘어가지 못하고 꿀렁였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막상 닥치니 조금 무서웠다. 무엇보다 시기가 너무 일렀다. 적어도 사흘 정도는 지나야 내놓으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에, 에이~ 그래도 이건 제 책임인데요. 제가 지니고 있겠습니다.”
“주세요.”
“어, 그게······ 안 됩니다. 이게 계약된 부분이라서, 저만 통화할 수 있어요.”
“주세요.”
“······아니 왜냐면, 왜냐면요, 왜 계약이 이렇게 됐냐면요, 여기 이 혼혈 길잡이가 저를 좋아하거든요. 첫눈에 반했대요. 그래서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은 대화를 하려 하지도-”
“데이크가 시켰겠죠. 다 알아요.”
“······.”

스승이나 다름 없는 데이크의 이름이 나오자 페르민도 어쩔 수 없었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혼나지는 않겠지, 싶은 마음도 있었다.
페르민은 안절부절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 그게······ 하아······.”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고민한 뒤, Xtra와 연결된 수정을 내주었다.

< 몽중화 (8) > 끝

< 몽중화 (9) >

레이첼이 수정구슬을 쥐었다. 구슬은 여전히 푸르게 반짝였고, 페르민은 병걸린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레이첼은 페르민을 힐끔거리며 구슬에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당신, 맞죠.”

그녀는 이 구슬 너머의 사람이 ‘Xtra’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

그러나 깔끔하게 인정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이해할 수 없는 대응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각오하고 임무에 나선 것이겠지.

“당당하시군요. 분명히 제가 저번에-”
─알아. 아니까, 괜히 융통성 없는 거 티내지 말고 가만히 있어.

갑작스런 공세였다. 잠시 멍하니 있던 레이첼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돋아났다.
그녀는 태연한 척 받아쳤다.

“융통성이······ 처음 듣는 말이네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정말로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런데 막상 들으니 조금 화가 났다. 내가 융통성이 없다니? 자기가 나를 언제 봤다고.

─풋. 그래.

의도적인 조소가 다시 한 번 신경을 건드렸다. 레이첼은 바싹 마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무튼, 이건 데이크가 바란 일이다. 수가를 두 배로 부담하면서까지 부탁했어.
“······.”

데이크는 왕실 길드에게 파면당했다. 그말인 즉, 용병 고용에 필요한 금액을 지원받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크는 Xtra를 놓지 않았다. 레이첼은 데이크의 그런 믿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 용병의 어디가 그렇게 믿음직스러웠던 것일까.

─지금 보면 아주 좋은 선택이었지. 나 없었으면 너네 전부 여태 헛돌고 있었을 테니까.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다. 고작 12시간 밖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Xtra는 길잡이로서 확실한 기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또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Xtra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아 근데, 왜 굳이 굴러들어온 행운까지 거절한 거야? 라우슬로이퍼 만났잖아. 같이 갔으면 편했을 텐데. 자존심이었나?

전당 행렬은 자신에게 한정된 사안이 아니었다. ‘전당’은 영국과 길드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고, ‘행렬’에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단원의 생명이 걸려 있었다. 개인적이거나 도의적인 이유로 그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리고 단원들에게는 길잡이가 필요했다.
이른바 ‘융통성’을 발휘해야하는 순간이었다.

“······알겠습니다.”

레이첼은 다시 한 번 자기자신과 타협을 했다.

“그럼 앞으로도 길잡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신, 통신과 통제는 제가 하겠어요. 그때처럼 제멋대로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그렇게나 내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마음대로.
“아니······. 하아.”

레이첼이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욕설 비스무리한 것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만큼 Xtra라는 미지의 용병은 하는 말도, 어조와 음색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쉬세요.”

레이첼은 그것으로 통신을 끝내고 가죽 갑옷의 주머니에 구슬을 넣었다. 뒤로 돌아서자 페르민과 눈이 마주쳤다. 페르민이 움찔 떨었다.
레이첼은 평소처럼 말했다.

“들어갑시다.”
“예? 어, 어디로요?”
“쉬러요.”
“······아, 예. 예예. 들어, 들어가시죠 부단장님.”

두 사람은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내부는 어느덧 아늑한 캠핑장으로 변해 있었다. 열 하나의 텐트가 적당한 간격으로 늘어섰고, 동굴의 끝에는 마굿간도 설치되었다.
단원들은 모닥불을 중앙에 두고 둘러앉아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야, 야야. 너네, 너네 뭐야. 웬 모닥불이냐~?”

페르민이 레이첼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쪽으로 도망치듯 합류했다.

“버너, 버너랑 난로 안 가지고 왔어?”
“있는데 분위기 좀 내려고 피웠다. 아 부단장님, 여기 와서 앉으십쇼. 따뜻합니다.”

레이첼도 다가와 앉았다. 그녀의 자리는 특별히 의자였다. 땅바닥에 앉은 마커스와 단원들은 홀로 삐죽 올라온 부단장을 보며 웃었다.

훈훈한 열기와 적당한 노곤함 속에서 그들은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주제는 많고 다양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관심도가 높은 토픽은 역시, 언론에도 특필되었던 ‘어마어마한 후원자’의 정체였다.

“······아니 그래서 내가 다른 길드 애들한테도 물어봤는데, 우리보다 더 좋은 아이템 가진 애들이 별로 없더라고.”
“응응 그니까. 저 텐트 엄청 비싼거던데. 가격표 보고 깜짝 놀랐어.”
“저거 임대도 아니라매. 나중에 던전같은거 공략할때 써도 된다는데?”

텐트, 버너, 나침반, 난로, 말안장 등등— 후원받은 물품들은 당장 행렬이 끝난 뒤에도 길드 살림에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안색이 불콰해진 마커스가 레이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저, 부단장님.”

레이첼은 가만히 앉아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런 대화에는 그렇게 눈치가 빠르지 않은 편이었다.
마커스가 히죽 웃더니 옆에 늘어선 텐트들을 가리켰다.

“저 텐트, 안에 보셨습니까 부단장님?”
“네. 마음에 안 드시나요?”

레이첼이 텐트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넓지는 않았으나, 침대 하나가 자연스럽게 설치되어 있었다. 침대가 딸린 마공학 텐트.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호사였다.

“아뇨아뇨. 마음에 당연히 듭니다. 안 들면 제가 돌은거죠. 그냥, 저것들 진짜 누가 후원해준 거랍니까?”

그렇게 물으며 마커스는 능글맞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혈색이 붉은 것을 보니 몰래 술이라도 마신 모양이었다.

“그-”
“큐브 동창이시래.”

레이첼이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페르민이 가로챘다.

“오, 큐브 동창이요? 그럼 저랑 만났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건-”
“그렇겠냐? 우리 졸업하느라 피똥쌀때인데. 아, 생각해보면 우리 진짜 겨우겨우 졸업했네.”
“······.”

사실 이곳에서 레이첼보다 나이가 적은 단원은 없었다. 그러나 큐브에 입학하고 졸업한 자는 페르민과 마커스 뿐, 나머지는 전부 브리튼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그렇긴 한데, 나는 가끔씩 부단장님 보고 그랬는데? 소문도 많이 들렸잖아. 아, 맞다. 그때 어떤 총잡이였나? 그 꽤 특이했던 1학년이 부단장님 좋아한다고 소문 엄청 퍼졌었는데. 기억하십니까 부단장님?”

나불대던 마커스가 뜬금없이 정곡을 찔렀다. 레이첼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예? 아, 그 사람-”
“에이. 그 총잡이는 나도 아는데, 걔 절대 부자 아니야. 큐브도 자퇴했어.”
“······.”

페르민의 집중마크 탓에 단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다. 레이첼은 다소 뾰루퉁한 눈으로 페르민을 흘겨보았으나, 페르민은 눈치가 없었다.

“자퇴? 넌 어떻게 거까지 아냐?”
“감히 우리 부단장님을 흠모하는 짜식이 있다길래 주시하고 있었지. 근데 무쟈게 별로드라.”

페르민의 수다를 귓등으로 넘기며, 그녀는 김하진을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역시 ‘비상한 두뇌’였으나, 그 외의 기억도 많았다.
시험장에 침입한 랭커스터의 하수인을 격퇴했던 것. 기말고사때 함께 식량을 나누어 먹었던 것. 클랜시 아일렛에서 우연히 만나 뜻밖의 동행을 했던 것······
회상 속에서 작은 미소가 흘렀다.

“앗, 남자군요!”

그녀의 묘한 웃음을 보고 페르민이 크게 외쳤다. 그 순간, 레이첼은 경련할 정도로 당황했다.

“뭐, 뭐슨!”
“아 맞네 맞아~”
“하기야, 저도 갑부였으면 후원했을 겁니다. 우리 부단장님이야 뭐, 몹시 아름다우시니까.”
“조용, 조용히. 그런 거 아니에요.”

레이첼이 팔을 휘적이며 그들의 입을 막으려 했다.

“······너 근데 저 텐트가 얼만지는 알고 그런 말 하는 거냐? 호감 하나 사려고 수백억을 태워?”
“에이, 우리 부단장님은 그럴 만하시지~ 것보다, 어떻게, 어떤 분이세요? 아 동창이니 영웅이겠구나.”
“아니, 아니라고. 아니라니까요.”

단원들은 레이첼을 아예 무시한 채 서로 추측을 이어나갔다.

“근데 동창 중에서 그 정도로 돈많은······ 헉. 설마 적막한 달의 신종학?!”
“설마!”
“와, 맞는 것 같은데? 대박. 신종학한테 300억 개껌이잖어.”
“아 맞네, 맞아 신종학-”
“조용, 조용! 아니라고요!”

레이첼이 크게 소리쳤다. 그녀는 엄하게 기강을 다잡으려 하였으나, 그러기에는 이미 얼굴 상태가 너무 시뻘겠다. 빵빵한 두 볼을 꾹누르면 케첩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아니면요?”
“그게, 그런 게 아니라······.”

레이첼이 거의 울먹이려던 때였다.

“자자, 식사 나왔습니다~ 그렇게 놀리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이거나 드세요들~ ”

마침 음식이 준비되었다. 기초 대사량이 높은 영웅들 답게 고기의 크기와 양이 어마어마했다. 굶주렸던 단원들은 무엇인가에 홀린 듯 일어나서 음식을 배급받았다.

“······저는 들어가서 먹을게요.”

레이첼은 음식을 가지고 텐트 안으로 도주했다. 당황하거나 삐진 것은 아니었고, 다만 ‘식사 자리에 높은 사람이 있어서 좋을 것은 없다—’라고 인터넷에서 배웠기 때문이었다.

지이이익—!

그녀는 텐트 천막을 꽁꽁 싸매고 혼자서 고기를 뜯었다.


······속······ 기억과······ 트라우마······
형성된······ 그곳에서······ 아직까지······
그러······ 저희도······ 지켜보는······

끊길 듯 이어지는 기이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처음에는 텐트 바깥에서 단원들이 떠들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소리들은 몽롱하고 아득하게 떠올랐다. 그 속으로 자신이 천천히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 어떻게······ 정······
속에······ 탑의······ 상황이-

그런데 어느 순간 소리들이 뒤섞이며 사라졌다. 동시에 두통이 치밀었다. 송곳으로 관자놀이를 콱 찌르는 듯한 통증이었다.

“읏.”

레이첼은 급히 일어나 앉아 머리를 움켜쥐었다. 고통이 가실때까지 호흡을 고르다가 시계를 보았다.
새벽 두시 삼십분. 아직 출발까지는 두 시간이나 남았다.

그녀는 바람이라도 쐴 겸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땅바닥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세상이 딱 두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절반은 온통 하늘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온통 땅이었다. 인위(人爲)가 끼어들지 못한 자연의 풍광이 낯설면서도 신비로웠다.

“······휴우.”

텅 빈 그곳에서 레이첼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차가운 입김이 새하얗게 번졌다. 문득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유성우가 내리고 있었다. 남색 창공에 여러 줄기의 궤적이 선명했다. 썩 아름다운 풍경이었으나,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철컥······ 철컥······ 철컥······ 알 수 없는 잡음 사이사이로 단발마같은 비명도 희미하게 울렸다.

“!”

레이첼은 금세 상황을 이해하고 수정구슬을 꺼냈다.

“이 소리, 당신입니까?”
─어? 아, 어. 괴수들 좀 처리하고 있다. 유독 너한테 적이 많이 오네.

그러자 레이첼이 벌떡 일어났다.

“불침번은 이제부터 제가 하겠습니다. 당신은 자 두세요.”
─······역시 융통성이 없네.
“아니, 예? 융통, 무슨, 뭐가······.”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었다. 아직도 융통성같은 타령을 하고 있네. 레이첼은 화를 내려다 가까스로 참았다. 그런데 Xtra가 먼저 추가타를 날렸다.

─능력이 없으면 열정도 민폐야. 넌 잠이나 자둬.
“뭐, 뭐라고요?”

순간 평정심을 잃었다.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당신 도와주겠다고 내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기서는 내가 너보다 훨씬 전문가거든. 나한테는 이 일대가 다 보여. 네가 뭘 하고 있는지,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다 보인다고. 지금은 오리주둥이가 됐네.
“······.”

레이첼이 슬그머니 입술을 집어넣었다.

─그러니까, 맡겨 두라고. 나대지 말고. 어차피 상황도 끝났으니까.

그래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직접 불침번을 설 것이었다면 용병을 고용한 이유가 없으니. 말만 조금 친절하게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레이첼이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저, 당신에 대해서 검색을 조금 했어요. 아니, 수사를 했죠.”
─그래?
“평범한 용병은 아닌 것 같더군요.”
─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Xtra는 기가 막힐만큼 태연했다.

“이건 그렇게 자약한 척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지금 의회가 벼르고 있습니다. 전당이 끝나면, 영웅 협회가 당신을 쫓을 거예요.”
─쫓으라 해. 어차피 핀리는 악인이었어. 내가 안 죽였더라도, 마력 폭탄으로 자살 테러라도 했겠지.
“악인도 인간이에요. 사람이 악하다고 전부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

대답은 잠시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상관 없어. 나는 영웅이 아니니까.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하는 거지.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수단이나 방법 따위는 생각 안해.

레이첼의 표정이 굳었다. 여태 그녀가 Xtra에게 느꼈던 위화감과 적대감이 날이 선 듯 확실해졌다.
공존할 수 없는 괴리, 근원적인 가치관의 차이였다.
레이첼은 영웅으로서 신념과 인의를 지키며 나아가고 싶었다. 그것은 자신이 ‘왕가의 핏줄’이라는 태생적인 선민의식이 아니었다. 다만 목적만을 중요시하였던 단 한 번의 선택이 수없이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고, 랭커스터라는 최악의 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 임무는 왜 수락하셨나요.”

그러나, 그렇다 하여도 서로의 목적은 결국 같았다. Xtra는 자신을 돕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고, 이미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이상 의견 충돌은 줄이는 것이 옳았다.

“당신에게 7억은 그렇게 큰 금액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아니, 어차피 자신의 이상(理想)은 세상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Xtra의 말대로 능력이 없는 열정은 민폐에 불과하다. 자신이 사자인 줄 아는 들개의 공허한 포효일 뿐이다.

─글쎄.

바람이 불었다. 익숙해졌나 싶었던 찬공기가 다시 피부를 저몄다. 레이첼은 자기 팔을 쓰다듬었다.

─내가 네 팬이라서 그런가.

Xtra는 나름 힌트를 주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그것을 힌트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애당초 ‘고맙고 친절한 은인 김하진’과 ‘꿀밤 때리고 싶은 용병 Xtra’를 연결짓는 것은 그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뭐가요.”
─팬카페도 가입했어. 회원수 많던데.
“······흥.”

레이첼은 그저 코웃음만 흘리고 침묵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설득력이 있는 말이구나, 싶었다.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이토록 유능한 용병이 왜 고작 7억으로 자신을 경호하겠다고 했단 말인가. 당연히 이성보다는 감성이······.
쒜에에엑—
어디선가 나무 막대기가 날아와 어깨를 스쳤다.
“응?”

레이첼은 하늘을 보았다. 어디서 날아온 거지? 이리저리 갸웃거리면서 보는데 다시 막대기가 날아왔다.

“뭐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첼이 주변을 살폈다. 곧장 막대기가 날아들어 어깨를 때렸다.

“아.”

뭔가 깨달은 레이첼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저 지평선 어딘가, 혹은 능선의 어딘가에 숨어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노려보았다.

“······당신입니까?”
─그럼 나 말고 누가 있냐

레이첼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나무 막대기 왜 날려요.”
─심심해서. 한 번 피해보라고.
“그쪽이랑 놀아줄 시간 없어요.”
─지금 놀고 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또 다시 막대기를 투척했다. 레이첼은 감각만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오~
“이제 그만하세요”
─그믄흐스으······
“······.”

레이첼의 눈꼬리가 파르르 흔들렸다. 그녀는 움켜쥔 막대기를 악력만으로 으스러트렸다.

“참 유치하군요.”
─됐고, 더 빠르게 간다.
“빠르다고해서- 끄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날아온 막대기가 명치를 두드렸다. 레이첼은 화들짝 놀랐다. 상상 이상의 통증이었고, 상상 이상의 속도였다. 더불어, 어디서 쏘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또 간다.

신호가 들리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감각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막대기는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쒜엑-!
막대기가 허벅지를 때렸다.

“윽!”

꽤나 아팠다.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가슴 언저리에 있던 불덩이가 어느새 턱끝까지 닿았다.
레이첼은 이를 아득 깨물더니 자세를 바로잡았다.

─오, 계속 하려고?
“······기어오르지 마세요.”

위협적으로 뇌까리며 갈라틴을 뽑아들었다.
이 정도면 저쪽이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나도 그만큼 갚아줘도 되겠지.

—그럼 더 쏜다?
“네, 좋아요. 계속 해보세요.”
─흠······. 아니지. 그냥 하면 재미 없는데. 내기나 하자.
“······내기.”

레이첼은 대답하면서도 온 신경을 막대기에 집중했다. 언제 날아와도 쳐낼 수 있게끔.

─그래. 오늘부터 전당에 도착할 때 까지, 내가 쏘는 막대기를 한 번이라도 쳐내거나 잡으면 네가 이기는 거야. 성공하면 소원 하나 들어줄게. 용병비 전액 환불도 가능. 이거 네 정령 훈련에도 도움 될 걸? 일석이조라는 거지.

레이첼은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오만할 수 있을까. 내가 누구인지 아예 잊어버린 것일까. 그래도 ‘영국의 레이첼’하면 전 세계가 아는 영웅일 텐데.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소원이 고작 내 얼굴 보는 거야?
“쏘기나 하세요.”

레이첼은 투척의 궤적과 방향을 통해 사수의 위치를 읽은 뒤 내달릴 심산이었다. 그리고 이토록 잘난척하는 낯짝을 직접 마주할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꿀밤도 여러 방 먹이고 싶었다.
“······후.”

그녀는 진지하게 초식을 전개했다. 사각이나 빈틈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왕실의 검무였다.

“혹시라도 원망하지마세요. 이건 당신이 야기한 사태-”

툭—
생각지도 못한 사이, 미간 바로 위에 나무 막대기가 꽂혔다.

“······?”

레이첼은 조금 뒤늦게 반응했다. 잠깐 멍청하게 서있다가, 천천히 왼손을 들어 이마를 매만졌다.
혹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방금 뭐였지, 중얼거리는데 또 다시 막대기가 쇄도했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한 열 개 쯤 되었다.

“아 잠깐, 잠······!”

예상치 못한 세례에 레이첼은 거의 반사적으로 타임을 외쳤다.

< 몽중화 (9) > 끝

< 몽중화 (10) >

나는 활시위에 나무 막대기를 끼웠다. 팽팽하게 늘려진 시위에서 금속의 소리가 났다. 바로 다음 순간, 레이첼의 비명이 울렸다. 시위에서 뻗어나간 막대기가 공간 자체를 꿰뚫은 것만 같았다.

“······진짜 장난 아닌데 이거.”

나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검은 연꽃의 활]은 그렇게나 완벽한 장비였다.

——————
[검은 연꽃의 활] [전설] [귀(鬼)속성]
─드워프가 제작하고 합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활. 활대에 검은색 연꽃 문양이 각인되어 있다.
─연꽃
시위를 떠난 화살은 명중한다. (단, 보이는 적에 한정)
─검은 해와 달
착용자의 시력이 강화되고,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다.
─영멸(靈滅)
사자(死者)를 멸하는 힘.
——————

드워프라는 이름 석자 만으로도 기함할 지경인데, 그 밑에 딸린 옵션은 차마 말도 나오지 않는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명중한다.’

내가 관측할 수 있는 거리라면 어디서 어떻게 쏘든 필중(必中)한다는 뜻이었다. 문장 자체는 단순하지만 이능(異能)에 가까운 성능이었고, 지금 내가 레이첼을 농락할 수 있는 이유였다.

“한 번 더.”

나는 막대기를 쏘았다. 레이첼은 피하지 못하고 새끼발가락을 얻어맞았다. 일방적인 공세였으나 내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방금 레이첼이 했던 말이 뇌리에서 되풀이되었다.

─악인도 인간이에요. 사람이 악하다고 전부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백번 천번 옳은 말이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을 소설 따위로 여기고 있다. 그저 떠날 수 없어 머무르는 이방인에 불과하다고, 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 번 더.”

불편한 마음을 안은 채, 나는 레이첼을 위해(?) 레이첼을 괴롭혔다. 간언(諫言)을 미워했던 왕들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가 아니라, 그간 레이첼을 지켜보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마음이 컸다.
지금 레이첼은 너무 억눌려 있었다. 자신의 과오와 신념의 중압감, 그리고 본인이 설정한 한계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설정 속의 레이첼은 이렇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다시 레이첼이 될 수 있도록, 그녀가 자신의 뜻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에반젤’이라는 신세를 갚아야만 했다.

“계속 간다.”

그것을 위한 방법으로 나는 분노를 채택했다.
왜, 극적인 대오각성에 있어서 분노와 슬픔은 단골 클리셰가 아니던가?

─으······ 으으, 으으으!

연거푸 얻어맞던 레이첼이 마침내 이성을 잃었다. 그녀는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러나 자포자기는 아니었다. 상하좌우를 휘돌던 검이 날카로운 막을 형성했다.
검막(劍幕)이었다.

나는 막대기를 쏘았다. 연꽃으로 인한 ‘명중’은 검막을 가볍게 뚫고 레이첼을 후려쳤다.

─끄!

이마를 세게 얻어맞은 레이첼이 한 발자국 밀려났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 아파······.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먼지처럼 바스라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활을 내려놓았다.

“······정령은 끝까지 안 쓸 건가?”

지금 레이첼은 정령의 사용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녀의 재능은 검과 함께할 때 비로소 빛날 터인데, 활용하기는 커녕 오히려 본인이 억누르는 실정이었다.

“스승이 하지 말라 그랬나?”
─······.
레이첼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한 건지 아둔한 건지, 뭐가 되었든 답답했다.

“그런 스승 뭐하러 섬기나?”
─······스승님을 모욕하지 마세요.

레이첼이 나름 표독스레 쏘아붙였다. 그러나 원체 날카로운 얼굴이 되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한없이 어색했다. 그저 고양이가 캬아아-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귀여웠다.

“그래. 그럼 계속 그렇게 맨땅에 해딩이나 해봐. 잡을 수 있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나는 다시 활을 들었다.
스승의 험담이 그리도 노여웠던 것일까.
레이첼은 전의로 불타올랐고, 새벽 5시가 될때까지 나무 막대기를 얻어 맞았다.


이른 아침부터 행렬이 재개되었다. 어젯밤의 휴식 덕분인지 단원들의 안색은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여유롭게 하품도 하고 잡담도 나누면서 이동했다.

“오! 넓다!”

그렇게 가다 보니 마음껏 달릴 수 있는 초원이 나왔다. 넓게 뻗은 지평선을 내다보는 단원들의 눈이 반짝였다.

“이곳, 괜찮을까요.”

레이첼이 Xtra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원들이 고삐를 꽉 쥐었다. 바람의 정령 윈디가 질주에 알맞은 기류를 형성해주었다.

“히야~ 스트레스가 다 풀리네~”
“방금 시속 200km는 넘었을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바로 오르막길.”

한 시간 정도 달리자 들판이 서서히 높아지며 비좁아졌다. 아쉬웠지만, 그들은 활기찬 웃음으로 다시 나타난 오르막길을 맞이했다.

“어? 부단장님. 여기 상처가 나셨습니다?”

다그닥 다그닥- 천천히 길을 오르던 페르민이 문득, 레이첼의 미간에 난 작은 멍을 발견했다. 다른 단원도 그녀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모기가 물었나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레이첼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앞머리를 내려서 덮었다.

“예? 설마요. 모기같지는 않은데요.”
“괜찮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괜찮다고요.”
“옙.”

가시 돋친 대꾸에 곧장 입을 다물었다.

지금 레이첼은 신경이 썩 예민한 상태였다.
하기야, 새벽녘의 굴욕은 그녀의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일대사건이었다. 그만큼 속수무책으로 패배했고, 능욕에 가까운 놀림을 받았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어젯밤을 만회하고 싶다는 의지가 맹렬했다.
물론 Xtra의 기량은 제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으나, 넘을 수 없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 저기 갈림길입니다. 부단장님?”

페르민이 갈림길을 가리키자마자 Xtra가 말했다.

─우측으로.
“우측으로.”

레이첼은 그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단원들도 거의 당연하다는 듯이 따랐다. 지켜보던 Xtra가 히죽 웃었다.

─너, 앵무새같다.
“······.”

레이첼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주변의 풍경을 구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갈래 길이 나타났다.

─제일 좌측의 길.
“왼쪽에서부터 첫 번째 길이에요.”

좌측으로 20분 정도 걸으니 이번에는 네 갈래 길이 나타났다.

─전진.
“중앙, 그대로 쭉 가요.”

아까부터 레이첼은 그의 말을 살짝씩 바꾸어서 말했다. 아주 대단한 자존심에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레이첼도 따라서 비웃어주었다.

“흥, 뭘 웃나요?”
─그냥. 귀여워서.
“이 씨-!”

저도 모르게 된소리가 나왔다. 순간적으로 열이 확 뻗쳤다. 레이첼은 수정구슬을 콰득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왜 저러시지?”
“몰라.”

그런 레이첼을 보면서 단원들은 의아하다는 듯 갸웃거렸다. 그러나 페르민은 그들보다 조금 더 심각했다.

사실, 페르민이 어젯밤부터 줄곧 고민하던 사안이 있었다. 이토록 유능한 Xtra가 왜 굳이 디스카운트를 해주면서까지 왕실의 임무를 맡아주었는가— 에 대한 고뇌였다.
아직까지는 의혹이었으나 그 낌세가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고, 확실해지면 단원들은 물론 레이첼과도 의논할 생각이었다.

“······너무 잘나도 탈이구나, 우리 부단장님은.”

페르민은 작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행렬이 시작되고 나흘이 지났다. 그 동안 왕실길드는 별다른 소모나 교전 없이 중앙아시아의 깊숙한 곳까지 도달했다.
물론 본격적인 여정은 지금부터였으나, 단원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길잡이의 역량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하아······.”

왕실 길드의 루틴은 단순했다. 해가 뜬 새벽부터 저녁까지는 행군을 했고, 밤에는 마땅한 야영지를 찾아 텐트를 폈다.
그러나 레이첼에게만은 꽤 유별난 스케쥴이 하나 더 생겨났다.

“아직······”

이른바 막대 잡기 내기.
얼핏 들으면 아기들이나 하는 놀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지금 레이첼은 온몸이 땀으로 젖은 채 쓰러져 있었다.

─아직은 무슨.

나흘, 나흘 동안 모든 수를 동원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통하지 않았다.

─정령 없이는 안 돼.

굴복한 그녀의 정수리에 Xtra가 던진 막대기가 내려앉았다. 뿐만 아니라 모래, 흙, 돌멩이, 낙엽······ 온갖 이상한 것들이 날아와서 머리에 쌓였다.

레이첼은 땅바닥을 끌어쥐었다. 손톱이 흙을 파고들었다. 정말 정령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일까. 절박하게 따져보았으나 신여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은 제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었다······.

─참 불쌍하구나, 너도.
“······하.”

같잖은 동정이 분노를 점화했다. 머릿 속의 무엇인가가 뚝- 끊어진 느낌이었다.
레이첼은 비척비척 일어나 눈을 감았다. 불길처럼 치솟은 화가 이성을 태웠다. 오직 그녀의 본능이 정령을 불렀다. 정령은 갈라틴에 휘감기며 달라붙었다.

─바람이구나.

레이첼이 정령의 검을 들었다. 모든 신경을 정령에, 그리고 검에 집중했다.
검을 사선으로 내젓자 돌풍이 일어났다.
레이첼은 검을 내뻗은 채 눈을 감았다. 어차피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라면, 시각 따위 방해일 뿐이다. 그저 고요히 서서 상대의 공격을 기다리자······.

딱─

기다리고 있는데 미간에 얻어맞았다.

“······뭐지.”

방금 뭐가 지나갔나?
레이첼은 멍하니 서서 자기 손에 쥐어진 검을 내려다보았다. 정령은 여전히 그 속에서 공명하고 있었다.
······스승이 내린 금기를 어겼음에도 결과가 고작 이거라고?
설마, 에이 설마 그럴리가. 내가 뭔가 착각을 했겠지······.
현실을 부정하던 레이첼은 이내 진심으로 울고 싶어졌다. 전부 내팽개치고 주저앉아 떼라도 쓰고 싶었다. 제발 한 번 만 봐달라고. 조금만 속도를 늦춰달라고.

─상심하지마.

히끅-!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딸국질을 했다. 그러나 Xtra는 웃지도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별안간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한 번에 될 리가 없어. 오랫동안 쓰지 않았으니, 차근차근 깨워나가야 해. 정령은 원래 그런 힘이야.
“······?”

문득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Xtra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한 번에 될 리가 없어. 오랫동안 쓰지 않았으니, 차근차근 깨워나가야 해. 정령은 원래 그런 힘이야······ 자기는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어조였다.
물론 그저 허세겠지, 싶었으나 괜히 의심이 되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으붸!”

말하는 레이첼의 입으로 모래바람이 달려들었다.

─다시 시작한다. 네 검에 깃든 바람, 절대 놓치지 말고.

모래를 뱉어대는 와중에 다시 막대기가 날아들어 내기가 재개되었다.
그녀는 정령과 조화한 검술을 전개했다. 검을 휘두를때마다 신여화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지금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이상하게 속이 후련했다.


“······살벌하네요.”

다음날, 행군을 재개한 길드는 악명 높은 중앙아시아의 본모습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진하다 보니 어느 순간 세상의 풍경이 바뀌었다. 푸르던 하늘이 적색을 머금었고, 대지는 거무죽죽해졌다. 숨을 쉴때마다 불씨를 집어삼킨 듯 입 안이 뜨거웠다.
단원들은 마스크와 후드 망토를 착용했다. 이 또한 정체불명의 후원자가 내어준 최고급 장비들이었다.

“부단장님, 이거······ 좀 불안하지 않습니까?”

마커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레이첼도 비슷한 불길함에 얼굴을 굳힌 찰나, 확인사살같은 통신이 왔다.

─지금부터는 조금 빨리 가야 할 것 같다. 계속 직진해.
“······알겠습니다.”

휘이이이잉—!
설상가상으로 바람까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노면을 파헤쳐올리는 마력 폭풍이었다.
대열의 최전방에 있던 레이첼이 마공학 로프를 꺼내 뒤로 돌렸다.

“다들, 잠시 멈추고 로프를 허리에 묶으세요!”
“예!”
“묶으면서 점호하겠습니다!”

레이첼을 시작으로 페르민, 마커스, 캐런, 데일······ 낙오가 없음을 확인한 뒤 대열은 일렬로 나아갔다.
이윽고 폭풍이 시야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흙먼지로 뒤덮인 세상에서 레이첼은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Xtra는 계속 통신을 하면서 방향을 교정해주었으나, 역시 무리였던 것일까.
처음으로 막다른 벽에 닿았다.

“길이······.”
─조금 물러나 있어. 뚫어줄 테니까.

레이첼이 뭔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무엇인가가 날아들었다. 석벽에 작은 탄이 박히더니 폭발했다. 신기하게도 안으로만 무한정 퍼지는 작약(炸藥)이었다.
그렇게 벽이 뚫리면서 기다란 원통형의 통로가 생겨났다. 대단한 화력이었지만 놀랄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뒤에 따라붙고 있는 자들이 있다. 하늘에는 바이퍼(Viper)도 있고.

키에에에에—!
보이지 않는 상공에서 괴수의 포효가 울려퍼졌다. 바이퍼는 중상급 1품에 속하는 비행독사로, 웬만하면 회피가 상책인 녀석이었다.

─내가 엄호할 테니 직선으로 달려. 지금!
“다들, 달리세요!”

레이첼이 급히 외쳤다. 동시에 기마의 행렬이 통로 안으로 내달렸다. 세차게 딛는 말발굽 뒤편으로 불온한 마력이 일렁였다.

그리고 어디선가, 포격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 몽중화 (10) > 끝

< 몽중화 (11) >

단원을 태운 기마들이 필사적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달음박질의 속도는 한계까지 치솟았고, 인위적으로 형성된 터널 안에 말발굽 소리가 가득 들어찼다.
기마대의 질주는 벼락처럼 전개되었다.

콰아아아아—!

돌연 발생한 굉음이 통로를 뒤흔들었다.
레이첼은 뒤를 돌아보았다. 검붉은 마력이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대열의 끄트머리를 집어삼킬 듯 맹렬한 서슬이었다.

“부단장님!”

마력은 아래로 스며들고 위로 뻗어 지면과 천장을 녹였다. 대지가 물감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열풍에 피부가 붉게 그을렸다.

“후미가 위험합니다!”

마커스가 절박하게 외쳤다.

“허리 숙이세요!”

레이첼이 갈라틴을 뽑아 휘둘렀다. 검격에 깃든 정령이 바람을 일으켰다. 정령의 돌풍은 마력을 밀어내고 되돌아와 기마대의 추진력이 되었다.

그렇게 행렬은 거의 떠밀리다시피 통로를 빠져나왔으나, 마력폭풍은 여전히 천지를 몰아치고 있었다. 파도같은 마력도 끈질기게 뒤를 쫓았다.

“······다들, 따라오세요!”

고민하던 레이첼은 하는 수 없이 고삐를 틀었다. 지상에 있어서는 저 마력파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길게 이어진 들판을 포기하고, 텅 빈 절벽으로 말을 내몰았다.
빠르고 과감한 결단이었다.

“하강합니다!”

외침과 동시에 레이첼은 자신의 몸이 앞으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태운 말이 먼저 거꾸러졌고, 몸이 허공으로 쏠렸다.
수직으로 꺾이는 시야에 아득한 암흑이 들이닥쳤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었다.

“윈디-!”

레이첼은 정령을 동원하여 기류를 만들었다.
정령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단원들의 추락 속도를 조절했다. 자연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막대한 용력을 소모하는 이적(異跡)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콰아아아아—!

마력의 파도는 끈질기고 지독했다. 맹수처럼 집요하게 추격해온 마력파가 절벽 위에서 쏟아져내렸다. 하늘에서 쓰나미가 밀어 닥치는 듯했다.

“—!”

폭풍 속에서 검붉게 타오르는 마력의 재해······ 그것은 실로 압도적인 위용이었으나, 레이첼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자신을 쥐어짜냈다. 제 몸에 단 한 방울도 남아있는 것이 없을 때까지.

그녀는 바람[風]과 땅[地]의 보호막을 전개하고자 했다. 정령력을 깨우친 이래로 아주 작은 성과조차 거두지 못했던 ‘속성조합’이었다.

언젠가 스승 신여화가 경고했던 적이 있었다. 서로 다른 속성의 정령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충돌하면, 술자는 주화입마에 가까운 화를 입을 것이라고.

그러나 레이첼은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겁쟁이처럼 사리기에는 아직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다만 이를 악문 채, 바람과 땅의 조화를 갈라틴에 모아 펼쳐냈다.

쏴아아아아······.

갈라틴이 베어낸 허공에 단단한 바람이 발생했다. 정령의 두 속성이 성공적으로 조화를 이룬 것이었다.

“아······.”

그녀의 의지를 그대로 체현한 듯 굳건하면서도 부드러운 바람─ ‘땅을 닮은 돌풍’은 거대한 막을 이루어 마력의 폭류를 정면으로 막아섰다.
더 나아가, 깨어지지 않으며 버텼다.
폭포처럼 쏟아지던 마력과 정령의 힘이 충돌하자 거대한 빛이 뿜어져나왔다. 세상을 순식간에 잠식하는 빛이었다.

그렇게 온 세상이 표백되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들을 보호하던 땅과 바람의 정령이, 몰아치던 마력의 파도가, 세상을 채우던 빛무리가 서서히, 그리고 동시에 사그라들었다.
레이첼은 온몸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몸 전체가 의식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듯 기묘한 탈력감이었다······.

······그렇게 희미한 속에서, 어떤 손이 내려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자신을 끌어 당기는 몸짓에 레이첼은 기꺼이 몸을 맡겼다.
“수고했다.”
작은 목소리가 꿈결의 눈송이처럼 소복히 가라앉았다.


습격에는 전조가 없었다.
적들은 정말 갑자기 등장했고, 숫자는 적어도 스물이 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나에게 좋았다. 마력 폭풍 속에서는 오직 나만이 시야에 자유로웠다.

─전부 쏟아부어라. 통째로 녹여버리면 그만이다.

놈들은 스무명 분의 마력을 모으더니 내가 뚫은 터널 안으로 모조리 쑤셔넣었다. 영창이나 주문도 없는, 무식할만큼 단순한 마력파(魔力波)였다.

“뭔 미친놈들이······.”

나는 곧장 헬기의 포격 시스템을 가동했다.
원래 군용이었던지라 동체의 양익에는 기관총을 비롯한 무기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미사일에 가까운 마탄들이 원통형의 탄창에서 격발되었다.

지잉— 콰과과과과광—!

마탄의 포화가 지상을 헤집었다. 노면에 처박힌 탄환이 크게 폭발하면서 흙과 바람이 노도처럼 일어났다.
미지의 습격자들은 그제서야 나를 발견하였으나, 이미 절반 가까이가 포격에 쓸려나간 뒤였다.

─······저 놈이 그 용병인가.

놈들이 이쪽으로 검은색 불덩이를 쏘아냈다. 이번에는 적어도 ‘술식(呪式)’을 갖춘 마법이었다. 축구공만한 덩어리가 탄막(彈幕) 이루며 쇄도했다.

쿠궁—! 쿠궁—! 쿠궁—!

나는 그것들을 피하기 위해 고도를 올려 마력폭풍 속으로 동체를 숨겼다. 화염탄은 폭풍에 휩쓸려 형체를 잃거나 헛돌다가 애먼 곳으로 날아갔다.

폭풍을 바리케이트 삼아, 나는 사막의 독수리를 쥐었다. 권총이었던 것의 총신과 총구가 길어지며 저격소총으로 일변했다.
곧장 지상의 놈들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성흔을 부여한 탄환이 배리어를 단번에 깨부수었다. 놈들 중 하나가 심장을 관통당해 쓰러졌다. 이제 남은 것은 아홉이었다.
철컥—
그렇게 여덟, 일곱, 여섯······ 제 동료들이 하나 둘 씩 목숨을 잃자 놈들은 후퇴를 감행했다.

─일단 물러서라!

정말 순식간의 퇴각이었다. 습격자들은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먼지가 되어 흩어졌나, 바람이 되어 날아갔나. 어떤 요술을 부렸는지 알고 싶었지만 지금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

끼에에에엑—!

상공을 배회하던 바이퍼가 나를 포착했다. 이 거친 폭풍 속에서도 놈은 헬기를 노려보며 똑바로 날아들었다.
나는 핸들을 크게 꺾어 고도를 낮췄다.
그러나 놈은 끈질기게 추적해왔다. 거의 지상에 처박힐 지경이 되어도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푸스스스—
두 비행체가 인접하자 노면이 비명을 내질렀다.

캬르르갸─!
“아오 이 씨발 뱀대가리가······.”

바이퍼가 흙먼지를 흩날리며 헬기의 동채를 후려쳤다. 헬기가 크게 빙글 돌았고, 그때 나는 탄환의 시간을 발동했다.

고오오······.

끊임없이 이어지던 프로펠러의 소리가 정체되었다. 그만큼 체감 시간이 느려졌다.

나는 사막의 독수리를 쥐고 헬기의 문을 열었다. 저격총이었던 것은 어느새 산탄총이 되었고, 열린 문 앞에 아가리를 쫙 벌린 바이퍼가 있었다.
놈은 독을 뿜어내려는 듯하였으나, 먼저 수류탄을 꺼내어 목구멍에 쳐넣은 뒤 샷건을 때려 박았다.
쿠우웅─!

몸 안에서 수류탄이 터진 바이퍼는 그대로 튕겨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놈의 몸을 다시 겨누었다. 이번에는 탄환에 성흔의 마력을 장전했다.
마지막 한 획이었다.
철컥, 탕─!
비명을 내지르며 터져가는 놈의 몸이 느리게 보인다.

“후······.”

탄환의 시간이 해제되고, 나는 다시 헬기의 고도를 올렸다.
옷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내며 레이첼이 추락한 절벽으로 향했다. 절벽은 생각보다 훨씬 가팔랐다. 그래서 걱정도 되었으나, 다행히 육안으로 본 그들의 상태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신기하구만.”

사람 열한 명과 말 열한 필이 허공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절벽의 한 가운데에, 마치 거미줄에 걸린 듯 팽팽하게 누워서 숙면 중이었다. 나는 헬리콥터가 호버링(hovering)하도록 둔 채 그곳으로 낙하했다.

“바람이 단단하네.”

마치 땅을 딛는 것처럼 안정적이었다. 대저 불가해(不可解)한 풍경이었으나, 정령은 원래 이토록 신비한 힘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레이첼에게 다가가려다 흠칫 멈추고 방독면을 썼다. 혹시 깨어날 수도 있으니.

“······무리 좀 했나보네.”

레이첼의 온몸에 핏줄이 푸르게 돋아나 있었다. 마력과 정령을 과용한 부작용, 마력 탈진이었다.
나는 레이첼의 몸을 천천히 끌어당겨 헬기에 눕혔다.

“수고했다.”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갑자기 레이첼이 눈을 떴다.

“······.”

초점이 희미한 눈이 확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내 몸이 굳었다. 아주 짧은 시간만에 내 심장을 뒤흔든 레이첼의 눈은, 그러나 금세 감기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요동치는 심장을 일단 진정시켰다. 심호흡을 하면서 화제를 애써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일부러 보유 SP와 시스템 로그(Log)들을 확인했다.

[‘어린 드워프의 손재주’로 출중한 운전 실력을 발휘합니다.]
[‘어린 드워프의 손재주’가 ‘명사수’에 영향을 끼칩니다.]
[새로운 시너지 효과가 발현됩니다······.]
[SP : 3305]

그 동안 SP는 과연 맹렬하게 오르고 있었다. 나도 레이첼처럼 정령친화력이나 배울까, 생각하면서 편안히 잠든 열 명의 단원을 둘러보았다.
따뜻하게 두근거리던 마음이 다시 차가워졌다.

이들 중에 누군가,
레이첼을 배신한 자가 있다.


흐릿한 기억 속에, 어떤 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볼살이 포동포동한 금발의 아이였다. 그때 아이는 아직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알지 못했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강사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런던을 방문하던 나날이었다. 영국에 천하의 기재가 태어났다— 는 소문이 유럽을 맴돌았고, 영국의 만민이 작은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그들 전부가 잔소리꾼일 뿐이었다. 하기 싫은 숙제를 종용하는 나쁜 어른들. 친구와 노는 것도, 놀러가는 것도, 그네를 타는 것도, 시소를 타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귀찮은 사람들.

하지만 단 한 명, 아이에게 쉼터가 되어 주었던 어른이 있었다.
그는 늙은 집사도 아니었고, 어렸을 적부터 키워주었던 보모도 아니었고, 다만 버킹엄을 수호하는 어떤 기사에 불과했다.

“또 숨어 계시는군요.”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웃음처럼 들렸다. 풀숲 속에 숨어있던 아이가 흠칫 떨더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는 남자를 보더니 ‘너 정도는 만만하지—’라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표정을 바꾸며 팔짱을 꼈다.

“응~ 공부 하기 싫어서 도망쳐나왔지~”
뻔뻔한 말에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이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말이십니까?”
“응. 나 거짓말 안해. 도망쳤어.”
“정직하시군요. 좋습니다. 그럼 어디, 계속 가보시지요. 어디를 그렇게 가고 싶으셨는지”

그러자 아이가 예상했다는 듯이 헤헤- 웃더니 작은 발을 움직였다. 남자는 그 뒤를 쫓았다.
끙차- 끙차-
아이의 작은 발과 다리가 숲 속을 힘차게 넘나들었다. 여태 아이가 배운 운동이나 마력따위의 것들은 이렇듯 명랑한 모험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거침 없이 나아가던 두 사람은 어느덧 작은 언덕에 닿았다.
아이는 언덕의 풀밭에 엎드려서 두 손으로 턱을 괴었고, 남자는 그녀의 뒤편에 시립했다.

“예쁘지~? 여기 엄청 좋아~”

꽃받침한 얼굴로 아래의 풍경을 해맑게 굽어보며 중얼거렸다. 남자는 아이가 바라보는 곳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자연이 만든 화원(花園)이었다. 작게 돋아난 나무 가지마다 색색의 꽃이 피었고, 나비와 벌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는 듯했다.

“그렇군요.”
“그치? 난 말야, 크면 이런 데서 살고 시퍼. 막, 꽃이랑 나무같은거 키우면서. 아, 고양이도 한 마리 키울래~”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남자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흐뭇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앗, 저기, 저기 봐봐!”

이 사랑스러운 공주는 훗날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부심이 될 것인가. 그러나 그때 공주는 얼마나 큰 책무를 혼자서 짊어지게 될 것인가······.

“저기, 다람쥐도 있어~ 봐봐, 다람쥐~”

작고 귀여운 생명에 눈을 빛내는 공주를 지켜보며, ‘알렉스 에드먼드 랭커스터’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God save the princess.

레이첼은 눈을 떴다. 절반 쯤 가려진 하늘이 보였다. 구름 사이로 초승달이 드러나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이승에 있는 듯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 명의 단원들이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레이첼은 그들을 잠깐 바라보다가 한숨 쉬듯 물었다.

“······당신입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첼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잠깐 눈을 떴을때, 언뜻 그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물론 아주 희미한 실루엣 뿐이었지만.

“말 하기 싫으면 마세요.”

레이첼은 투덜거리더니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갈라틴 안에 아직도 정령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절벽에서 자신이 했던 일이 깊이 기억나지 않았다.
이것으로 나는 동료들을 구한 걸까? 나는 무엇을 어떻게 했던 걸까?

─평범한 바람과 정령의 바람은 다르지. 정령은, 자연을 보다 강력하게 다루는 힘이야. 땅과 바람이 조화를 이루면 바람이 단단해지지. 그런데 단단한 바람은 막지 못할 것이 없어.

그때 수정 구슬이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어떤 힌트같은 말이었다. 레이첼은 ‘네가 뭘 아냐’고 쏘아붙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레이첼은 Xtra가 정령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어쩌면, 세간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또 다른 정령사일지도 몰랐다.

─이제 이틀이면 전당에 도착할 거다. 몸 상태는 괜찮나?

레이첼은 제 상태를 살폈다. 단전이 굳은 듯 마력이 흐르지 않았고, 몸에도 힘이 없었다. 심각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탈진 상태였다.

“나아질 거예요.”
─탈진에 도움되는 약초를 곧 찾아서 주마.

말 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이렇게 도움만 받는 것이 왠지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절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대신 죄라도 지은 것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아, 습격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구였습니까?”
─절반 이상은 죽였다. 나머지는 도망치더군. 누구였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네가 알 듯 한데.
“······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아니다.

그는 지금 배신자의 처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끄나풀에 대한 어떤 증거가 발견되면 곧장 처리할 심산이었다. 그것에 레이첼의 흉중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이제 편히 쉬어라.

어느 순간부터 Xtra의 말투가 무슨 노회한 스승처럼 바뀌었다. 레이첼은 그것이 낯설면서도 편안했다.

“그쪽도요.”

그녀는 몸을 대자로 펼쳐서 누웠다.
육신은 황폐했으나 마음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사실, 그 어느때보다 뿌듯했다. 자신의 힘으로 단원들을 지켜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후훗.”

레이첼은 노면에 누운 열 명의 단원들을 한 명 한 명 씩 살펴보았다. 달빛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모두 곤히 잠든 듯 편안해보였다.

“다행이다······.”

정말, 단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되뇌이며,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몽중화 (11) > 끝

< 몽중화 (12) >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무능해서······.”

페르민이 고개를 숙인 채 침울하게 말했다. 페르민 뿐만 아니라 다른 단원들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그들은 부단장에게 도움은 커녕 짐덩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아뇨. 괜찮아요.”

그러나 레이첼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자신들을 덮쳤던 마력파는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저 다 함께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부단장님······.”

울먹거리던 페르민이 레이첼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페르민은 눈을 감고 마력을 사용했다. 밝게 일어난 마력이 레이첼의 몸 이곳저곳을 어루만졌다.
단순하지만 희귀한 재능— ‘치료와 재생’이었다. 덕분에 근육통을 포함한 내상이 단번에 치유되었다. 레이첼은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고맙긴요. 이런 건 당연한······”
“부단장님!”

그때 순찰을 나섰던 단원 세 명, 마커스와 캐런과 데일이 돌아왔다. Xtra가 약초를 찾는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기에 사주경계는 당분간 그들의 몫이었다.

“근처에는 위험요소가 없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걸 잡아왔습니다.”

그들은 멧돼지 한 마리를 짊어메고 있었다. ‘리코리트’라는 중하급 괴수로, 그 맛과 영양이 상당히 출중하다고 이름 난 녀석이었다.

“오늘 구워먹읍시다. 원기 회복 하셔야지요.”
“네. 좋아요. 다 같이 먹어요.”

레이첼은 오늘따라 매사에 사근사근했다. 정령사로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마음도 그만큼 가벼워진 것이었다.
그녀는 탈진이 낫자마자 ‘속성 조화’를 치열하게 연마할 계획이었다.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단원들이 식사를 준비했다. 중앙에 모닥불을 피우고 도란도란 둘러앉아 손질한 리코리트를 굽기 시작했다.
시가가 적어도 수천만원은 넘는 고기가 통째로 익어가고 있었으나, 단원들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젯밤에 있었던 습격이 그들에게 무력한 패배감을 심어버렸다.

“······랭커스터였겠죠?”

마커스가 지나가듯이 물었다. 다른 단원들도 그늘진 얼굴로 레이첼을 보았다. 레이첼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거예요.”

단원들은 침묵했다. 타닥타닥— 텅 빈 들판에 고기 익어가는 소리가 처연했다.

“자, 이제 드세요.”

고기가 다 익자 레이첼이 몸소 접시에 덜어주었지만, 단원들은 입맛이 없는 듯 깨작거릴 뿐이었다.
그들은 한참동안을 그렇게 우울하게 있었다.

“그런데······ 그 현지인은 어떻게 된 거냐?”

마커스가 분위기도 바꿀 겸 페르민의 어깨를 건드렸다. 생각에 잠겨 있던 페르민이 흠칫 허리를 곧추세웠다.

“뭐, 뭐가?”
“현지인 길잡이 말야. 그러려니 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어떻게 평범한 길잡이가 마력 폭풍에서도 브리핑을 해?”

다른 단원들도 비슷하게 의심 어린 얼굴이 되었다. 길잡이 덕분에 편안하게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랭커스터에게 습격을 당한 지금은 무엇이든 찝찝하게 느껴졌다.

“아 그게······.”

페르민이 레이첼을 보았다. 그녀는 그저 온화하게 페르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진실을 말해도 좋다는 눈빛이었다.

“Xtra······ 라고 알지?”
“······역시 그 사람이었구만.”

그러나 단원들은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던 듯 싱겁게 반응했다. 오히려 페르민이 어리둥절했다. 이게 이렇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나?
페르민은 손을 휘저으면서 훨씬 더 충격적인 의심을 내놓았다.

“아니아니아니, 그것보다도 더, 내가 생각을 좀 더 해봤는데.”
“뭔 생각.”
“아니, 아무래도 이 용병이 우리 부단장님을 흠모하는 것 같아서······.”
“······흠모? 뭐, 좋아한다는 거야?”
“어? 아직, 아직은 의심 단계.”

그러자 단원들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페르민을 돌아보았다. 반면 레이첼은 약간 정곡을 찔린 듯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그게 말야, 들어봐. 부단장님도 들어보세요. 이게······.”

페르민은 여태 고민하고 있었던 의문을 늘어놓았다.
왜 Xtra같은 유능한 용병이 고작 7억이라는 보수로 임무를 수임하였을까. 돈 때문은 물론 아닐 것이고, 명예 때문도 아닐 것인데.
그렇다면 솔직하게, Xtra는 레이첼이라는 사람 자체에 끌린 것은 아닐까.

“설득력 있지 않나요?”

말이 끝나자마자 단원들은 모두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레이첼은 움찔 떨더니 쥐었던 고기를 내려놓았다.

“아니요. 그렇다기 보다는······”

띠리리링— 띠리리링—
그때, 웬 시끄러운 소리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울렸다. 스마트 워치에서 나는 알람이었다.

“······뭐야 이거?”
“워치 알람 아니야?”
“워치가 왜 울려 지금.”

중앙아시아는 전자기기가 먹통이 되는 곳이었다. 하여 스마트 워치는 그저 시계로만 쓰고 있었는데······.
단원들의 스마트 워치에 메시지가 전송되어 있었다.

[전당에서 보내는 메세지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영국 왕실 길드’는 첫 번째 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링크를 눌러 ‘전당 자격증’을 확인해주세요.]

“시험이면······ 이거, 협회가 미리 준비한 건가?”

단원 중 한 명이 중얼거렸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헬기 안에서 바이퍼의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고 있었다. 바이퍼는 가죽이 튼튼하고 마력저항성도 높으니 갑옷으로 만들면 꽤나 좋은 물건이 될 것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그렇게 해서 어깨부터 허리까지 감싸는 [바이퍼 가죽 갑옷]이 탄생했다.
무두질, 바느질, 납땜 따위는 전부 성흔의 마력으로 해결했으니 성능은 말할 것도 없고, 드워프의 손재주 덕분에 디자인도 무슨 로마신화에서나 나올 법하다.

“근데, 어떻게 주지.”

나는 이것을 레이첼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나 명분이 없었다. 또 레이첼의 성격 상 무턱대고 받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쓰기에는 이미 여자 사이즈로 만들어버렸다.

“······아, 씨. 왜 그딴 꿈을 꿔서.”

어젯밤 나는 이상한 꿈을 꿨다. 꿈 속에서 에반젤을 똑닮은 어린 레이첼과, 아직 타락하지 않은 렝커스터를 보았다. 그 시절의 레이첼은 지금과 달리 명랑했고, 랭커스터는 공주와 조국에 무한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너무나도 선명한 꿈이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꿈이었다. 꿈 속의 기억은 어떤 감정이 되어, 나로 하여금 레이첼을 동정하게 만들었다.

띠리리링—!

“으어! 아 깜짝이야.”

돌연 스마트 워치가 시끄럽게 울었다. 이거 뭐야, 중앙 아시아에도 전파가 통하는 곳이 있나?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워치를 보았다.

[전당에서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영국 왕실 길드’는 첫 번째 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링크를 눌러 ‘전당 자격증’을 확인해주세요.]
“······전당 자격증?”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링크를 눌렀다

[당신의 소속은 ‘영국 왕실 길드’입니다.]
[이름은 ‘Xtra’로 설정되었습니다]
[전당 자격증을 확인하려면 눌러주세요.]

“뭔데 또 이건?”
─들리시나요?

때마침 레이첼에게서 통신이 왔다.

“어. 들려.”
─네, 저 그게······.”
“전당 자격증?”
─네. 그거요. 저희도 지금 방금 막 메시지가 왔습니다. 이게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 당신도 포함되어 있네요.

레이첼이 당혹스러운 듯 말했다.
나는 [전당 자격증]을 클릭했다.

──[전당 자격증]──
▶이름 : Xtra
▶공적 등급 : A+
▶소속 : 영국 왕실 길드
▶계열 : 암살자 · 관측자
▶관계 : 무(無)

*이 자격증이 있어야만 전당에 출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영국 왕실 길드’ 소속으로, 길드의 여러 시설과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

“하······.”

헛웃음이 흘렀다.
전당은 몰라도, 이 ‘자격증’은 내가 예전에 폐기했던 설정들 중 하나였다.


“거 봐, 내가 말했잖아.”

천장은 높고 완만하게 솟아 거대한 돔을 이루었고, 사면은 온통 푸르른 수정으로 이루어졌다. 온 사방이 찬란하며 웅대한 이 미지의 ‘전당’에서, 에일린은 홀로그램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협이 일등할거라구.”

[1. 정수의 해협]

가장 먼저 [전당 자격증]을 부여받은 길드는 역시 채나윤을 위시로한 ‘정수의 해협’이었다. 윤승아와 김수호가 있는 창조주의 성은은 아쉬운 2위.
에일린의 예상대로였다.

“17위는 왕실 길드라는데요. 알아 보셨습니까?”

에일린과 같은 공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진세연이 말했다. 협회 소속 최상격 영웅인 그녀는 감독관으로서 전당에 ‘섭외’되었다.
에일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하러. 글고 어차피 레이첼 밖에 없잖아 거기.”
“그래도 한 번 보십시오. 그쪽이 고용한 용병이 꽤 특이합니다.”
“용병은 왜?”
“음······ 일단 보십시오.”

진세연이 허공에 보드를 띄웠다. 홀로그램처럼 번지는 보드의 맨 위에는 [1. 채나윤], 그 다음에는 [2. 김수호] 라는 문자가 쓰여 있었다.
이것은 전당 행렬 도중, 개개인이 습득한 점수로 순위를 매긴 차트였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협회가 아닌 ‘전당’이 자체적으로 참가자들을 관찰하고 평가한 점수다.

[8. Xtra]
▶중상격 괴수 바이퍼 사살
▶미지의 습격자 13명 격퇴
▶공적 평가 : A+

“엉? 용병이 혼자서 바이퍼를 잡았네? 미지의 습격자는 또 뭐시여? 마인들이랑 싸웠나?”

바이퍼는 성체 기준 중상급 1품 괴수다. 용병이 상대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축에 속한다. 그런데 이 용병은 거기에 더해 웬 습격자들까지 잡았단다.

“용병 수준이 아닌데?”
“예. 그래서 용병으로는 유일하게 자격증을 받은 것 같습니다. 영국 왕실 길드 소속으로요.”
“어, 진짜? 그럼 전당이 계산을 잘못 한거야?”
“그건 모르겠습니다. 한데, 왕실 길드가 결원이 생겨서 11명으로 오지 않았습니까? 그 한 명의 공백을 이 용병이 메꾼 것 같기도 합니다.”
“흐음······.”

에일린은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그러나, 뭐가 되었든 전부 ‘전당’의 선택일 것이었다.

“······일단 지켜보자고. 아직까지는 나도, 너도, 얘네도, 이 전당이 뭔지는 자세히 모르니까.”

중앙아시아에 형성된 대규모 필드인 ‘전당’은 모두의 생각이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녀석’이었다.
그렇다, ‘녀석’이다.
이 ‘전당’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소통한다.
심지어 협회에 먼저 통신을 건 것도 전당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본인은 중앙아시아에 형성된 거대 필드 ‘전당’이라고 합니다······] 로 시작하는 장문의 메일은 너무 장난 같아서 한동안 스팸 쓰레기통에 묻혔었지 아마.
아무튼.
그렇다면 이 전당은 살아 있는 컴퓨터인가? 아니면 고도로 발전된 인공지능인가? 그것도 아니면 정말 ‘공간’ 자체가 지능을 가졌다는 말인가?

에일린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모든 의문은 ‘전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서야 해결될 것이었다.

“이제 곧 오겠네.”

에일린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끼이이익— 거친 소리를 울리며 문이 열렸다. 진세연과 에일린은 그곳을 보았다.
전당의 입구 그 너머에, 12명의 영웅이 있었다.
채나윤, 유연하, 이진아, 이지윤 등등- 전부 명성이 드높은 저치들은, 한국의 명문 ‘정수의 해협’이었다.

“반갑다. 늬들, 오랜만이다~?”

에일린은 그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이게······ 두 번째 시험일까요?”

이튿날, 행군을 재개한 왕실 길드는 어떤 위압적인 장애물에 닿았다.
굳이 묘사하자면 거대한 미로였다. 오우거나 거인이 미로를 만들었다면 이러할까, 싶을 만큼 장대한 미로. 벽의 폭은 5m쯤 되었고 높이는 20m를 가벼이 넘길 듯했다.

“글쎄요. 이건······.”
─거기 들어가지 말고 기다려라.

수정 구슬이 반짝였다. Xtra의 통신이었다. 샤샤삭- 그 순간 모든 단원의 시선이 레이첼에게로 집중되었다.
레이첼은 괜히 긴장이 되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는게 좋겠다.
“쉬었다가······?”
─그래. 너 아직 탈진도 안 나았잖아. 줄 것도 있고.
“······줄 게 있으시다니요, 저한테요?”
─어.

레이첼은 무엇인가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열 명의 단원이 저마다 흥미로운, 불편한, 의심스러운, 음흉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왜죠?”

그래서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탈진에 도움되는 약초를 구했거든. 근처에 호수가 있으니까 일단 거기서······

Xtra의 통신은 그 이후로도 이어졌지만, 레이첼은 뭔가 부담스러워서 도중에 통신을 끊었다.

“흐흐흐, 일단, 그 분 말대로 쉬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커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짙은 눈썹이 오늘따라 유독 능글맞았다.

“······그렇게 웃지 마세요.”

레이첼은 그를 한 번 흘겨본 뒤, Xtra가 말한 호수 쪽으로 대열을 이동했다.

< 몽중화 (12) > 끝

< 몽중화 (13) >

변화무쌍한 환경을 자랑하는 중앙아시아 답게, Xtra가 말한 호수는 초목이 우거진 산림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왕실 길드는 호수 근처에 텐트를 쳤다. 키 큰 나무를 천장 삼고, 풀밭을 바닥 삼는 야영지. 운치는 꽤나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거 뭐 적과의 동침인가? 전당 끝나면 Xtra 잡아야 되지 않냐 우리?”
“그건 모르지. 진짜 핀리가 나쁜 놈일수도 있잖아. 정당방위라고 하지?”
“진짜 나쁜놈이어도 용병이 죽인 건 살인 맞거든? 자력구제라고 아냐?”

마커스를 비롯한 단원들의 속삭임이 바람을 타고 흘러들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듣지 못한 척 수련에 매진했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지금 한눈을 팔 시간 따위 없다.
그녀는 가부좌를 튼 채 숲의 정령과 소통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사실 바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방증이었다.

“하아······.”

역시 탈진이 낫지 않은 상태로는 영 힘들다. 가장 기초적인 마력의 순환부터가 꽉 막힌 듯 답답하니 원. 레이첼은 부루퉁히 앉아서 제 손만 쥐었다 폈다했다.

“부단장님?”

그때 페르민이 그녀를 불렀다. 페르민은 스마트 워치로 자기 자격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자격증은 어디다 쓰는 걸까요?”

──[전당 자격증]──
▶이름 : 페르민 커비
▶공적 등급 : D+
▶소속 : 영국 왕실 길드
▶계열 : 치유자
▶관계 : 무(無)

*이 자격증이 있어야만 전당에 출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영국 왕실 길드’ 소속으로, 길드의 여러 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공적치에 따라 당신이 원하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

일단 이 자격증이 있어야만 전당에 출입할 수 있다는 것은 알겠으나, 그 이외의 사용법은 도통 알 수가 없다. ‘······여러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단락을 보면 다른 쓸모가 있긴 한 것 같은데.

“글쎄요. 일단은-”
“우왁!”
“꺅!”

페르민이 돌연 내지른 괴성에 레이첼도 덩달아 놀랐다.

“이거, 이거 보세요 부단장님!”

페르민의 손에 웬 카드가 쥐어져 있었다. 전에는 없었던 물건이었다.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페르민이 흥분한 얼굴로 빽 소리쳤다.

“스마트 워치에서 빠져나왔어요!”
“네? 어떻게 하셨어요?”
“여기, 아래 보시면 ‘실물로 전환’ 버튼이 있거든요? 이거 한 번 눌러보세요.”
“어······.”

그때였다. 허공에서 나무 막대기가 날아들어 레이첼의 바로 옆에 꽂혔다.

“뭣, 기습인가!”

크게 놀란 페르민은 당장 마력부터 예열했지만 레이첼이 말렸다. 이 막대기가 누구의 것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때마침 Xtra에게서 통신이 왔다.

─약초를 짓이겨서 만든 진액이다. 중화를 안해서 포션보다 독하지만, 그만큼 회복 효과가 좋을 거다.

그 말대로 막대기의 끝에 시약병이 매듭으로 묶여 있었다. 어느새 몰려든 단원들도 그것을 보았다. 진초록빛의 농축액이 찰랑거리는 시약병이었다.

“······감사합니다.”

통신이 끊기자마자 단원들은 저마다 의미심장한 얼굴로 레이첼을 보았다.
이런 게 바로 지극정성인가, 이 약초는 어디서 또 구해오셨대, 우리 부단장님은 능력도 좋으시지······ 레이첼은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침묵이 최선이었다.

“그럼 전, 전 가볼게요. 다들 편히 쉬어요.”
그녀는 시약병을 가지고 텐트 안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천막의 지퍼부터 북 올리고 시약병을 보았다. 내용물은 몇 방울 채 되지 않았지만, 명백하게 불길한 빛깔이었다.

“후우······.”

그러나 지금은 단맛쓴맛 가릴 처지가 아니다.
레이첼은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입 안으로 전부 털어넣었다.

“······!”

진액이 혓바닥에 닿자마자 상상 이상의 맛이 솟구쳤다. 썩어 문드러진 곤충을 씹는 듯한 감각이 식도에서 말초까지 순식간에 질주했다. 그녀는 몸을 새우처럼 굽히고 끙끙거렸다.

“아, 아우, 우어어그······.”

그렇다고 구역질을 해서는 안 되었다.
레이첼은 5분이나 견뎌내고 나서야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맛이 안 좋을 거라고는 미리 말 했지.

Xtra가 통신을 보냈다. 레이첼은 목을 켁켁거리며 물을 들이켰다.

─이제 괜찮아졌나?

구웩, 구웨엑- 헛구역질을 두어번 정도 하고 몸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과연, 진액이 혈관을 깨끗하게 뚫은 듯 마력의 순환이 복구되어 있었다.
레이첼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러면 이제, 자격증을 꺼내 봐라.
“자격증이요?”
─그래. 사용법을 알려주마.

레이첼이 자격증을 꺼냈다. 페르민이 했던 것처럼 ‘실물로 전환’이라는 버튼을 누르자 정말 워치에서 카드가 튀어 나왔다.

“실물로 전환 말입니까?”
─거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구나.
“네. 아까 발견했어요.”
─그것 말고도, 공적치에 따라 실물 자격증의 형상과 등급이 변할 거다. 그 카드로는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무엇이든, 어떤 현상이든 상관 없어. 공적만 충분하다면. 더불어, 길드 공동 금고를 이용하면······.

레이첼은 Xtra의 말을 머릿속에 꾹꾹 눌러 새기듯이 경청했다.


[모든 것을 이루어주는, 모든 것이 해소되는 기적같은 필드!]
[전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당 회의가 이제 곧 시작됩니다! 필드 입성을 기대해주세요!]

웬 스팸같은 문자들이 스마트 워치로 쏟아졌다. 전부 전당이 보낸 것들이었다. 전파가 모두 차단된 이곳에서 스마트 워치는 전당의 노리개로 전락했다.

“기적이라는 건 역시······.”

워치를 들여다보던 채나윤은 다시 한 번 확신했다.
‘기적’같은 필드라니. 아주 의미심장한 단어 선택이 아닌가? 이곳은 분명 기적석의 파편이 제멋대로 발현된 공간일 것이다.

“나윤아, 잡생각 그만하고 와서 이것 좀 볼래?”

그때 유연하가 그녀를 불렀다.
전당에 입성한 정수의 해협은 전당이 배정해준 숙소에 짐을 풀었고, 두 사람은 오랜만에 룸메이트가 되었다.

“뭔데?”
“이거 봐.”

유연하가 ‘전당 자격증’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자격증에서 라면 한 봉지가 툭 떨어졌다. 채나윤의 눈이 약간 커졌다.

“너 뭐야 그거? 어떻게 했냐?”
“그냥. 공적치에 따라 원하는 보상이 주어진대서 이걸 생각했더니 갑자기 나타났네.”
“오······ 근데 라면은 갑자기 왜 생각했대?”
“······응?”

자신만만하던 유연하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지. 모르겠어. 아무튼 기대되네. 전당 회의가 어떨지.”

유연하가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냐?”
“응. 그리고 이 라면은······ 진짜 별 거 아니야. 갖다 버려야 하나?”
“아니 버리진 말고 나 줘. 나 오랜만에 한 번 먹어보게.”
“······에이~ 네가 무슨 라면을 먹는다고. 어디 배탈날 일 있어? 괜찮아. 내가 알아서 버릴게.”
“아니. 버릴 필요 없다니까? 그리고 나 이제 그렇게 안 예민해.”
“됐다니까.”

유연하가 주섬주섬 라면을 배낭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별안간 스읍- 입맛을 다시더니 밝게 말했다.

“······이제 회의 준비나 해야지”

채나윤은 그런 유연하가 새삼 존경스러웠다.
모두가 잠든 밤에, 유연하는 수정구슬로 서울과 통신하며 지령을 내렸다. 낮에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계산하며 거리를 재고 길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피곤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나윤이 너도 같이 할래?”
“엉? 아니, 난 그런 거 못하는 거 알잖아.”
“······하긴.”

유연하는 기업가로서 뿐만 아니라 영웅으로서도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다. 격으로 따진다면 아마 중상격의 초입은 넘기지 않았을까.
물론 이곳에 있는 유연하는 엄밀히 말해 ‘원본’은 아니지만, 유연하의 무의식으로 형성되었으니 그래도 어엿한 유연하가 맞다.

“야, 근데 너 안 피곤하냐? 일주일 내내 안 잤잖아.”
“어차피 침대 가지고 왔어. 괜찮아.”

노트 필기를 하던 유연하가 만족스레 웃었다.

“침대······ 아~ 그 너가 돈지랄 했던거?”
“어머, 돈지랄은 무슨?”

침대 하나에 수십억을 지출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유연하는 미간을 강하게 모으더니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듯 손짓했다.

“너 진젤 모르니? 거기서 신상 침대를 냈는데, 이번에 나도 경매로 겨우겨우 산 거야. 잠 때문에 발목 잡히긴 싫어서 큰맘먹고 여기까지 가져왔지. 망가지면 큰일나.”

유연하가 최고급 확장 배낭에 보관해두었던 침대를 자랑스레 선보였다. 김하진이 [드워프의 어린 손재주]로 제작했다가 사흘 쯤 쓰고 중고로 내놓은 스몰 사이즈 침대였다.

“아, 괜히 꺼냈다. 보니까 막 눕고싶어지잖아.”

킁킁— 유연하는 시트 냄새를 작게 한 번 맡더니, 세상 행복한 얼굴이 되어 침대에 누웠다. 채나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그거 냄새를 왜 맡냐?”
“뭐가?”
“냄새 맡았잖아.”
“······뭔 소리야.”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인 듯했다. 채나윤은 쓰게 웃었고, 유연하는 그런 채나윤을 흘겨보더니 이불을 올렸다.

“아무튼, 기왕 꺼낸 거 나 조금만 잔다.”
“어 그래. 잘자.”
“응. 그럼······.”

······쿠울.
유연하는 눕자마자 잠에 들었다. 참 부러울 정도로 대단한 수면 실력이었다. 채나윤은 잠시 유연하를 지켜보다가 품 속에서 기적석을 꺼냈다.

“하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이 작은 수정을 보고 있노라면, 과거의 나날들이 조각 조각 떠오른다. 지금의 자신을 이루는 기억들이었다.
그러나 이 수정이 완성되면 이제 이별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작별하고, 나를 모르는 또 다른 세계의 저편으로 떠나게 될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나는 잘할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고, 미련 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

채나윤은 창틈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명이 사라진 하늘은 온통 별천지였다.

“몇 개나 있는 거야 저거?”

그녀는 문득 별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의 별마다 소중한 사람이 떠올랐다. 다시 보고 싶은 사람, 볼 수 없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고마운 사람, 미운 사람······.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 모두를 충족하는 단 한 명의 사람이 있었다.


이틀 뒤, 왕실 길드는 미로 앞에 섰다. 마천루가 줄지어 선 듯 거대한 장관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느낌이었으나, 그리 두렵지는 않았다. 적어도 ‘길을 찾는 것’이 목적인 미로 따위는 금세 타파할 수 있으리라 모두가 생각했다.

“들어갑시다.”

레이첼은 평소같은 모습으로 길드를 이끌었다. 하루 쉬려던 걸 이틀이나 쉬어서 마력 탈진은 거의 완벽하게 나았고, 진미 ‘리코리트’덕분에 상태는 어느 때보다 만전이었다.

“예!”
“갑시다~”

그렇게 영국 왕실 길드는 미로 안으로 나아갔다.

“뭐, 크기만 크지 별반 다르지 않네요?”

페르민이 위 아래로 두리번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초입은 평범한 미로와 다르지 않았다. 좌우로 벽이었고 바닥은 흙이었다.

─거기서 우측.
“조금 걷다가 갈림길에서 오른쪽이에요.”

레이첼은 Xtra의 말을 따라 길을 안내했다.

─일단 왼쪽으로 꺾어.
“일단 왼쪽······ 이 아닌 좌측으로 갈게요.”
“왼쪽이 아닌 좌측이요?”
─안 놀릴테니 편히 말해라.
“······.”

미로는 별 위험 없이 순탄하게 이어지는 듯보였다. 처음에는 긴장하던 단원들도 이내 잡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듣던대로 맛이 기가 막혔던 ‘리코리트’와 부단장께서 깨우친 ‘속성 조화’를 주된 주제로 삼았다.
레이첼은 아닌 척 하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단원들이 떠드는 자신의 업적(?)을 전해 들었다.

그런 와중에— 환경이 일변한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흙바닥에 웬 건물의 잔해가 듬성듬성 박힌 채로 나타났다. 붉은 벽돌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개의치 않았으나, 걸으면 걸을수록 조각상의 파편, 물이 고여서 썩은 연못, 대리석 타일 등등 낯설지 않은 물체들이 나타났다.

“······이게 뭐야?”
“아, 그건 가보다. 여기 원래 예전에는 문명 있었잖아. 그 잔해인 것 같은데?”

마커스의 의문에 페르민이 답해주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납득하였으나, 레이첼은 어떤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Xtra에게 통신을 보내기 위해 수정구슬을 꺼냈다.

“저희······?”

그런데 수정구슬이 검은색이었다. 통신이 끊겼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오래 전부터 Xtra의 말이 없었다. 다만 계속 직진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단장님, 무슨 일 있습니까?”

레이첼의 안색을 눈치챈 페르민이 물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리면 단원들이 불안해할 것이 뻔했다.

“아니에요.”

하는 수 없이 레이첼은 수정 구슬을 숨기고 정령을 동원했다. 윈디를 먼저 사방으로 보내고, 위험 요소가 없으면 다시 되돌아오게 하여 최대한 안전한 길을 찾았다.

“으스스하네······.”
“다들 이제 긴장 좀 해야겠다. 캐런, 데일?”
“오케이. 바로 버프 걸게.”

레이첼은 온 몸의 감각을 날카롭게 세운 채 걸었다.
그런데, 걸으면 걸을수록 이상하게 익숙했다. 익숙할 리 없는 중앙아시아의 폐허인데, 기이한 익숙함이 섬뜩한 위화감을 조성했다.

“······.”

그러다 어느 순간, 레이첼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발치에 자그마한 푯말이 있었다. 부서지고 일그러진 푯말이었으나, 그것에는 어떤 영어가 적혀 있었다.

[Henry VIII······]

헨리 8세.
레이첼은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간 발 밑이 꺼지는 듯한 추락감이 일었다. 동공에 초점이 사라지며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곳은 레이첼의 가슴에 트라우마로 남은 공간이었다. 수천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으나, 레이첼이라는 공주만큼은 기어코 살아 남았던 악몽의 밤, ‘햄프턴 궁전’이었다.

“······여기 뭔가 익숙한데?”

단원들도 어느 정도 위화감을 눈치챘다. 기실 그들도 영국의 국민이었다. 그때의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리고, 사태는 벼락처럼 점화되었다.

저편에 붉은 마력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단원들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무기를 뽑아들었다.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보던 레이첼도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부서진 고궁(古宮)의 잔해 저편에 수십에 달하는 인영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채 살기를 뿜어내었다. 일전에 행렬을 습격했던 자들과 비슷한 향이었다.
적들 중 한 명이 이쪽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거슬리던 녀석이 사라졌구나. 잘했다.”

‘거슬리던 녀석’은 Xtra를 뜻하는 것이겠지. 다리에 힘이 풀린 레이첼은 비틀거리다가 겨우 바로 섰다.

“부단장님, 괜찮으십니까?”

페르민의 물음에 괜찮다고 대답하려 하였다. 그러나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 풍경 자체가 그녀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부단장님?”
“······괜찮아요.”

그럼에도 레이첼은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부단장이 된 자로서, 자신은 단원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때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공주여, 나를 기억하는가?”

레이첼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묻는 남자는 랭커스터가 아니었으나, 레이첼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레이첼은 그 날 희생당한 모든 피해자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 혹은 부모, 혹은 자식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평생토록 안고가야 할 짐이자 업보였다.
그녀 앞에 선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 몽중화 (13) > 끝

< 몽중화 (14) >

간신히 묻어두었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피부에서 칼날이 돋아나는 듯 온몸이 저몄다. 상상통은 화마처럼 번졌으나 어떻게 겉잡을 방법이 없었다.
레이첼은 다만 갈라틴을 움켜쥘 뿐이었다.

“너는 꽤나 잘 잊고 살았던 모양이더구나.”

검은 로브의 사내는 사실과 전혀 다른 말을 뇌까렸다. 레이첼은 한날한시도 그 날을 잊지 못했다. 그저 억누르며 살아갔을 뿐이었다.
아니, 살고자 했던 마음도 없었다. 한 순간이라도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면 온몸이 망가졌고, 트라우마와 강박증같은 정신병리는 마음 깊은 곳에 새겨졌다.

“잊은 적······ 없습니다.”

레이첼은 쥐어 짜내듯이 말했다. 그러나 사내는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가증스럽다. 정말, 가증스럽다.”

선명한 적의가 살기와 함께 넘실거렸다. 단원들이 저마다의 무장을 손에 쥐었다. 허나 레이첼은 감히 저들을 베어넘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너로 인해······.”

사내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과거의 상실은 함부로 지껄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들은 입을 다문 채 마력을 전개했다. 허공에 수백의 화염과 송곳이 빈틈 없이 응집되었다.
무영창과 영창이 혼재하고, 술식과 주문이 뒤엉킨 덩어리들. 그것들이 한 순간에 격발되었다.

쏴아아······.

레이첼은 갈라틴을 크게 휘둘러 검막을 발산했다. 또한 정령을 불러내어 단원들을 보호했다.

쿵—!

검과 마력이 충돌하며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마력의 백린이 노면에 흩뿌려지고, 터질 듯한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붉고 푸른 불씨가 허공에서 현란한 춤을 추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백중세였으나,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누가 이기더라도 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여 레이첼은 차라리 묻고 싶었다. 나의 목을 넘기면 너희는 원한을 잊을 수 있겠느냐고. 내 단원들을 보내주고, 영국의 죄 없는 국민들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 따위 충분히 내놓을 수 있었다.
차라리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견딜 수 없는 피로와 슬픔에 시달리던 나날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영원히 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약한 마음이 일었다.

고오오오······.

그때, 일전에 자신들을 습격했던 마력파가 다시금 응집되었다. 영창도 없이 무식하게 마력만을 끌어모아 쏘아내는 비술. 그렇게 생성된 파동은 집요한 목적성을 띄며, 파괴적이고 효율적으로 상대를 말살할 것이었다.

“다들, 물러서세요.”

그러나 어차피 저것의 목적은 자신 뿐이다. 레이첼은 태연하게 나서며 단원들에게 말했다.

“그럴 수 없습······ 으어—!”
“우아아—!”

단원들은 따르려 하지 않았지만, 윈디를 동원하여 그들을 밀어냈다. 정령의 바람은 동료들을 전부 먼 곳으로 내팽개쳤다.

콰아아아아—!

동시에 마력파가 질주를 시작했다. 거센 마력이 지상과 대기를 재로 만들며 치달았다. 레이첼은 눈을 똑바로 뜨고 그것을 마주했다.
그들을 상대함에 있어서— 단 한 순간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레이첼은 갈라틴에 정령과 마력을 끌어모았다.

······불청객은 그토록 중요한 순간에 끼어들었다.

쿠구구구구궁!

하늘에서 돌연 거대한 물체가 추락했다.
괴물체(怪物體)는 마치 커브를 하듯 미끄러지더니, 마력파와 레이첼의 사이에 바리케이트처럼 놓였다.

“······?”

레이첼은 의문 어린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저 쇳덩어리 따위, 마력파에 의해 금세 짓이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쏴아아아아—!

그런데 쇳덩어리는 마력파를 견뎌냈다. 미친 듯이 들이닥치는 마력파를 오히려 튕겨내며 저항했다.

“저게 무슨······.”

레이첼의 경악 속에 마력파는 쇳덩이에 막혀 사그라들었고, 뒤이어 상공에서 한 사람이 쇳덩이 위로 가볍게 낙하했다.

레이첼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이곳에 모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가라. 여긴 내가 맡을 테니.”

그들이 고용한 용병, Xtra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레이첼이 머뭇거리자 그는 답답하다는 투로 재촉했다.

“어차피 너는 저들과 싸울 수도 없잖아. 그리고 네가 오늘 목을 내놓는다고 해도, 저 놈들의 다음 타겟은 영국이다. 일의 전후를 모르고 너만 원망하는 녀석들이 뭔들 알겠냐? 네가 죽는다고 멈출 리가 있겠냐? 비탄에 빠진 영국은 오히려 더 쉽게 무너질 거다.”

레이첼은, Xtra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낯익다고 생각했다. 수정 구슬을 통해서 들었던 음성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단원들이 레이첼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Xtra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독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네가 살아 남은 건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까— ”

찰나, 어떤 송곳이 그에게로 쇄도했다. 그는 몸을 살짝 비틀어서 피했으나, 방독면의 일부가 떨어져나갔다. 레이첼은 그 자그마한 조각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을 보았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

그렇게 뇌까린 그가 작은 물체를 던졌다. 강아지처럼 생긴 기계였다.

“가지고 가라. 길은, 그게 안내해줄 거다.”

페르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것을 건네받았고, 그는 품 속에서 연막탄을 꺼냈다.

펑-!

탄이 폭발하며 짙은 연막이 발생했다. 회색도 아닌 검은색의 연기.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레이첼은 단원들에게 붙잡혔다.

“부단장님. 다시 한 번 그런 짓 하시면, 하극상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잠깐, 이거 놓으세-”
“꿀밤 먹이고 싶은 거 참는 겁니다, 지금.”
“뭐라고요? 끅!”

실제로 어떤 단원이 뿔난 얼굴로 레이첼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애기 주제에······ 짜증나게 하지 마세요. 제가 아카데미 졸업했을 때 부단장님 11살이었거든요?”
“데런이 오랜만에 옳은 말 하네.”

한 번 배신당했던 그들은 엄중하게 경고하며 레이첼을 끌었고, Xtra가 내어준 기계 강아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왕실 길드가 걸려든 함정은 늦지 않게 포착할 수 있었다. 일종의 ‘한정 결계’였다. 적들은 출입구를 따로 설정하여 레이첼을 끌어들였고, 내 헬기는 하늘을 날았던 탓에 입장할 수 없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나는 곧장 헬기의 고도를 낮추어 결계의 입구로 내달렸다.
결계에 입장한 순간 사태는 이미 일촉즉발이었다. 마력파가 레이첼에게로 쇄도하고 있었으며, 레이첼은 그것을 제 몸으로 감당할 작정이었다.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헬기부터 던졌다.
추락한 헬기는 굽이치듯 달려들어서 마력파를 막아냈다.

“너는 누군데 우리의 일에 끼어드느냐.”

······그 이후가 지금이었다. 레이첼은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가도록 만들었고, 오직 나만이 적들의 한복판에 남았다.

“너 혼자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놈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말했다.
나는 끌끌 웃으며 받아쳤다.

“왜. 생각도 못했던 엑스트라가 끼어드니까 화가 좀 나시나?”

일단 일은 저질렀으나 문제가 있었다. 내가 이 녀석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무턱대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믿을 만한 구석이 하나 정도는 있었다.
당장 레이첼이 속성 조화를 깨우쳤을 때, 시스템은 나에게 어떤 선물을 주었다.

[비원의 탑 보너스 ─ ‘특전 계승’이 주어집니다!]
[창고에 보관된 아이템 하나를 전송받습니다!]
[아이템 계승 ▶ 「암흑 광석 화살」]

——————
[암흑 광석 화살]
─최상급 암흑 광석으로 드워프가 제작한 신비의 화살
─각인 효과 목록.
1.「상급 파괴력」
2.「상급 관통력」
3.「상급 암흑 궤적」
4.「중상급 마법 파괴」
5.「중급 의지 추종」
——————

‘의지 추종’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옵션을 지닌 화살.
여태 [검은 연꽃 화살]이라는 어마어마한 활을 가지고도 마땅한 화살이 없어 사용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다르다.

“아무 관련도 없는 무뢰한 주제에······.”

놈의 음성에 노기가 일렁였다. 나는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지금 당장 네놈이 한국어로 떠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니 이 세상 전부가 나로 인하여 형성되었는데, 도대체 무슨 관련이 없다는 말인가.

“연심이냐? 네 놈은 저 공주의 외면에 반한 것인가? 그깟 하찮은 감정 때문에 공주를 보호하는 것이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본디 엑스트라는 대사가 없기에 엑스트라인 것이다.

“허나 너는 사랑받을 수 없다. 그 여자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 수천의 망자들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한, 그들의 원혼과 저주가 심장을 뒤덮은 한, 배신과 고독만 있을 뿐이다.”

나는 시위에 화살을 끼웠다.
그러나 아주 작은 놀라움이 없지는 않았다. 놈의 말은 얼추 옳았다. 레이첼의 운명, 그 모질고 혹독한 설정은 내가 직접 만들었으니.

“너도 공주에게 배신당하게 될 거다. 그것이 바로 공주의 운명이다.”
“······자꾸 뭔 개소리야 이 병신같은 놈이.”

곧장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암흑의 안개 속에서 소리 없이 날아들었다.
검은 궤적이 하나의 미간을 뚫고, 다른 하나의 심장을 박살내고, 또 다른 하나의 척추를 끊어낸 뒤 돌아왔다.
아직 숙련도가 부족하여 세 명 정도가 한계였다.

“죽여라!”

그러는 와중에 놈들의 마력은 이미 술식을 갖추었다.
수십 수백의 마법과 마력이 나에게로 쇄도했다.

“······큭!”

온 사방으로 솟구치는 송곳 중 하나가 내 어깨에 적중했다. 타들어가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크하하하하—! 내 신음을 들은 녀석이 크게 웃었다. 영 듣기 싫은 홍소였다.

“안 되겠구만 이거······.”

아무래도, 그 동안 모았던 SP를 쓸 때가 된 듯했다.


왕실 길드는 기계 강아지의 뒤꽁무니를 따랐다.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길을 걷기만 했다. 그런 암흑같은 침묵 속에서 미로를 빠져나왔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거대한 궁전이 흐릿하게 보였다. 동서남북의 사면(四面)을 수호하며 솟아오른 푸른 첨탑과, 반달을 그대로 본뜬 듯 둥근 형상의 천장.
저것이 바로 전당이었다.

레이첼은 아무 말 없이, 그러나 미련이 남은 듯 뒤를 힐끔거렸다.

“······부단장님. 갑시다.”

앞서 가던 페르민이 레이첼을 불렀다.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리를 움직였다.

왕실 길드는 세 시간 정도를 더 걸어서야 전당의 대문에 당도할 수 있었다. 직선상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가는 와중에 레콜, 괴호, 어스름 늑대 무리 등등 꽤 많은 괴수들과 부닥쳤기에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었다.

“열겠습니다.”
“예, 부단장님.”

레이첼이 전당의 거대한 문에 손을 대었다.
끼이이익- 손이 닿자마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뭐.”
“······와.”

순간 단원들의 말문이 막혔다. 모두가 입을 벌린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만큼 온통 찬란한 보석 천지였다.
바닥의 타일부터 기둥과 천장까지 전부 영롱한 수정으로 이루어진 공간. 그 한복판에는 단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감은 전당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에일린’ 그리고 ‘진세연’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자는,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흥. 반갑다?”

에일린이 심드렁하게 말하면서 일어났다. 열 한명의 단원은 감히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에일린의 실물이 처음이었다. 너무 작고 귀여워서 ‘이게 정녕 정의의 신전의 막돼먹은 소악마 에일린인가—’ 싶었다.

“주제에 어케어케 성공은 했네. 뭐, 너네는 저기로 가면 돼.”

에일린이 전당 동쪽 복도의 끝을 가리켰다.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이고 길드와 함께 그곳으로 가려 했다.

“근데, 그 용병이랑은 같이 안왔네?”

에일린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단원들은 모두 놀란 얼굴이 되어 에일린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에일린이 Xtra를 알고 있지? 역시 지금까지 전부 협회의 시험이었다는 말인가? 설마, 랭커스터도?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거 아냐. 시험같은 건 아니고. 너네 스마트 워치 봐봐. 아마 지금 쯤 전당이 문자를 보냈을 거야.”

단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제 손목을 내려보았다.

[모든 것을 이루어주는, 모든 것이 해소되는 기적같은 필드!]
[전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총 스무 팀이 모였으니, 다음 날 전당 회의가 펼쳐집니다. 필드 입성을 기대해주세요!]

“······이게 무슨 뜻인가요?”
“무슨 뜻이긴, 전당이지. 여기까지 너네 부른 것도, 날 섭외한 것도 전부 전당 짓이야. 이 전당이라는 공간은 인간에 준하는, 혹은 그 이상의 지성을 지닌 것 같거든.”

레이첼의 물음에 에일린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아 시끄러. 모르면 너네가 알아서 찾아.”

에일린은 불친절했고 부루퉁했다. 사실, 자기보다 키가 10cm 이상 큰 여자가 싫었다.
참고로 그녀의 대외적인—본인이 주장하는— 신장은 157.1cm였다.

“······아하하. 반갑습니다, 왕실 길드 여러분들.”

그런 에일린을 대신하여 진세연이 나섰다. 진세연은 에일린과는 전혀 다른 서글서글함으로 길드를 맞이했다.

“······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나 정작 왕실 쪽의 분위기가 축 처져 있었다. 에일린과 진세연이 어마어마한 유명인이라 한들, 어떤 대화를 나눌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크음. 녹초가 되셨나 보군요. 하하하. 일단, 따라오시지요.”

진세연은 머쓱하게 뒷목을 긁적이더니 그들을 안내했다. 길드는 그녀를 따라 전당이 배정해준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 내부는 깔끔하고 좋았다. 넓은 거실에 방이 여섯 개 쯤 있었고, 가장 중요한 욕실 겸 화장실은 세 개나 되었다. 양변기와 샤워실은 일주일 동안 구경도 못했던 터라, 단원들은 우울함도 잊고 반색했다.

“따로 메신저가 올 때 까지 쉬고 계시면 됩니다. 언제 메시지가 올 지 모르니 스마트 워치 알람은 꼭 켜두시고요. 그럼, 이만. 나중에 피로가 풀리시면 찾아오겠습니다.”
진세연이 그 말을 남기고 바깥으로 나갔다.
단원들은 우선 짐부터 천천히 풀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여전히 침묵 속에 있었다.

“······.”

레이첼은 혼자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수정구슬을 꺼내 쥐었다. 그러나 구슬은 여전히 통신이 끊긴 채였다.

“푸우······.”

레이첼은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보았던 Xtra의 모습을 떠올렸다. 부서진 방독면 너머로 드러난 Xtra의 눈동자는 어딘가 익숙했다. 그 음색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을 기억하는 것만큼은 어느 정도 도가 튼 레이첼이었다. 착각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지만, 쉽사리 짐작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과 너무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제가 당신 팬이거든요.

문득, 어디선가 들었던 목소리가 희미하게 재생되었다.
그러나 가능성이 없는 망상이었다. 그만큼이나 먼 곳에서,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리가 없다.
또 그를 닮은 사람은 세상에 많고도 많을 것이다. 그렇게 특색이 있는 얼굴도 아니니.
그래, 그런 거다. 심지어 그는 활이 아닌 총을 무기로 쓰지 않는가······.

레이첼은 다시 두 손에 쥔 수정구슬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탓하며 이를 악물었다. 뭐가 되었든 또 다시, 자신과 관계 없는 사람을 끌어들이고 말았다.

끼이익—

레이첼이 그렇게 자책하던 사이,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느릿느릿 입장한 페르민은 침대 위의 레이첼을 흘끗 보더니, 슬그머니 다가와 그 옆자리에 앉았다.
레이첼은 페르민을 보았지만 어떤 말을 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그렇게 있었다.

“······그거, 아시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듯하던 침묵이 부드럽게 깨어졌다.
페르민이 자기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제 어머니도 그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거.”
“······.”

레이첼이 고개를 들어 페르민을 보았다. 그녀로서는 당연히,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페르민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때는 저도 부단장님을 원망했습니다. 아니, 나라 전체를 원망했지요. 많이 울기도 했고.”

페르민은 입가의 미소를 거두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처럼 솔직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그건 부단장님 탓이 아니었으니까요. 물론 나라의 탓은 있었지만······.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

페르민이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레이첼은 그저, 죄인처럼 가만히 앉아 생각할 뿐이었다.
내 주변에는 정말, 정말 과분할만큼 좋은 사람들이 있구나······.

“저는 그렇습니다. 원망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증오로 되풀이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증오의 연쇄는 피차 너무한 일이에요. 하지만 누구 한 명이 그것을 끊어낼 수는 없습니다. 둘이서 함께 끊어내야 해요.”

페르민이 레이첼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살갗 위에서 스며들었다.

“그런 점에서 부단장님은 저를 기억해주셨고, 제 어머니를 잊지 않으셨고, 저는 제 손으로 증오를 끊어냈습니다.”

레이첼도 페르민을 보았다. 레이첼의 눈가에 작은 물기가 고였다.
젖은 목소리가 떨리며 이어졌다.

“그러니, 부단장님도 이제 그만 미워해주세요. 자기자신을 증오한다고 해서, 일이 달라지지는 않아요.”
“······.”
“아시겠죠?”

그렇게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던 두 사람은, 갑자기 페르민이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우갸악-!”
“꺅! 뭐, 뭐예요!”
“구슬, 구슬 보세요!”

페르민이 레이첼의 손에 들린 수정 구슬을 가리켰다.
구슬 속에, 파란 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 몽중화 (14) > 끝

< 몽중화 (15) >

전황은 숨 고를 틈도 없이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쇄도하는 송곳과 구체의 숫자는 체감상 무한(無限)이었다.
나는 사막의 독수리로 그것들을 격추하였으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탄막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아오······.”

따라서 재능의 내용을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물론 단발적으로 떠오르는 재능들은 많았다. 김수호의 검성, 에일린의 언령, 유진웅의 전신, 광원의 대지개벽 등등······.
그러나 그만큼 거대한 힘들은 지금 내 SP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었다.

[SP : 3,975]

4,000이 조금 안 되는 SP를 전부 털어서 작성할 수 있는 재능.
지금 상황에서는 단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정령석(精靈石)의 주인]

정령은 나쁘지 않은 재능이었다. 아니, 오히려 전 세계에 손꼽히는 유니크한 힘이었다. 총·활과 상당히 잘 어울리기도 하고.
나는 심호흡을 한 뒤 탄환의 시간을 전개했다.
느려진 시간 속, 쏟아지는 포화들을 방어하면서 [설정 개입]을 시작했다.

──────
[정령석(精靈石)의 주인] [특수형]
▶정령석
─정령의 힘이 축적된 돌. 이 정령석을 소유하고 있는 한, 대상은 정령을 활용할 수 있다.
▶돌의 주인
─정령석의 주인으로서, 정령석을 다룰 수 있는 숙련도를 습득한다.
──────

효과를 최대한 증폭시키기 위해 ‘물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제한을 두었고, 당장 사용하기 위해 ‘숙련도 습득’이라는 문장을 추가했다.

[SP를 모두 소모하여 재능 ‘정령석(精靈石)의 주인’을 저장합니다.]
[5년 가까이 쌓였던 ‘운의 축적’이 드디어 발생합니다!]
[재능의 격이 크게 상승합니다!]
[‘정령석’의 크기가 보다 거대해지고 용적이 늘어납니다!]

쿵—!
하늘에서 웬 달덩이만 한 돌이 추락했다.

“어, 씨발 뭑!”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품에 안을 수도 없는 크기인데, 이게 도대체 어딜 봐서 행운이라는 거야?
그러나 억울할 시간도 없었다. 나는 정령석에 손만 댄 채 사막의 독수리를 들었다.
두 번째 단락 ‘─정령석의 주인으로서, 정령석을 다룰 수 있는 숙련도를 습득한다.’ 덕분에 정령석의 사용법은 자연스럽게 체득되었다.
나는 바람의 속성을 탄창에 담고 곧바로 쏘아냈다.

콰과과과—!

바람이 깃든 탄환은 놈들의 마력을 흐트러뜨리며 쇄도했다. 총탄의 궤적에 따라 상승과 하강의 기류가 난립했고, 적들의 공격은 그 안에서 방향을 잃은 채 헛돌았다.
나는 그 틈을 노려 활시위를 당겼다.

“크억!”
“끅!”

암흑 화살이 두 놈을 동시에 무너뜨렸다. 곧장 되돌아오는 놈들의 반격은 바람으로 밀쳐냈다.
정령석으로 인하여 탄막 게임의 난이도가 급락했다.
어느 누구 하나 다가섬이 없었던 원거리 전투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분개한 그들은 또다시 마력파를 끌어모았다.
그러나 대비책은 이미 마련해 두었다. 나는 정령석을 품에 안고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투두두두—
부채꼴로 흩뿌려진 탄환이 어느 순간 허공에서 멈추었다. 다수의 탄환은 격자처럼 늘어선 채 서로 줄을 잇다시피 하여 빈틈없는 그물을 형성했다.
‘바람의 땅’이었다.
저번에 레이첼이 썼던 것과 비슷한 원리였으나, 나는 검이 아닌 총알을 매개로 삼았다.
쏴아아아아······.

바람의 그물막에 마력파가 걸려들었다. 정령석이 커다란 열과 빛을 뿜어내었다. 연료가 급속히 소모되고 있었지만 워낙 크기가 큰 덕분에 잔량은 여유로웠다.

“크으, 윽!”
“악!

마력파가 사그라들 무렵 나는 화살을 발사했다. 기진한 놈들은 배리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쓰러졌다.
그렇게 하나, 둘, 셋, 넷······. 어느 순간부터 적들은 급속도로 무너졌고, 종국에 이르니 단 한 명만이 남았다.
나는 바람을 일으켜 놈의 후드를 벗겼다.
초로의 사내였다.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얼굴에 세월과 고통의 흔적이 깊게 패여 있었다.

“······.”

나는 놈에게 총구를 겨냥하고 수정 구슬을 꺼냈다. 레이첼과 통신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놈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너는 나에게서 어떤 것도 얻어낼 수 없다. 그냥 죽여라.”
“······그래?”

수정 구슬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자는 랭커스터에게 세뇌라도 당한 것일까. 아니면 자발적으로 복종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정보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너희는 왜 굳이 레이첼을 죽이려 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너는 그것도 모르고 공주을 사랑하는 것인가?”
“아니, 레이첼도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잖아. 레이첼은, 아마 네 얼굴을 기억할 거다. 네가 누구인지, 그곳에서 어떤 소중한 사람을 잃었는지도.”

놈이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하, 괴로움? 그리고, 뭐? 기억? 그딴 건 하등 소용 없다! 공주의 괴로움이 아무리 짙고 어둡다 한들, 이 세상에서 그 괴로움을 느낄 기회조차 박탈당한 자보다 괴롭겠느냐!”

노인은 랭커스터의 기원(起源)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예전에 있었던 세계— 원래의 지구였다면, 이 자는 어쩔 수 없이 분을 삭이거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며 묻어둔 채 살아가거나, 견뎌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힘이 있다. 원한을 해소할 방법이 있다. 악마에 몸과 영혼을 팔아 강해질 수 있다. 따라서 원한과 복수가 빈번할 수 밖에 없고, 랭커스터는 그 증오의 연쇄 속에서 탄생한 ‘가장 현실적인 적’이었다.

“그래도 레이첼은 20년에 동안이나 괴로워했어. 그것만으로도 많이 불행한 녀석인데, 이 정도면 용서해 줘도 되지 않나.”
“아니. 용서는 죽음뿐이다. 공주도 죽어야 한다. 내 딸아이처럼. 아니, 내 딸아이보다 더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 아이가 그곳에서 얼마나 무서워했을지 나는, 나는······.”

노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살벌하게 마력을 쏘아내던 모습과는 너무 큰 괴리가 있었다.

“······그러냐.”

몸을 꺾어내며 토하는 울음을 들으며, 나는 노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아쉽게 됐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세상이 소설이 아닌 것처럼 살아가고, 소설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소설이 아닌 것처럼 죽어간다.
오직 나만이 외딴 섬처럼 남아 이 세상을 소설로 바라볼 뿐.

“난 공주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야기만큼은 옛 동화처럼 행복한 결말을 맺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너희를 이대로 놔둘 수가 없겠다.”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쾅—!
거친 격발음이 공허하게 울렸다. 격렬했던 교전의 끝에, 안개 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

나는 작게 한숨 쉬며 수정 구슬을 꺼냈다. 한데 구슬은 이미 부서져 있었다. 이곳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에 노출된 탓이었다.
구슬의 파편을 노면에 흩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내 고향은 저 하늘의 별천지보다 먼 곳이었다.


쾅─!

“······!”

모두가 잠든 밤, 귓전에 커다란 벽력이 환청처럼 일었다. 레이첼은 몸을 떨면서 깨어났다.

“무슨······. 하아.”

몸이 으슬으슬하고 살짝 몽롱한 것을 보니, 밤새 뒤척이다가도 어떻게 잠이 들기는 한 듯했다.
레이첼은 상반신을 일으켜 앉아 어젯밤 수정 구슬에서 흘러나왔던 대화를 되새겼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너는 그것도 모르고 공주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가?
─아니, 레이첼도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잖아. 레이첼은, 아마 네 얼굴을 기억할 거다. 네가 누구인지, 그곳에서 어떤 소중한 사람을 잃었는지도······.
─난 공주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거든. 그러니 너희를 이대로 놔둘 수가 없겠다.

구슬의 오작동이었는지, 수정 구슬은 약 3분가량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파괴되었다.
페르민은 그것을 두고 “잘 만들어진 수정 구슬은 원래 파손되기 전에 몇 분 정도 통신이 연결돼요. 그때 ‘우리 이제 통신 안 되니까 어디 어디서 만나자—’라고 말하는 거죠”라며 설명해 주었다.
아무튼.
수정 구슬로 전해들은 Xtra의 말은 너무 의미심장했다. 그러나 조금은 낯 뜨거운 대화의 내용을 미루어 보아, 그가 과격하게나마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어젯밤을 회상하던 레이첼은, 양 볼에 불그스름한 홍조가 오른 채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앞꿈치에 뭔가 걸려서 보니, 페르민이 바닥에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레이첼은 그녀를 침대에 올리고 이불까지 덮어준 뒤 숙소 밖으로 나왔다.

이른 새벽이었으나 전당의 복도는 여전히 밝았다.
레이첼은 어젯밤 스마트 워치로 전달받은 ‘전당 지도’를 켰다.

“······상점?”

이쪽에서 조금 더 앞으로 가면 [상점]이 나온다. 어떤 상점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라도 식힐 겸 물건 구경이나 하자.
그런 생각으로 레이첼은 다리를 움직였다.

[전당 상점]

그렇게 도착한 상점 앞에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끼이이익—
문을 열자마자 어마어마한 넓이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벽면에는 물품이 놓인 선반이 끝없이 늘어섰고, 중앙의 카운터에는 그것을 판매하는 홀로그램 상인이 있었다.

─······마력은 물론, 심지어 검술까지도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때마침 홀로그램이 말했다. 남자 상인의 모습인 홀로그램 앞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레이첼은 까치발로 고개를 기웃거렸지만 카운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 여기서 제일 비싼 건 뭐야.”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꽤나 익숙한 음색이었다. 듣기 싫어도 언제나 들리는, 통통통 튀는 듯하던 목소리. 오래전 아직 큐브 생도였던 시절에······.

─글쎄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파는 것이 전당의 전부가 아니라서요.
“그럼 네가 파는 것 중에 제일 비싼 건 뭔데.”
─‘신화검술’입니다.
“뭐? 야, 난 그딴 거 필요 없거덩? 다른 거 없냐고? 왜 돌 부스러기 같은거 있잖아.”
─돌 부스러기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거라면 바깥에서 주워오시지요.
“뭐 새꺄? 시비 거냐, 너? 없긴 뭐가 없어. 너 뒤져서 나오면······.”

홀로그램과 실랑이를 하는 저 여자는 누가 보아도 채나윤이었다. 채나윤은 홀로그램에 손을 집어넣었다 뺐다 하다가 혀를 차면서 돌아섰다.
그 뒤에는 레이첼이 있었다.

“······어?”

그렇게, 두 사람은 조금은 어색한 재회를 했다. 나름 라이벌이었던 터라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의외로 채나윤이었다.

“오랜만이다?”
“······네. 오랜만이네요.”
“뭐, 야. 넌 아직도 존댓말이냐. 좀 말 좀 놔라, 좀. 짜증나게.”

채나윤은 투덜거리면서 레이첼의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당연히 레이첼 혼자뿐이었다. 채나윤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너네 용병은?”
“저희 용병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레이첼이 의문스런 투로 물었다. 채나윤은 순간 아차 싶은 얼굴이 되었지만, 능글맞게 너스레를 떨었다.

“······뻔하지 뭐. 엑스트라 아니야? 이미 소문~ 소문 다 퍼졌던데?”

레이첼의 눈이 게슴츠레 좁혀졌다.

“······그런가요. 용병은 아직 합류하지 않았어요.”
“그래?”
“사실, 그의 임무는 벌써 끝났어요. 그는 길잡이니까요.”

레이첼은 그렇게만 말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선반을 둘러보며 물건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어떤 것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아름다우신 분이니, 이 꽃이 어떠신가요?
“괜찮아요.”

과연 구매욕을 자극하는, 이른바 지름신을 불러들이는 물건들이 많았다.
그러나 자꾸 뒤에서 알짱거리는 채나윤이 신경 쓰여서 금세 밖으로 나왔다. 채나윤도 휘파람을 불면서 아닌 척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식당]

바로 옆에 식당이 있었다. 마침 배가 고파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좌석은 많았지만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후다닥-
어디선가 부산스러운 인기척이 일었다. 뭔가 해서 보니, 어떤 사람이 제 얼굴을 가림판으로 가리고 있었다. 밥 말아놓은 라면을 식탁에 둔 채.

“한 명밖에 없네. 넌 여기 왜 왔냐? 배고프냐?”

등 뒤에서 채나윤이 물었다. 레이첼은 그쪽을 흘끔 보고 뭔가 말을 하려 했다.
그때 식당의 문이 다시 열렸다.

“어?”

갑작스레 등장한 사람들은 전부 레이첼과 안면이 있었다. 그들도 레이첼을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수호와 이영한을 비롯한 창조주의 성은, 스위스의 라우슬라위퍼, 중국의 쉔 위안 등등······.
꽤 많은 영웅들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레이첼은 묵례를 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응?”

방금까지 라면과 함께 앉아 있던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뭐지, 귀신이었나? 그런데 귀신이 왜 라면을 먹지?

“야, 너 뭐냐? 왜 이리 일찍 나왔어.”

채나윤이 김수호를 노려보며 물었다. 김수호는 큭큭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앙칼진 음색이었다.

“곧 전당 시작한다고 문자가 왔거든······. 그것보다, 레이첼 씨. 진짜 오랜만입니다.”

김수호가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레이첼은 작게 미소를 지어주고서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이제 두 시간 뒤, 전당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전당 중앙의 ‘회의실’로 모여주십시오.]


아침해가 밝자마자 레이첼은 단원과 함께 전당의 [회의실]로 향했다.
걸으면서 회의 전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의견은 ‘그래도 20위 안에 들었으니 어떤 이권 하나는 확실히 요구해야만 한다’는 것으로 통합되었다.

“······와, 이게 뭐야?”
“여기 진짜······.”

그렇게 회의만 생각하며 회의실에 입장한 그들은 한순간에 압도되었다. 차마 벌린 입을 닫을 수가 없었다.
회의실의 풍경은 감히 묘사조차 불가능한 절경이었다. 전당 자체도 화려하고 아득했지만, 결코 이곳에 비할 바는 못될 듯싶었다.
“도대체 뭐야······?”

수정동굴처럼 푸른 공간의 중앙에 거대한 원탁이 놓였고, 그 뒤편에는 여러 사람이 줄지어 앉을 수 있는 스탠드가 있었다. 또한 원탁의 위에는 마름모꼴의 하얀 수정들이 조명 역할을 하며 둥둥 떠다녔다.
띠링띠링—
멍하니 구경하는 사이 스마트 워치 메시지가 도착했다.

[길드의 대표자 ‘두 분’은 원탁에 앉아주시고, 그 외의 단원들은 뒤편의 스탠드에 앉아주시길 바랍니다.]
[한 명은 길드의 대변인, 다른 한 명은 길드 내에서 공적치가 가장 높은 자, 왕실 길드 기준으로는 ‘레이첼’과 ‘Xtra’입니다.]

보자마자 레이첼의 얼굴에 난처함이 번졌다. Xtra는 어젯밤 이후로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저, 부단장님? 저희는 저 스탠드에 앉으면 되죠?”
“······네. 그러면 돼요.”
“옙!”

그러는 사이에 다른 길드가 하나 둘 씩 회의실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 중국, 미국, 일본, 유럽······ 각국에서 손꼽는 길드들의 입장에 왕실 단원들은 저마다 놀란 눈으로 구경하기 바빴다.

“아~ 연하 씨. 참 오랜만입니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친께서는 잘 계시지요?”
“그럼요. 너무 정정하셔서 탈일 정도예요. 워낙 사고를 많이 치시네요.”
“하하. 그거야 뭐. 그것보다 이번에 정협이 거둔 성과, 엄청나더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이번 분기는 정말 어닝서프라이즈였습니다.”
“아, 그런데 놀랄 게 있었나요? 저희는 매번 그렇게 예측했는데.”

유연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사업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드의 부단장이든 단장이든, 모두가 유연하의 눈빛 한 번 받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거, 채나윤 대적자님이 아니십니까!”
“아, 예.”
“정말, 저번 던전 공략에서 그 어마어마한 공적은 저도 잘 봤습니다! 대단하시더군요!”
“아 예. 제가 좀 세요. 많이 세요.”
“역시 호부호자라고······.”

채나윤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 있었으나, 유연하와는 태도가 판이했다.
물론 레이첼로서는 둘 다 마냥 부럽기만 할 뿐이었다.

레이첼은 혼자 뚱하니 앉아서 원탁만 손톱으로 긁적거렸다. 그 어떤 누구도 레이첼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김수호와 살짝 눈이 마주쳤지만, 김수호도 윤승아에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레이첼도 용기를 내어 인맥을 쌓으려던 때.

[안녕하십니까.]
[다들 이제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전당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허공에 텍스트가 떠올랐다. 웅성거리던 장내가 삽시간에 고요해지고, 모두가 각자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그렇게 원탁에 39명, 스탠드에 200명, 총합 239명이 정숙하게 모였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이 전당과 그 내부의 필드를 두고 어떤 ‘시험’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시험 점수에 따라 필드의 배정과 길드의 대우가 달라질 것입니다.]
[또한 최후의 승자는 저, ‘전당’을 가지게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공석이 한 명 있군요. 부상을 당했거나, 서로 다툼을 하셨나 봐요.]

그러자 모든 시선이 레이첼에게 집중되었다. 공석은 단 하나, 레이첼의 바로 옆자리뿐이었다.

“하하하.”
“뭐, 요즘 영국에는 워낙 문제가 많으니. 온 것만으로도 용하지요.”

몇몇 길드, 특히 중국 쪽에서는 상당히 거만한 조소를 보냈다. 레이첼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공석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럼, 곧바로 첫번째 시험 과목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원탁의 중심부에 자그마한 텍스트가 떠올랐다.

[첫 번째 전당 ─ ‘이론 학습’]

이곳에 모인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문장이었다.

< 몽중화 (15) > 끝

< 몽중화 (16) >

“이걸 어떻게 하냐······.”

나는 정령석을 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이 돌은 도대체 왜 이렇게 큰 건지. 농담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달덩이만 하고, 심지어 무게까지 압도적이어서 대단히 처치 곤란이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으니 원.

“행운이 갑자기 왜 이러지.”

행운은 반드시 ‘무조건적인 이득’만을 내어주는 요소다. 대가가 없어야 비로소 행운이라 불리는 것이다.
물론 덕분에 정령석 자체의 스펙은 상당히 좋아졌으나, 이렇게 되어서는 휴대성이 너무 막장이잖아. 분명 ‘운의 축적’까지 발동했을 텐데······.
으브븝— 으브브—
생각하는 와중에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으브브브븝—

“아 참 시끄럽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팔다리가 묶이고 눈과 입이 틀어막힌 애벌레 같은 사람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숫자는 한 아홉쯤 되었다. 교전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녀석들이었다.
으브브븝─ 으브브브븝─!
나는 굳이 확인사살을 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한 말로, 노인의 눈물이 아주 조금이나마 심금을 울렸다. 웬만하면 이곳에 억류해 두었다가 협회의 영웅을 불러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었다.

“죽기 싫으면 가만히 있으세요들.”

그제서야 전부 합죽이가 되었다. 방금까지 ‘죽어도 로드에 대한 정보는 불지 않을 테니 그냥 죽여라—!’고 부르짖던 노인께서도 아주 숨죽인 채 반듯이 누웠다.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으니까.
나는 다시 정령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
[정령석] [전설] [특수]
─정령의 힘이 축적된 돌. 소모된 정령력은 24시간에 걸쳐 완전히 충전된다.
「충전량 : 10,000/10,000」
──────

“······흠.”

아이템 정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득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내 손을 보았다. [어린 드워프의 손재주]가 깃든 손이었다.
혹시, 이 정령석을 깎으면 어떻게 될까. 손재주와 더불어 성흔의 마력으로 정령석을 조각하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행운이 이토록 거대한 정령석을 준 이유가 그것은 아닐까······.

“되려나.”

그러나 정령석의 용적이 마음에 걸렸다. 조각으로 휴대성을 개선하더라도, 정작 용적이 줄어들면 제자리걸음에 불과할 터였다.

“그러면 조금만······.”

나는 성흔의 마력을 조각칼처럼 방출했다.
정령석의 아주 작은 귀퉁이를 잘라낸 뒤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다.

──────
[분리된 정령석] [유물] [특수]
─정령의 힘이 축적된 돌조각. 소모된 정령력은 36시간에 걸쳐 완전히 충전된다.
「충전량 : 50/50」
──────

50 정도면 나쁘지 않다.
나는 정령석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사각······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갉아내었다. 정령석의 부스러기들이 사부작거리며 내려앉았고, 기다란 줄기 위로 아름다운 봉우리가 드러났다.
손바닥만 했던 정령석은 금세 푸른 장미꽃이 되었다.

──────
[정령석의 꽃] [전설] [특수]
─정령의 힘이 축적된 돌. 드워프가 제조하여 보다 고상한 힘을 띄었으며, 성흔의 마력이 깃들었다.
소모된 정령력은 18시간에 걸쳐 완전히 충전된다.

「충전량 : 100/100」
「하급 속성 조화」
──────

결과는 잭팟이었다.


[첫 번째 전당 ─ ‘이론 학습’]

전당의 텍스트가 발표되자 장내가 웅성거렸다. 그만큼 약간은 이해하기 힘든 시험이었다. 자신들은 무력과 기지로 이곳까지 왔는데, 갑자기 이론 학습이라니?

“뭐? 뭐야 저게. 학습? 뭔 개소리야?”

옆에서 재잘거리는 채나윤을 무시하고 유연하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아 씨 잠깐. 설마 여까지 와서 공부하라 이거야? ”

아직 전당은 자세한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시험이 무엇이든, 이론 학습이라는 단어의 뜻과 어긋나지는 않을 터였다.

“장난하나 지금? 이게 뭔, 돌았나 이거.”

유연하는 걱정하지 않았다. 애당초 정수의 해협에는 두뇌파가 두 명이나 포함되었다. 큐브에서 이론 1, 2위를 다퉜던 인재들이었다.
물론 이 사태를 예상했던 것은 아니고, 회의 전략을 짜기 위해 뽑았지만.

“어휴······ 뭐 어쩔 수 없지.”

그때 채나윤이 생각에 잠겼다. 오히려 그 침착함이 유연하의 신경을 건드렸다.
평소 같았으면 수십 수백 번 떠들다 노성까지 내지른 뒤에야 그만두었을 텐데, 심지어 스마트 워치로 필기까지?

“첫 번 째 전 당 은 이 론 학 습.”

소리 내어 읽으면서 홀로그램 키보드를 투둑투둑 두드린다.
유연하는 세상 경악스러운 얼굴이 되어 채나윤을 바라보았다. 근 3년 동안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론이라면 가능성이 있어.”

한편, 레이첼은 혼자서 자신감을 불태우고 있었다. 당장 자신부터가 큐브 이론 1위 출신이었고, 페르민도 겉보기엔 맹하지만 이론으로는 상위권이었으니.
전당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저는 이제부터 전당을 탐구할 수 있는 여러 문제를 낼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풀어내셔야 합니다. 진리 탐구 또한 영웅의 소명이니까요.]
[이제 각 길드에 전용 연구실을 배정해드리겠습니다. 연구실의 크기와 시설은 공적치에 따라 달라집니다. 공적치를 소모하여 업그레이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협력은 자유입니다. 단, 스마트 워치로 ‘파티’를 맺어주십시오.]

띠링띠링— 띠링띠링— 띠링띠링—
동시다발적인 스마트워치 알람이 울렸다.

「레이첼 님 환영합니다.」
「영국 왕실 길드 현황」
「공적 순위 ─ 19위」
「파티 ─ X」
「숙소 등급 ─ 9」
「연구실 등급 ─ 9」

이건 또 뭐지?
자세히 들여다보려는데 전당이 본격적인 문제를 제시했다.

[첫 번째 문제입니다.]
[Q.1]

─런던에는 ‘브리티시 던전’이 있었고, 서울에는 ‘홍옥 던전’이 있었으며, 미국에는 ‘페리쉬메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당에는 위 세 던전과 아주 관련이 깊은 던전이 있습니다. 이 던전의 내부 구조와 마력 농도, 등장 괴수를 계산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문제를 통해 던전의 발생이 정녕 무작위인지, 아니면 계측할 수 있는 현상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순간 레이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 개의 던전이 복합하게 작용하는 문제. 방대한 던전 자료가 필요한, 혼자서는 거의 해결이 불가능한 난이도였다.
[그럼, 다들 남은 시간을 즐겨 주십시오. 다음 회의는 96시간 뒤에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전당의 텍스트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역시나 정수의 해협과 창조주의 성은이 인기였으나, 프랑스의 ‘라 길드 뤼미에르’와 중국의 ‘중화제국’도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사이가 원체 좋지 않은 터라 신경이 쓰였다.

“······.”

그러나 레이첼은 혼자만 외딴 섬이었다. 그 어떤 누구도 레이첼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큐브 이론 1등이라는 타이틀은 하등 쓸모가 없었다.
결국 레이첼이 직접 일어나서 다른 길드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모두 눈인사만 할 뿐 레이첼을 피했다. 아예 못 본 척하는 사람도 많았다.
왕실 단원들은 그런 레이첼을 지켜보며 눈물을 삼켰다.

“레이첼 부단장님?”

그러던 중, 누군가가 다가왔다. 레이첼은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맞이했다.
라이슬로이퍼의 ‘세히트’였다.

“네. 반가워요.”
“하하, 예. 한데 부단장님은 저 문제, 감이 잡히십니까? 저는 영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요즘 학계에서 한창 뜨거운 ‘비슷한 던전’ 문제인 것 같아요. 일 년에 꽤 여러 번, 기존의 던전과 구조가 비슷한 새로운 던전이 발생하는데, 그 관계성을 알아보려는 시도가 많았거든요.”
“오······ 역시 대단하십니다.”
“대단하긴요. 저도 아직 전혀 모르겠어요. 홍옥 던전과 브리티시 던전은 영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대화를 나누는 그들 사이로 어떤 남자가 다가왔다.
‘금순여훈’이었다. 중국의 길드들은 단체복을 맞추어서 옷차림만 보면 딱 알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레이첼 부단장님.”

쥐를 닮은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레이첼을 위아래로 훑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왜인지 음습하게 느껴지는 눈빛에도 불구하고 레이첼은 예의로 그를 대했다.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흐흐. 그게, 저희 금순여훈도 지금—”
“부단장님. 얼른 나갑시다. ······저 사람, 질 되게 나쁘다고 소문 났어요.”

참다못한 페르민과 단원들이 달려왔다. 페르민은 레이첼의 손을 끌어당기며 세히트에게 말했다.

“전당이 배정해 준 연구실로 갑시다.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왕실 길드는 세히트를 비롯한 라이슬로이퍼와 함께 ‘영국 왕실 길드 연구실’에 들어왔다.

“어······ 일단······ 앉으실까요······?”

레이첼이 쭈뼛쭈뼛 손님들을 안내했다.
아닌 게 아니라, 연구실 내부가 너무 초라했다. 삐걱거리는 나무타일에, 다 부서진 의자에, 먼지가 가득한 책상에, 뒤덮인 거미줄에······.
공적 순으로 배정되는 연구실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당장 결원인 Xtra의 공적치가 배제된 왕실 길드는 명백한 최하위권이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누추하네요. 저희도 연구실이 이럴 줄은 몰라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세히트는 별 내색 없이 자리에 앉았지만, 라이슬로이퍼의 다른 단원들은 상당히 실망한 기색이었다.
페르민이 빠릿빠릿하게 나섰다.

“여기 브리티시 던전, 홍옥 던전, 페리쉬메어 던전의 정보를 뽑아 왔어요.”

쿵—! 쿵—! 쿵—!
총 900페이지 분량의 자료였다. 서류 더미 하나가 내려앉을 때마다 레이첼의 어깨가 흠칫흠칫 떨렸다.
왕실과 라이슬로이퍼 단원들도 비슷한 심정이 되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걸 뭐 어떻게 해서 발표해야 한다는 겁니까······?”
“어 뭐야, 발표도 해야 되나요?”
“너무, 너무 많잖아 이거. 큐브에서도 이만큼은 아니었는데.”
“아니, 이런 걸 우리가 왜······.”

그러나 영웅에게 필요한 소양이었다.
물론 현대의 던전 예측은 대부분 분석관이 담당하지만, 당장 던전 외부에서 계측한 결과가 내부에서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고, 상황이 변화하여 던전 안에서 다시 계산을 해야하는 상황도 잦기 때문이다.
레이첼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세히트 경은 저희와 협력, 파티를 맺으실 생각이신가요?”
“그럼요. 레이첼 부단장은 큐브에서도 손꼽히는 이론 천재였지 않습니까. 오히려 저희가 부탁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세히트 혼자만의 독단인 듯싶었지만, 어쨌든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내밀었다.
세히트가 설핏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영국 왕실 길드’와 ‘라이슬로이퍼’의 파티가 결성됩니다.]

레이첼과 세히트의 동맹이 결성되었다.
왕실 단원들은 싱글벙글하였고, 라이슬로이퍼들은 못마땅한 듯했지만 리더의 뜻을 따랐다.

“그럼 저는, 혹시 다른 자료가 있나 한 번 더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페르민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라이슬로이퍼 정도면 다행이네. 왕따될 줄 알았는데.”

페르민은 룰루랄라 복도를 걸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으면 상점이 나오고, 거기서는 정보도 구매할 수 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아니, 레이첼도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잖아. 레이첼은, 아마 네 얼굴을 기억할 거다. 네가 누구인지, 그곳에서 어떤 소중한 사람을 잃었는지도.
─그래도 레이첼은 20년에 동안이나 괴로워했어. 그것만으로도 많이 불행한 녀석인데, 이 정도면 용서해 줘도 되지 않나.
─난 공주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거든.

Xtra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정말 공주님과 깊은 연관이 있는 사람인 걸까?
아니면 그냥,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주워들은 사생팬에 불과한 걸까.
레이첼은 그날의 대화를 잊으라 하였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사생팬이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페르민은 굳은 얼굴이 되어 멈춰섰다. 희미하게 남은 마력의 기운이 발목을 사로잡았다. 불길하고 음습한, 짙게 가라앉은 원한의 향이었다.
꿀꺽—
옥죄는 긴장 속에, 침을 삼킨 페르민이 복도를 돌아보았다. 인기척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곳에 아른거리는 잔향은 확실했다. 언젠가 피부로 느껴보았던 종류였다.
랭커스터가 이곳에 있었다.


──────
[정령석 목걸이]
─정령의 힘이 축적된 목걸이. 드워프가 제조하여 보다 고결한 힘을 띄었으며, 성흔의 마력이 깃들었다. 소모된 정령력은 12시간에 걸쳐 완전히 충전된다. 운용하는 원소의 속성에 따라 색이 변한다.

「충전량 : 1,000/1,000」
「중급 속성 증폭」
「중급 속성 보호」
──────

[정령석 아대]
─정령의 힘이 축적된 아대. 드워프가 제조하여 보다 강인한 힘을 머금었으며, 성흔의 마력이 깃들었다. 소모된 정령력은 12시간에 걸쳐 완전히 충전된다. 운용하는 원소의 속성에 따라 색이 변한다.

「충전량 : 1,200/1,200」
「중상급 속성 조화」
「중급 정령 투사」
──────

“······후.”

성흔의 마력을 전부 소모하여, 액세서리와 장비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령석은 아직도 80% 이상 남아 있었다.

“아 힘들어 뒤지겠네······.”
온몸을 정령석으로 둘러도 전부는 못 쓸 것 같았다.
그래도 한 일주일 정도 매달리면 처리할 수 있겠지.

“어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던 때였다.
띠리링— 띠링— 띠리— 띠— 띠—
스마트 워치가 무슨 모스부호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마커스 : 근데 이거 이론이 뭡니까 도대체. 아 머리 아파 죽겠네. 3페이지도 해석 못 하겠어요.]
[케일 : 넌 큐브 다녔다는 애가 그것도 모르냐.]
[마커스 : 씁. 난 무력파였거든? 전 밖에 나가서 공적치나 쌓을게요 부단장님.]
[레이첼 : 네.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에요.]
[마커스 : Yes sir! 들었지? 나처럼 머리 딸리는 애들은 밖으로 나와라.]

나도 모르는 사이 길드 단체 대화방에 초대되어 있었다.

“뭐야 이거?”

그런데 이것 말고도, 전당이 내게 보낸 메시지도 눈에 띄었다. 정령석 조각에 너무 집중해서 워치의 알림도 느끼지 못한 듯했다.

[첫 번째 전당 ─ ‘이론 학습’]
[Q.1]
─런던에는 ‘브리티시 던전’이 있었고, 서울에는 ‘홍옥 던전’이 있었으며, 미국에는 ‘페리쉬메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당에는 위 세 던전과 아주 관련이 깊은 던전이 있습니다. 이 던전의 내부 구조와 마력 농도, 등장 괴수를 계산하십시오.

“이론 학습?”

전당에 들어가질 않아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론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없을 리가 없다.

“흠.”

나는 설정 열람으로 ‘브리티시 던전’, ‘홍옥 던전’, ‘페리쉬메어’를 검색했다.
관련 정보가 모두 열람되었다.

“이게 어려운 문제인가?”

이 세 던전의 연관성. 그리고 이 던전들과 아주 관련이 깊은 ‘이름 모를 던전’의 구조·마력농도·등장 괴수를 계산하는 것.
나는 권능의 힘을 빌려 계측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경악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 문제에 자그마치 3분이나 소모하다니.
이만큼 어려운 문제는 근 5년 만에 처음이었다.

< 몽중화 (16) > 끝

< 몽중화 (17) >

이틀 정도가 지나자 정령석 세공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막의 독수리]와 [검은 연꽃의 활]에 정령의 문양을 돋을새김했고, 정령석 자체에 탄력성을 부여하여 의류에도 적용했다.
그렇게 아대, 외투, 신발, 목걸이, 반지 등등······ 이러다 쇳독 오르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도배했지만, 정령석을 다 소모하지는 못했다. 딱 축구공 크기 정도가 남았다.

“나머지는······.”

역시 레이첼에게 주는 게 맞겠지. 나는 정령석을 배낭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심히 만들었으니 이제 시연할 시간이었다.

나는 장비를 모두 착용한 뒤 스트레칭을 했다. 국민체조 이외의 준비는 필요 없다. 사막의 독수리도 성흔에 보관한 채 그저 손만 쭉 뻗었다.

화아아아······.

내가 겨냥한 지점, 선 자리의 세 보 앞에서 상승 기류가 일어났다. 흔들리던 기류는 곧 큐빅처럼 응집되어 일렁였다.
나는 그 바람의 도형에 화(火)속성을 담았다. 그러자 대기 속에서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점화원이나 가연물 따위 없이, 순수하게 홀로 타오르는 화염이었다.
그렇게 형성된 불의 바람을 바깥으로 흩뿌렸다. 바람은 고리를 이루며 퍼져나가 주변을 감쌌다.
이번에는 그 고리에 땅의 속성을 부여했다. 유체였던 고리가 고체의 성질을 띠며, 강고한 방벽으로서 공간을 구획했다.

“괜찮네.”

누군가 본다면 도깨비불이라 기함할 광경.
정령석의 활용은 이만큼이나 무궁무진하지만, 아쉽게도 레이첼처럼 정령을 불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레이첼과 나는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정령석의 힘을 빌려 쓰는 것뿐이고, 레이첼은 정령과 소통하며 함께한다. 범주로 구분 짓자면 레이첼은 정령사, 나는 원소술사쯤 되겠지.
사실 이 정령석도 나보다는 레이첼이 쓰는 것이 훨씬 효율이 좋다.

“······어휴.”

그런데 돌연 한숨이 나왔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갑자기 회의감이 일었다.
에반젤이 보고 싶다.
물론 에반젤도 충분히 머리가 커서 걱정은 안 되지만, 오히려 잔소리꾼이 없다며 신나서 놀다가 시원하게 늦잠이나 때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그립다.
그리고, 이런 감정의 기복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나는 알고 있다.
이 전당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전당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내가 어떤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마 그러겠냐.”

그러나 헛웃음으로 털어냈다.
시스템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나는 이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것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고, 변할 수도 없는 사실이다.
나는 다시 가만히 앉아 스마트 워치의 갤러리를 켰다.
에반젤의 사진을 보려했는데, 레이첼의 사진이 여러 장 눈에 띄었다.

“173장이나 있네.”

베스트 컷이다 싶으면 찍었고, 실제로 레이첼 팬카페를 둘러보다가 좋은 사진이 있으면 저장했다.
내가 이걸 왜 모았는지는 모르겠다.
굳이 설명하자면, 아마도 동정심 때문이 아닐까.

참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레이첼은 나에게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내 설정 속의 그녀는, 그리고 현재의 그녀는 나를 안쓰럽게 만든다. 그녀의 행동원리가, 그녀의 신념이, 그녀의 과거가 애처롭다.

그러나 동정은 결코 좋은 감정이 아니다. 다만 감정의 기생충에 불과하다. 동정은 결코 애정이 될 수 없으면서, 어떤 착각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기에 나는 레이첼을 보면서 불안한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내가 ‘이 세계의 어떤 누구에게도 느끼지 못한 감정’을 착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옘병.”

욕설을 뇌까리며 노면에 벌러덩 누웠다.
그런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레이첼과 막대 내기를 하던 때가 갑자기 떠올랐다.
엿새 전인가, 내 행운은 그 내기에서도 어느 순간 발동했고, 레이첼은 뜨아앗-! 괴성을 내지르며 발을 헛디뎌 정수리부터 땅바닥에 처박힌 일이 있었다.

“푸, 흐흐, 아. 푸흐흐흐······.”

되새길수록 우스운 장면이어서, 나는 푼수처럼 웃었다.


전당의 영웅들은 옛 향취를 느끼고 있었다. 오래전 아카데미 시절처럼, 그들은 펜과 컴퓨터를 붙든 채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나 명쾌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고, 대부분의 길드는 포기하거나 상점으로 향했다. 상점의 컴퓨터로 접속할 수 있는 ‘전당넷’에서는 많은 논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홍옥 던전]
─대한민국 강원도 홍천군에 발생한 대규모 던전. 내부에 붉은 유황이 가득하고, 마그마가 흘러내린다. 유황어, 불가오리, 파이어라냐(Firenha) 등 중급 5품 이상, 상격 5품 이하의 괴수들이 마그마 속에 서식하고 있었다.
─초입부의 대기 중 마력 농도는 약 2%로 측정되었으나, 심처(深處)의 농도는 4.6%까지 치솟았다. 고농도 마력에 오래 노출될 경우 호흡 문제는 물론 마력 폭주의 가능성도 있어 한동안은 금지되었으나······.
─────────

레이첼도 공적치로 위 정보들을 구매했고, 깊이 파고들었지만 영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홍옥 던전. 브리티시 던전. 페리쉬메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 던전은 서로 관련이 없는 것 같았다.
레이첼 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고작 48시간 만에 벌써 절반 이상이 나가 떨어졌을 지경이니.

“하아······”

레이첼이 한숨을 내쉬며 시계를 보았다.
3시 45분.
새벽의 연구실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차마 숙소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라우슬로이퍼와의 동맹에서 자신의 의의는 두뇌였다. 내세울 것이 ‘큐브 이론 1위 졸업’밖에 없는 지금, 조금이라도 더 유의미한 성과를 내야만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더 고뇌하던 레이첼은 결국 답답함에 스마트 워치를 들었다.
환기라도 할 겸 전당 커뮤니티를 둘러보는데 [영국 왕실 길드원 목록]에 [Xtra]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때, 딱 타이밍 좋게 Xtra가 통신을 걸어왔다.

[Xtra : 너희, 이론 학습을 하고 있다고 그랬나.]

레이첼은 흠칫 놀랐다.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 걸까? 괜히 무안했다.

[나 : 네?]
[나 : 네. 저희는 지금 이론 학습을 하고 있습니다.]
[나 : 그건 그렇고, 무사하셨군요 ๑ ◕‿‿◕ ๑]
[Xtra : 이론에 이걸 참고해라.]
[나 : 네 ㅇ ︿ㅇ?]

이모티콘을 넣는 데만 30초가 걸렸건만. Xtra는 시크하게 잘라내더니 파일을 전송했다. 상당히 용량이 큰 파일이었다.
뭐지? 싶어서 보려는데 Xtra의 문자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Xtra : 그리고, 그때 너희를 습격했던 녀석들 중 아홉 명은 살려서 포박해 두고 있다.]

“아······.”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역시 너무 무르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습격한 자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심하다니······ 레이첼은 억지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Xtra : 그래서 말인데, 너 이 아홉 명의 이름을 알고 있나?]

Xtra가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꽁꽁 포박된 아홉 명의 얼굴이었다.
레이첼은 흠칫 떨었지만, 곧 그들의 신상을 꼼꼼하게 적어서 보냈다.

[Xtra : 알겠다. 이제 쉬어라.]

이것으로 대화가 끝난 듯했다.
하지만 레이첼 입장에서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정도는 있었다.

[나 : 그런데, 저희 내기 아직 안 끝난 거 아시나요? ( ง •_•) ง]

내기는 Xtra와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나,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레이첼은 한 5분 정도 워치를 들여다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흐흠.”

일단은 받은 파일이나 확인하지 뭐. 어차피 내기, 재미도 없는 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니.
별생각 없이 파일을 열었다.
처음에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첫 장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이론들을 가볍게 풀어놓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눈동자가 내용을 정독할수록, 그녀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이윽고······ 연구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마커스가 들어왔다.

“끄악!”

발작하듯 놀란 레이첼은 스마트 워치부터 껐다.
마커스가 소리쳤다.

“부단장님! 회의실로 모이래요!”
“네?”
“어서 나오세요! 중간점검이래요!”
“갑자기 왜-”

레이첼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밖으로 나갔다. 어느덧 아침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마커스는 ‘전당 회의실’로 그녀를 안내했다.

이미 많은 길드가 모여 있었다. 미국의 ‘더 제너럴’과 ‘레이크 포드’, 중국의 ‘중화제국’과 ‘금화여순’ 등등, 레이첼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 원탁에 앉았다.

“거, 왕실 길드는 도대체 언제까지 혼자입니까? 옆자리 시리시겠어요.”

어디선가 비아냥이 흘러들었다. 역시나 프랑스 ‘라 길드 뤼미에르’의 부단장 슈퐁이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화가 나지 않았다.

“아는 것이 없거나,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원래 다 그런 법이지요. 어떻게 용병의 공적치가 가장 높답니까?”

슈퐁과 동맹을 맺은 중국의 ‘중화제국’도 끼어들었다.
레이첼은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호호호호.”

괴상한 조소에도 대응조차 하지 않은 채 다시 스마트 워치를 켰다.

[자, 그럼 모두 모였으니 중간 점검을 시작하겠습니다.]
[문제를 완전히 풀었거나, 어느 정도까지 풀은 길드가 있다면 위의 단상으로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오늘 점검의 결과는 전 세계의 인터넷으로 배포가 될 예정입니다.]

원탁의 정면에 크리스탈 단상이 돋아났다. 밝고 찬연하게 빛나는 그곳을 바라보며 레이첼은 고민했지만, 차마 나설 수가 없었다.
Xtra의 이론이 아무리 파격적이었다고 한들, 정작 자신이 그 이론의 초입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니······.

[그런데, 왕실 길드는 아직까지도 혼자시군요.]

돌연 전당이 활자로 말을 걸어왔다.
푸흡- 푸흐흐- 크흐흠-
장내에 동시다발적인 조소가 울렸다. 레이첼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웬만하면 화해해 주세요.]

전당이 자신을 놀리고 있었다.
짓궂은 녀석.

[음. 아무튼.]
[아직 아무도 없으신 듯한데······ 혹 이론의 전개가 맞는지 틀리는지 궁금하시다면, 먼저 저에게 파일로 보내주셔도 됩니다.]

그 부분은 상당히 혹했다. 아무런 리스크 없이 이 파일만 주면 끝나는 것이니까.
레이첼은 스마트 워치와 전당의 텍스트를 번갈아서 보았다.

[아무도 없으신가요?]

전당이 재차 물었다.
눈을 꾹 감고 필사적으로 짱구를 굴리던 레이첼은 결국.

[실망입니다. 그럼 중간 점검은 이만 여기서-]

중간 점검이 끝나기 직전에, 번쩍 손을 들고 말았다.


한편, 리텔슨은 주군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주군께서 가장 절호의 순간에 찾아와 저 놈을 단죄하리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믿음은 둘째치고, 어찌나 세게 몸을 묶었는지 도통 움직일 수가 없었다.
리텔슨은 눈이라도 뜨고 싶어서 노면에 제 안대를 비볐다. 모래가 면상을 짓이기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비비적비비적-

그렇게 수천번을 반복한 끝에, 리텔슨은 마침내 안대를 풀어내었다.
어두웠던 시야가 한 순간에 밝아졌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가만히 서 있는 Xtra가 보였다. 저 지독한 놈은 아직까지도 방독면을 벗지 않았다.
리텔슨이 자신의 인공안구를 발동시켰다. 이것으로 놈의 모습을 녹화하고 주군에게 보내면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일 터였다.

그런데, 저놈은 도대체 뭘 하려고 저렇게 서 있는 것인가?

리텔슨이 고민하던 찰나, 놈이 갑자기 휙- 손짓을 했다. 그러자 매서운 돌풍이 일어났다.
놀라움은 그다음에 있었다.

화르륵—!

바람의 결을 따라 화염이 타올랐다. 화염은 역류하는 폭포처럼 위로 솟구쳤다. 그렇게 하늘에 구름처럼 응결되었다가, 다시 비처럼 내렸다.
불씨가 노면을 태우기 시작했다.
리텔슨의 등골에 소름이 올랐다.
지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무슨 차원의 힘이란 말인가? 저 바람은 어찌 불씨를 거느리고, 저 불은 또 어찌 하늘에서 내리는 것인가? 저것이 정녕 한낱 용병에 불과한 녀석의 소행이란 말인가?
리텔슨은 그 광경을 노려보며 일초의 낭비도 없이 녹화했다.

“······!”

돌연 놈이 뒤를 돌아보았다. 리텔슨은 눈을 꼭 감았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울렸다. 소리에 맞춰 심장이 뛰었다.
드르르륵—
무엇인가 솟아올라 일대를 뒤덮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뒤이어 Xtra의 발소리가 멎었고, 리텔슨은 눈을 떴다.
정체불명의 토벽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랭커스터는 안 올 거다.”

서늘한 중저음이 가라앉았다. 리텔슨은 흠칫 놀라 위를 보았다. 방독면을 쓴 Xtra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아냐면, 함 봐봐. 너희 주군의 간부들이 통신한 내역이거든 이게.”

Xtra는 김호섭이 해킹한 랭커스터의 회선 내역을 보여주었다.
김호섭과의 직통은 개인 위성으로 연결된 덕분에, 시간은 좀 오래 걸리지만 중앙아시아에서도 정보를 받는 것이 가능했다.

[리텔슨과 녀석들은 어떻게 할까요.]
[놔두어라. 어차피 어중이 떠중이일 뿐이다.]
[놈들이 우리를 밀고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놈들이 죽지 않고 찾아온다면, 네가 직접 목을 잘라라.]

“하, 이런 조작을 내가 믿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Xtra가 입을 막은 헝겊을 빼내자마자 리텔슨은 피토하듯 외쳤다. 스마트 워치로 침이 튀었다. Xtra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믿어도 돼. 어차피 지금, 당신이 살아 있는 건 레이첼 덕분이니까.”
“뭐라?”
“느그 대장은 너희를 방치하는 걸 넘어 너희를 죽이려고 하는데, 정작 너희가 죽이려 했던 레이첼이 너희를 살려주라 하신다고.”
“······이 미친놈이! 어딜 그런 거짓부렁을 씨부리느냐!”

레이튼은 들을 의지도, 듣을 생각도 없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된 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버렸다.
Xtra는 작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계속 여기서 기다려. 아마 일주일, 이주일 정도. 이 토벽 안에서는 적어도 괴수 밥이 되지는 않을 거다.”

그때 레이튼은 Xtra가 자신에게만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눈치챘다.
노인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좌우를 보았다. 자신처럼 묶인 동포들이 숨을 죽인 채 Xtra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이 포박은 알아서 풀릴 거고, 랭커스터는 너희가 죽은 줄 알겠지.”

잠시 말을 멈추더니, Xtra가 남은 아홉 명의 이름을 읊기 시작했다.
제니의 아버지 ‘레이튼’,
바비의 어머니 ‘데이지’,
엘리스의 부모 ‘리암’과 ‘스탠’
루시의 남편 ‘제론’,
릴리의 남편 ‘리오’
토비의 아내 ‘소나’,
엘리와 라이언의 아들 ‘케일럽’,
덱스터의 형 ‘오스카’······.
“레이첼은 너희 이름을 전부 기억하고 있어. 평생을 마음속에 둔 채 살아가고 있지.”
“속, 속지 마라, 속지 마라 이 녀석들아! 듣지 말아라! 귀를 막아라!”

레이튼이 그들에게 외쳤다. 그렇게 바락바락 소리치면서도, 레이튼은 자신의 마음 속에 어떤 의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Xtra는 레이튼을 그대로 둔 채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죽은 척하고 랭커스터와 연을 끊을 수 있고, 다시 랭커스터에게 돌아가 이 은혜를 죽음으로 되갚을 수도 있고, 레이첼에게 돌아가 서로 화해를 할 수도 있어.”

Xtra가 일어나 등을 돌렸다. 그는 우묵한 토벽의 한쪽에 문을 만들어냈다.

“전부 너희 선택에 달렸지.”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두컴컴한 토벽 속에 적막이 가라앉았다. 고작 한 명이 사라졌을 뿐인데, 공간은 텅 빈 듯 공허했다.
잔당들은 서로 아무 말 없이 있었다. 자신들이 무엇에 속았던 것인지, 정말 속았던 것인지, 아니면 속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 몽중화 (17) > 끝

< 몽중화 (18) >

레이첼이 손을 든 순간 장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왕실의 단원들도 세상 어리둥절한 얼굴로 레이첼을 보았다.
그만큼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행동이었다.

[영국 왕실 길드의 대변인 레이첼.]
[제출할 만한 결과물이 있으십니까?]

전당이 물었다. 레이첼은 손을 내리고 심호흡을 했다.

“예.”

고개를 끄덕이자 장내가 술렁였다.
영국과의 관계가 험악한 길드들은 애써 그녀를 비웃었지만, 혹시나 하는 조바심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렴 레이첼은 날고 기는 인재들이 모인 큐브에서도 이론 1위를 차지한 천재였으니······.

“파일로 보관해두었습니다.”

레이첼의 말에 전당이 대답했다.

[그럼, 전송해 주시길 바랍니다.]

레이첼은 Xtra의 파일을 그대로 전당에게 전송한 뒤 말했다.

“용병 Xtra가 작성한 해답입니다.”

이 업적을 굳이 자신의 것으로 속이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속일 수도 없었다.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답인데 어떻게 속이기까지 한다는 말인가.

“······용병?”

그러자 전당의 눈빛들이 대부분 의심으로 돌아섰다. 지켜보던 페르민도 약간은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Xtra가 실력이 출중한 용병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이론적인 사안까지 도움을 받다니?

“거 용병에게 너무 의존하는 거 아니오?”

프랑스의 슈퐁이 불편하다는 투로 뇌까렸지만 레이첼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슈퐁의 말은 일말의 덧셈이나 뺄셈도 없는 사실이다. 레이첼 역시 매번 받기만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을 이유로 도움을 내팽개치기에는, 영국의 상황이 너무나도 절박했다. 뻔뻔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Xtra의 이론을 확인하겠습니다.]

전당은 그렇게 잠시 동안 아무 말없이 있었다.
장내는 침묵한 채 전당의 대답을 기다렸다.
모두가 정답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특히 유연하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 긴장했다.
정협은 이틀 밤낮을 지새웠음에도 아주 작은 실마리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이윽고, 전당은 대답했다.
회의실에 모인 대다수의 예상을 배반하는 결과였다.

[완벽합니다.]
[중간 점검에 이렇게 완벽한 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요.]

“뭣!”
“아니 그게-”
“무슨, 아니, 잠깐 전당 양반!”

몇몇 길드는 바락 소리를 질렀고, 몇몇 길드는 가만히 있었으며, 나머지는 크게 놀랐다가도 오히려 다행이라는 얼굴이 되었다.
사실 지금까지 이론을 붙들고 있었던 길드는 채 열을 넘지 않았다.
어차피 통과할 수도 없는 시험, 생각해 보면 제일 최하위인 영국이 공적을 가져가는 쪽이 훨씬 이득이 아닌가?

[이것은 Xtra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작성한 것입니까.]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공적치는 전부 Xtra에게 주어집니다. 더해서, 영국 왕실 길드에게는 ‘두 번째 시험을 가장 먼저 선택하고 입장할 수 있는 권리’를 드리겠습니다.]
[또한 왕실 길드가 원한다면, 동맹 길드인 스위스의 라우슬로이퍼에게도 비슷한 혜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선점권을 부여하겠다는 말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알고 있는 길드, 특히 프랑스의 슈퐁은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지껄이려 했지만, 레이첼의 다음 질문에 곧장 합죽이가 되었다.

“그렇다면, 원하는 길드의 순서를 늦추는 것도 가능한가요?”

[물론입니다.]
[대신, 그렇다면 동맹 길드인 라우슬로이퍼에게는 어떤 혜택도 줄 수 없습니다.]

“······.”

프랑스와 중국의 두 대변인이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레이첼이 ‘할 말 없으신가요?’라고 묻자, 그제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옅게 웃었다.
먼저 중화제국의 부단장 ‘류 웨이’가 말했다

“아니 다름이 아니라······ 여기, 슈퐁 부단장님이 먼저 저희를 선동했습니다. 저희 중화제국은 언제나 영국 왕실 길드를 존중하고 있었습니다.”
“뭐, 뭐라고요? 당신이 먼저 꼴사납다면서!”
“아니, 내가 언제? 증거 있으십니까? 내가 레이첼 부단장 팬이라니까 지가 먼저 이상한 루머로 이간질했으면서.”
“뭐라? 영웅이면 영웅답게······.”

그렇게 서로 동맹이었던 두 길드가 투닥거리는 사이, 전당이 말했다.

[오늘 회의는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
[영국 왕실 길드의 성공으로, 왕실 길드의 숙소가 업그레이드됩니다.]
[그리고 Xtra의 해답은 전당넷을 비롯한 전 세계의 인터넷에 논문의 형식으로 배포하겠습니다. 물론 논문의 저작권은 전부 Xtra에게 귀속됩니다.]
[이제, 왕실 길드를 제외한 다른 길드의 두 번째 시험은 ‘144시간’ 뒤에 시작합니다.]
[그때까지 자유시간을 즐겨주십시오.]


레이첼은 두 번째 시험에 먼저 입장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지만, 문제 풀이로 얻은 어마어마한 공적치는 반영할 수 없었다. 그 전부가 Xtra에게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전당에 입장하지 않는 이상, 왕실 길드는 여전히 19위에 불과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걸 이렇게 풀 수 있답니까?”

페르민이 경악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Xtra의 해답은 대저 빈틈이 없는 완벽한 논문이었다.
레이첼도 답안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궁금해요.”

그렇게 답하는 레이첼의 눈에는 동그란 안경이 씌워져 있었다. 슈퐁과 류 웨이를 겁박해서 얻어낸 [계산과 사고의 안경]이었다.
논문을 읽다가 연산이 보이면 자동으로 계산하고, 문장이나 단어도 쉽게 해석할 수 있게끔 보조하는 이 안경은 답안 이해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외부에 자문을 구했을까요? 그때 보면, Xtra는 무슨 헬리콥터 같은 것을 타고 다녔잖습니까. 참, 저는 그 헬기 같은 게 Xtra의 재능 같습니다.”
“······.”

레이첼이 주변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사실, 그녀도 Xtra가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굳이 대한민국까지 가지 않아도, 멀지 않은 곳인 ‘판데모니엄’에도 전문가들은 상주하고 있으니. 특정 이론에 병적으로 집착하다가 결국에는 마인까지 되어버린 미친 과학자들 말이다.

“음······.”

무엇인가 말하려던 레이첼은, 문득 언젠가 자신을 이론으로 압살했던 김하진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 기억은 김하진을 닮았던 Xtra의 눈매와 연결되었다.
정말 한없이 낮은 가능성이지만, 자꾸만 우연처럼, 혹은 운명처럼 어떤 아귀가 서서히 맞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잠깐 스파크처럼 튀었다가 사그라들었다.

“히야~ 이거, 보면 볼수록 빈틈이 없네요.”

페르민이 종이로 인쇄한 논문을 탁- 손가락으로 튕기며 감탄했다.
Xtra의 해답에는 세 개의 핵심이 완벽했다. 일단 세 던전의 ‘연결고리’를 찾아냈고, 그 연관이 성립되는 ‘조건’을 발견했으며, 이 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방향’까지 제시했다.

“이거, 인터넷으로 발표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쯤 난리 났겠는데요.”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이고 안경을 벗었다.
Xtra의 해답은 확실히 대단했으나, 이제는 두 번째 시험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그것보다, 슬슬 나갑시다.”
“······네.”

페르민은 약간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곳에서 감지한 랭커스터의 잔향을 그녀는 여태 숨기고 있었다. 말을 한다고 해도 어떻게 해결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레이첼의 눈치를 살피던 페르민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부단장님, 그래서 그런데······ 동맹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어떻게 하다니요?”
“예? 아, 예. 뭐 그쪽도 저희한테 바라는 게 있지 않나······.”
“저희보다 나흘 늦게 입장하는 쪽으로 했어요.”

레이첼은 라우슬로이퍼와 동맹 관계를 유지한 채 두 번째 시험에 돌입하기로 했다.
다만 이번 연구에서 라우슬로이퍼의 도움은 하나도 없었으니, 그쪽은 사흘 늦게 입장하는 것으로 조정했다.
페르민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우슬로이퍼 정도면 안심이었다.

“가능하다면 Xtra의 의견도 묻고 싶었지만, 그는 이곳에 없으니까요.”
“네네. 그렇죠.”

그때, 시계가 정각을 알렸다. 레이첼과 페르민은 긴장한 눈으로 시계를 보았다.
이내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 밖으로 나갔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왕실 단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다른 길드에서 보낸 염탐꾼들의 인기척도 느껴졌다.

“갈까요?”
“예. 뭐, 쥐새끼들이 많은 것 같은데, 보라고 하죠.”

왕실 길드는 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복도를 걸었다. 첫 번째 시험에서 대승한 덕에, 그들의 걸음걸이는 저마다 자신감이 넘쳤다.

두 번째 시험장은 꽤나 먼 듯 전당의 안내를 이십 분이나 따르고 나서야 도착했다.

[시험장]

작은 문 위에 문패 하나만 덜렁 붙어 있을 뿐, 꽤나 초라한 시험장이었다.
단원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전당이 스마트 워치의 기능을 빌려서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영국 왕실 길드는 ‘두 번째 시험’을 선점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떤 필드를 선택할 것인지, 이제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서 결정해 주십시오.

전당의 기계음은 어딘가 섬뜩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어으 깜짝이야.”
“아 귀신인 줄 알았네.”

레이첼과 단원들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묘한 공간이었다.
사방이 온통 새하얗고, 공간으로서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좌우로 가없이 뻗은 공동에 거대한 문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두 번째 시험, ‘기억의 연쇄’입니다. 이곳에는 총 40개의 문이 있습니다. 원하는 문을 선택하여, 해당 스테이지의 클리어 조건을 깨우치고 클리어하시면 됩니다.
─첫 번째 시험의 특전으로, 하위 70%에 해당하는 필드의 문을 닫겠습니다.

쿵- 쿵- 쿵-
40개의 문 중에 30개가 사라졌다.
나머지 열 개 남은 문이 상위 30%인 듯했다.

“다들, 어디로 할까요?”
“저희는 뭐 당연히 부단장님의 선택에 따릅니다.”

레이첼은 열 개의 문에 각자 다르게 쓰여진 문패들을 보며 고민했다.
[굳은 기억], [삶의 파편], [앳된 속내]······ 묘하게 시적인 것들 중에 어느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꿈속의 고향]
저 문장이 자신을 부르는 듯했다.
레이첼은 홀린 것처럼 그 앞으로 다가섰다.

“꿈속의 고향이요?”

페르민의 물음에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꿈속의 고향]을 선택합니다.
─한 명 한 명씩 차근차근 입장해 주십시오.

꿈속의 고향, 그 문이 열렸다.
레이첼은 뒤를 한번 돌아보고 먼저 앞장섰다.
한 발자국을 내디뎠을 때, 어떤 위화감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등골이 바로 서고 홍채가 확장되었다. 어떤 밝은 빛이 온몸을 휘어잡았다. 어루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쥐어짜는 것 같기도 한 손길이었다.
레이첼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
서서히 수축되는 동공 너머, 온통 다른 세상이 그녀를 맞이했다.
길거리에 온갖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레이첼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거리의 한복판이었다. 좌우로 상가들이 높게 솟았고, 노점상들이 길거리에서 음식을 팔았다.

“여기는 또 어디······?”

옷집, 식당, 화장품샵 등의 상점들을 멍하니 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통과했던 문은 이미 사라졌고, 단원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순간 온몸에 오한이 올랐다.

“······푸. 정신, 정신.”

레이첼이 도리질을 쳤다. 긴 머리카락이 양 볼을 따끔하게 스쳤다. 그 감각 덕분에(?) 레이첼은 침착함을 되찾았고, 이 또한 시험이라 생각하며 앞으로 걸었다.

다행히 세계의 언어는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이 한국어를 쓰고 있었다.
어, 뭐지? 이상한 외계어 같은 것도 가끔씩 들리네······
그렇게 주변을 탐색하며 걷던 레이첼의 시야에, 어떤 이상한 기둥이 하나 나타났다.

[4호선 424]
[명동]
[출입구 8 EXIT]

“······명동?”

명동이라고?
설마, 그럴 리가 없는데?
명동은 자신도 자주 가보아서 알고 있다.
온갖 마재료와 기구들을 판매하는 마법의 메카. 10억을 가지고 와도 한 시간 만에 탕진할 수 있다는 거리가 ‘명동’ 아니었던가.

“도대체 무슨······.”

레이첼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한 채 터덜터덜 걸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만 그녀를 힐끔거렸다. 옷차림이 왜 그러냐고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레이첼은 그들을 모두 무시하고 걸었다.

꼬르륵—

그렇게 한 삼십 분 정도 지나니 배가 고팠다. 근처에 진동하는 핫도그와 오징어 냄새 때문인가?

지글지글—

레이첼은 호떡 노점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주머니를 뒤적였다.
역시 돈 따위는 없었다.

“······배고파.”

아니, 여기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가이드 라인도 없이 다짜고짜 떨어뜨려 놓으면······
하긴, 전당은 분명 ‘클리어 조건’조차 알려주지 않고 몸소 찾으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시험의 일환이라는 거겠지.
레이첼은 가만히 서서 행인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뭘까.”

그들은 전부 네모난 기계를 쥔 채 걷고 있었다. 레이첼은 그것을 주의 깊게 보았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막 네모난 기계 안에 화면이 있고, 그 화면을 토독토독 두드리는 것을 보면······.
스마트폰이구나!
그런데 왜 다 큰 성인들이 스마트폰을 쓰고 다니지? 스마트폰은 워치를 다루기 힘든 아가들 전용일 텐데.

꼬르륵—

그때 다시 배가 울었다. 통증에 가까운 굶주림이었다.

“끄으으응······.”

레이첼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당장 두 시간 전에 식사를 마쳤는데 이렇게 배가 고플 리가 없을뿐더러, 아무리 생각해도 공기 중에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은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니 더욱 선명해졌다.
들숨이든 날숨이든.
정교한 심법이든 평범한 호흡이든.
어떻게 숨을 쉬어도, 마력이 채워지지 않는다. 더 정확히, 몸 안으로 ‘흘러들지 않는다’.

“······이런.”

사태의 심각성은, 그제서야 무시무시한 실체가 되어 들이닥쳤다.
대기 중 마나 농도가 0%에 가깝다는 것은—
‘현대인’ 레이첼의 입장에서는 대재앙에 가까운 비극이었다.


한편, 나는 풀숲에 몸을 숨긴 채 전당의 입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들어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영 긴장이 되었다. 저 안에는 레이첼뿐만 아니라 김수호, 유연하, 채나윤, 이영한, 신종학 등등······ 내가 도망친 소설의 주연들이 있을 테니.

띠리리링!

스마트 워치로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영국 왕실 길드’의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왕실 길드의 단원인 당신은 언제든 원하는 때 두 번째 시험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단원들의 상태창이 표시됩니다. 상황이 심각할수록 퍼센테이지(%)는 낮아집니다.]
[레이첼 : 47% ]
[페르민 : 49% ]
[마커스 : 67% ]
[캐런 : 63%]
[데일 : 53%······.]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아, 씨.”

어떤 시험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호섭이는 이곳에 랭커스터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따라서 레이첼 혼자 저편에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전당의 입구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 앞에서 주변의 눈치를 살핀 뒤, 끼이이······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엇!”

그런데, 전당에 발을 내딛자마자 맑고 밝은 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나는 곧장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어떤 작은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야, 저깄다!”
“잠깐, 잠깐만. 아직 다 못 묶었습니다, 에일린 공-”

키작은 여자가 통통통 튀면서 내 쪽으로 날아왔다.
긴 백발을 양 갈래로 묶다 만 소녀, 처럼 보이는 30대 중반의 에일린이었다. 그 뒤에는 진세연이 에일린의 머리를 묶으려던 고무줄 쥔 채 뚱하니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문장이 저 두 사람이라면, 들키지 않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이었다.
코앞까지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에일린이 물었다.

“너지, 익스트라!”
“······.”

나는 에일린과 진세연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세연의 눈에도 가벼운 흥미가 깃들었다.

“예. 엑스트라입니다.”

설마 해코지라도 하겠나 싶어서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자 에일린은 방긋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일단 그 방독면부터 벗어봐.”

거침이 없는 언령이었다. 내 손이 저절로 방독면에 얹어졌다.
나는 심히 당황했다. 설마 처음부터 이럴 것이라고는······ 예상을 했어야 했다.
아무렴 내가 설정한 에일린인데, 그럴 수밖에

< 몽중화 (18) > 끝

< 몽중화 (19) >

“그럼 일단 그 방독면부터 벗어봐~”

에일린의 언령이 말했다. 내 손이 방독면을 비틀어 쥐었다.
그러나, 참 이상하게도 다음 행동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방독면의 주둥이를 쥔 채 가만히 있었다.

“뭐야, 왜 안 벗어?”

에일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황스러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언령은 나를 강제하지 못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유도(誘導)’ 수준에 불과하다.

“너······.”

에일린은 황당한 얼굴이 되어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본격적으로 언령을 발현하려는 듯 마력이 아우라처럼 일렁였다.

“에일린 공, 그만하시지요.”

다행히 그전에 진세연이 나타나서 말렸다. 에일린은 분노와 수치가 뒤섞인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홱 내젓고 돌아섰다.
그때, 일전에 보았던 것과 유사한 시스템 메시지들이 우후죽순 떠올랐다.

[깨우침 ─ 당신은 이제 언령의 제어를 받는 몸이 되었지만,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비원의 탑 보너스 ─ ‘특전 계승’이 주어집니다!]
[창고에 보관된 아이템 두 개를 전송받습니다!]
[아이템 계승 ▶ 「암흑 광석 화살」]
[아이템 계승 ▶ 「재생의 구슬」]

천장에서 화살 한 촉과 녹색 구슬이 떨어졌다. 나는 그것들을 곧장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다행히 에일린은 뒤로 돌아서 있었고, 진세연은 그녀를 달래느라 이 장면을 보지 못한 듯했다.

“야.”

슬그머니 지나치려는데 에일린이 불러 세웠다.
나는 태연한 척 돌아섰다. 어느새 표독스러워진 에일린의 두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누구야? 그리고 그 요상한 방독면, 좋은 말로 할 때 벗어.”
“······풋.”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에일린은 설정 그대로 고집이 드센 캐릭터였다.

“뭘 웃어?”

처음에는 무시하고 도망갈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굳이 이 두 사람한테까지 얼굴을 감출 필요는 없잖아?

“제가 누군지 말해도 모르실 겁니다.”
“그건 우리가 판단해. 글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어차피 나 친구도 없어.”

진세연과 에일린은 충분히 믿을 만한 영웅이다. 인맥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내가 두 손 빌며 부탁해야겠지.
서로 통성명을 한다고 해서 손해는 없다.

“그러시다면.”

나는 방독면을 반만 벗었다. 에일린과 진세연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나를 들여다보았다.

“어 음······.”
“흠······.”

내 예상대로, 두 사람 다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길 가다가 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다시 방독면을 덮고 웃었다.

“말했잖습니까. 그저 평범한 용병일 뿐입니다.”

잠깐 멍하니 있던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네. 누군지 전혀 모르겠어.”
“혹시, 백두산에서 내려오셨습니까? 백두산에는 은둔 고수가 많다고 하던데요.”

진세연이 왼손을 쫙 펴고 오른손을 주먹으로 만들어 서로 맞대는, 무슨 소림사에서나 볼 법한 인사를 했다.
오오—? 에일린도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눈을 반짝였다.

“아니······.”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쓰게 웃었다.


······벌써 나흘이 지났다.
레이첼은 아무런 성과 없이 대한민국을 떠돌아다녔다. 대충 이곳이 평행 세계와 비슷하다는 것은 확신했지만, 그 이상은 알아내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클리어 조건’ 역시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9,000원 선불입니다.”

김천밥국 점원의 말에 레이첼이 카드를 내밀었다. 전당에서 제공한 자격증을 카드 형태로 변환한 것이었다.

“영수증 드릴까요?”
“······네.”
“자. 앉아서 기다리세요.”

철판 치즈 돈까스 9,000원. 웬 종이 쪼가리 영수증을 받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

혼자 있는 그녀에게, 식당의 시선이 아주 자연스럽게 집중되었다.
흐르는 듯 찰랑거리는 금발과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 조화로운 이목구비와 곱게 이어지는 얼굴의 선, 더불어 피곤한 듯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는 감히 일반인이 범접조차 할 수 없는 신비함이 있었다······.

“휴우.”

레이첼은 한숨을 내쉬며 컵에 물을 따랐다.
마나가 없는 세계, 괴수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조금 혼란스럽지만 어느 정도는 적응이 되었다.
아무렴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엇비슷하게 마련이었으니.

[뉴스 속보입니다. 오늘 새벽 2시경, 명동의 뒷골목에서 정체불명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때마침 TV에서 뉴스 속보가 흘렀다. 레이첼은 물을 홀짝이면서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 시체는 마치 누군가에게 뜯어 먹힌 듯 기괴한 상처가······.]

탁- 철판 치즈 돈가스가 식탁에 내려앉았다.
지글지글— 고소한 향내와 먹음직스런 소리. 치즈 돈가스가 철판 위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레이첼은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어디, 외국 모델이세요?”

그녀를 힐끔거리던 점원이 물었다. 레이첼은 고개를 저었다.

“와. 난 처음에 무슨 그리스 여신 온 줄 알았잖아.”
“······감사합니다.”
“어머어머. 한국어도 무지 잘하네? 발음이 어떻게 그렇게 좋아?”
“아, 하하······.”

레이첼은 쓰게 웃었다. 그쯤 되니 식당 안의 대부분이 레이첼을 보고 있었다. 다소 불편해진 레이첼은 밥부터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철판 치즈 돈가스는 3분 만에 싹싹 비웠지만, 한 그릇으로는 도저히 성이 차지 않았다.
열량을 보조해 주는 ‘마나’가 없는 세상에서, 레이첼의 기초 대사량은 웬만한 성인 남성 네다섯 명을 합친 것만큼이나 비대했다.

“······안 돼.”

그럼에도 레이첼은 꾹 참고 일어섰다. 당장 공적치를 음식으로 소모하는 것도 아까워죽겠는데, 식비로 몇 십만 원씩 쓰고 다닐 수는 없었다.

“잘 먹었습니다.”
“어머, 벌써?”

레이첼은 김천밥국 밖으로 나와 길바닥에 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방금 뉴스에서 보았던 살인 사건의 현장이었다.

[오늘 새벽 2시경, 명동의 뒷골목에서 정체불명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일단은 그 뒷골목을 찾겠다는 생각으로 걸었다. 그런데 길거리 음식들이 자꾸만 눈에 띄었다.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어느 순간 멈추고 말았다. 스읍- 입맛을 다시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어묵 꼬챙이와 감자 핫도그였다.
감자 핫도그. 핫도그에 감자가 오돌토돌 박힌 못난이 핫도그.
한순간 넋이 나가 버린 레이첼은 그 포장마차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헤헤······.”

레이첼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헤실대며 웃었다. 그래도 배가 부르니 기분은 마냥 좋았다.
온 세상이 몽실몽실하고 부드러웠다. 정말 오랜만에, 모든 세속적인 번뇌와 고민이 평화롭게 녹아내리는 듯했다.

“······아!”

그러나 금세 정신 차리고 눈을 번쩍 떴다. 스마트 워치에 [공적치가 거의 다 소모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수신되었다.
식비로 너무 많이 쓴 것 같기는 했지만 벌써 이렇게 되었다고?

[공적치 : D- ]
[원화 환산 : 300,000원]

레이첼이 공적치를 보며 심각하게 고민하던 때, 나무 위에서 웬 고양이 한 마리가 풀썩 내려앉았다. 고양이는 레이첼을 힐끔 보더니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무 귀여워서 레이첼의 숨이 멎었다. 털이 새하얗고 눈도 똘망똘망한 녀석이었다.

니야옹~

녀석이 등을 내보이며 돌아누웠다. 쓰다듬어 달라는 뜻일까. 레이첼은 용기 내어 손을 뻗었다.

······그르릉.

아주 작은 하울링. 잠깐 정신을 잃을 뻔했다. 심연에 빠졌던 의식이 가까스로 되살아났다. 그녀는 혼절하지 않으려 애쓰며 고양이의 등허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그 여유를 오랫동안 즐길 수는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불온한 마력이 흘러들었다. 담배처럼 불쾌하게 스며드는 자욱한 향. 명백한 도발이었다.
레이첼은 갈라틴에 손을 얹고 눈을 치떴다. 주변을 휘둘러보았으나 기척은 드러나지 않았다.
드디어 시작인 것일까.

“하양아, 가렴. 어서.”

우선 고양이부터 벤치 밑으로 내렸다. 고양이는 무심하게 한번 흘겨본 뒤 자리를 떴다.

레이첼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였다.
공원 한복판에서는 불필요한 인명 피해를 야기할 수 있으므로 전투에 알맞은 장소를 찾아야 한다.
놈들도 레이첼의 뜻을 눈치챈 듯 조용히 따라붙었다.

그렇게 해가 질 무렵, 레이첼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의 한복판에 멈춰서서 근엄하게 말했다.

“······나오세요.”

휘이이잉—
정면에서 검붉은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서서히 응집되며 어떤 형체를 이루었고, 그 대류 속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레이첼을 바라보며 물었다.

“공주님······ 제가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레이첼은 크게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 또한 레이첼의 기억 속에 있었다.

“리피트······.”
“아······ 크하하하하!”

그녀의 대답에 리피트가 크게 웃었다. 기괴한 미소였다. 그는 마치 광대가 웃는 것처럼 한참 동안 자지러지다가, 돌연 제 눈을 까뒤집었다.

“무슨······.”

레이첼은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크케케케케-!
괴성을 토해내며 몸을 경련하던 리피트는, 어느 순간 안정을 되찾았다.

“흐음.”

그러나, 리프트의 몸에는 그가 아닌 다른 자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일종의 ‘빙의’였다.
남자는 흰자뿐인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음산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반갑습니다, 공주님. 오랜만입니다.”

잊을 수 없는 이 음색의 주인을, 레이첼은 알고 있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성대가 옥죄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레이첼이 마른기침으로 목청을 훑어내고 말했다.

“당신은······ 여전히 남들 뒤에 숨어 있는 겁니까.”

그는 오랜 악연이었다. 언젠가 레이첼이 존경했었던, 그러나 이제는 국가의 적이 된 사내였다.
레이첼의 검끝이 랭커스터를 겨냥했다.
랭커스터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재회를 하기에 알맞은 장소가 아닐 뿐입니다. 저는 때가 되면, 가장 적당한 곳에서 공주님을 맞이할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곳, 햄프턴 말입니다 공주님. 벌써 잊으신 겁니까.”

레이첼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잊고 자시고, 그곳은 이제 없습니다.”

랭커스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상심했다는 투로 말했다.

“공주님. 공주님은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정신 좀 차리세요! 저희는, 저희는 이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레이첼이 쥐어짜내듯 외쳤다. 갈라진 목소리가 애처롭게 울렸다.
어떤 과오도 돌이킬 수는 없다. 돌아갈 수도 없다.
따라서, 최선은 그저 반복하지 않는 것뿐이다.
랭커스터의 입가가 뒤틀렸다.

“역시, 공주님은 ‘이 세계’에 대해 아직 깨닫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
“공주님. 공주님은 그 날 공주님을 대신해 죽은 사람 모두를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러나 그들을 기억한다고 해서 살아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레이첼은 휘둘리지 않으려 애쓰며 검을 강하게 쥐었다.
랭커스터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공주님, 당신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는 레이첼을 일깨우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하여 저는, 그날의 과오를 조금이나마 되돌리려 합니다.”

그러나 레이첼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는 공주님이 저에게 닿을 수 있길 바라며, 그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곳은······ 어둠이 적고 햇볕이 잘 들겠지요. 조금 덜 차갑고, 조금 더 따뜻하겠지요. 저희가 있는 이 세상보다······.”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남자에게서 랭커스터의 혼이 빠져나갔다.
동시에 분위기가 일변했다.
사내는 실이 풀린 인형처럼 크게 한번 비틀거리더니, 다짜고짜 검을 뽑고 달려들었다.

“죽어-!”

증오가 서린 괴성. 레이첼은 갈라틴을 휘둘러 그의 검을 쳐냈다.
챙—!
검과 검이 마찰하며 날카로운 소리가 발했다. 불씨가 튀어 올라 살갗에 닿았다.
적의 검에는 무거운 의지가 담겨 있었다. 기필코 심장을 파고들겠다는 기세였으나, 레이첼은 그의 목숨을 노리지 않았다.
사활을 건 결투에서도 그녀는 다만 흘리는 것으로 일관했다.
그저 상대가 먼저 지치길 바랐다. 부드럽고, 자애롭게 타이르는 검이었다.
“······?”

찰나, 부자연스레 반사된 달빛이 그녀의 눈을 찔렀다. 레이첼은 고개를 들어 담벼락을 보았다.
그 위로, 또 다른 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살수의 숫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셀 수 없는 그림자였다.
그들은 짝을 이룬 채 질주했다. 돌풍처럼 들이닥치는 그들을, 레이첼은 강하게 밀쳐냈다.

쿵-! 쿵-! 쿵-!

살수의 절반 이상이 벽에 처박혀 기절했으나, 레이첼에게도 열하나의 자상이 생겼다. 하나는 어깨, 다른 하나는 허벅지, 또 다른 하나는 옆구리······.
아직 적은 많이 남아 있다.
레이첼은 눈을 감고 정령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정령의 크기가 너무나도 작았다. 이 세상에서는 마력도, 정령도 희박했다.
하는 수 없이 레이첼은 다시 검에 집중하려 했다.

“······읏!”

한데, 몸이 제 멋대로 늘어졌다. 팔 다리가 풀어지고, 갈라틴을 쥔 손이 이상하게 떨렸다. 마치 온몸의 힘이 서서히, 뿌리가 수분을 빨아 당기듯이, 땅 밑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으······.”

시야가 탁해지고 피부에 열이 올랐다. 균형을 잃고 한쪽 무릎이 무너졌다.
살수들의 검에 독이 스며 있었다.
이 정도 독 따위, 마력을 운용하면 쉽게 빼어낼 수 있겠지만─ 이 스테이지에 마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레이첼은 갈라틴을 지팡이 삼아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살수들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의 검은 전부,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쾅-!

총성이 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벼락처럼 솟구친 탄환이 살수의 어깨를 꿰뚫었다.
살수는 그대로 튕겨나가 벽 끝에 처박혔다. 대저 가공할만한 저지력이었다.

저벅 저벅-

뒤이어, 적막한 발소리가 울렸다.
살수들은 숨 죽인 채 그곳을 보았다. 레이첼의 눈도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이윽고 한 남자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는 한 손에는 권총을 쥐고, 다른 손에는 기이한 책을 든 채,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뭘 봐?”

그가 냅다 총을 갈겼다. 하나, 둘, 셋, 넷- 연쇄적으로 울린 총성이 대기를 뒤흔들었다.
살수들은 일단 높이 뛰어 사거리에서 벗어났다. 적들은 그와 대치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남자가 먼저 레이첼의 곁에 닿았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손을 내밀었다. 레이첼은 자신에게 뻗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어나. 나도 혼자서는 힘드니까.”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 몽중화 (19) > 끝

< 몽중화 (20) >

“일어나. 나도 혼자서는 힘드니까.”

[진실의 서]를 길잡이 삼아 도착한 뒷골목. 나는 레이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중독된 레이첼은 호흡조차 버거운 듯 괴롭게 색색거렸다. 새하얀 피부 아래, 혈관이 진녹색으로 도드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재생의 구슬을 쥐어 주었다.

“이거 꽉 쥐고 있어.”

휘이이익—
살수들이 암기를 투척했다. 수많은 단검이 탄환처럼 치달았으나, 나는 진짜 탄환으로 그것들을 격추했다.
역시, 마나가 없는 세상에서 총보다 강한 병기는 흔치 않다.

“당신······ 읏.”

그때 레이첼이 일어났다. 갈라틴을 지팡이처럼 짚은 채 비틀거리다 내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나는 그 상태에서 살수들을 겨냥했다.

“······뭐야?”

놈들은 담벼락 위에서 석상처럼 가만히 우리를 관망하고 있었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니 섣불리 격발할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그러는 사이 레이첼의 호흡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다만 몸 전체는 여전히 끓어오르는 듯 뜨거웠다.
그때,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동시에 살수들의 움직임이 속개되었다.
놈들은 바람을 타고 달려들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속도였다.
나는 탄환의 시간을 전개했다. 한 손으로 권총을 쏘아내며, 다른 손에는 단검을 쥐었다.

“······어?”

적들은 마치 바람을 타듯 움직였다.
궤적을 예측하고 격발을 했으나 총탄이 빗나갔다. 바람의 결에 따라 위치가 불규칙적으로 흩어지는 탓이었다.
놈들은 하늘로 떠올랐다가 지상에 닿았고, 정면으로 돌진하다가 등 뒤에서 나타났다.
자유분방하게 떠다니는 놈들을 상대하면서— 나는 어느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토록 빠른 녀석들이, 줄곧 지켜만 보다가 이제야 달려들었을까. 내가 다가오기 전에 레이첼부터 끝장냈으면 되었을 텐데.
그저 재미를 위해서?

챙-!

내 미간으로 단검 한 자루가 쇄도했다. 나는 똑같이 단검을 투척하여 쳐냈다.
그러나 단검과 동일한 속도로 치닫는 살수까지는 감당할 수 없었다.

“큭!”

명치에 주먹을 얻어맞고 밀려났다. 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 갑주에 여러 자상이 번졌다.
그런데 살수들이 돌연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담벼락으로 도주했다. 놈들은 부엉이처럼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저것은 도대체 어떤 행동 원리인가.
비웃기 위함인가? 아니면 저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침착하게 탄창을 갈아 끼우던 내 머릿속에,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바람.”

놈들은 바람이 불 때만 움직였다. 생각해보면, 최초의 습격때에도 마력 ‘폭풍’이 휘몰아쳤었지.
녀석들의 힘은 바람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럴 줄 알았으면 랭커스터 설정이나 자세하게 해둘걸······.

휘이이이잉─!

다시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조금 매서운 돌풍이었다.
예상대로, 그 바람에 실려 수많은 단검이 들이닥쳤다.
여기까지 알았으면 되었다.
놈들의 무기가 바람이라면, 파훼법은 더없이 확실하다. 그저 바람을 소멸시키면 그뿐.

“······!”

놈들이 내던진 단검 중 두어 개를 일부러 허용했다. 정령석 갑주와 에테르가 곧바로 반응하여 피해는 미미했지만, 나는 일부러 상처를 감싸 쥐며 허리를 숙였다.
“아!”

연기는 나름 잘한 듯했다. 곁에 있던 레이첼이 화들짝 놀라 무어라 외치는 것을 보면.
레이첼의 생생한 반응 덕분에, 놈들은 덫에 걸려들었다. 아홉 명 전원이 바람을 몰아치며 내게 돌진한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정령석을 전개했다.

콰아아아아-!

일대의 노면을 끌어올려 공간 전체를 봉인하고, 내부의 바람을 정체시켰다. 또한 빛을 말살하여 완전한 어둠으로 끌어내렸다.

“이런······.”

바람이 멎고 시야가 차단되자 놈들은 불안에 떨었다.
반면, 나는 이보다 편할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없는 명사수에게, 서늘하고 차가운 어둠은 가장 완벽한 아군이었다.

철컥—

여태 내 몸을 보호하던 에테르가 권총에 달라붙어 샷건으로 변환되었다.
이 경우 방어력은 격감하지만, 파괴력만큼은 추종을 불허한다. 한 발 한 발이, 문자 그대로 몸이 터질 만큼 아프겠지.

휘리리릭—!

살수들이 온 사방으로 단검을 투척했다. 수백의 단검이 막을 이루며 퍼져나갔다.
그 찰나, 갑자기 나선 레이첼이 그것들을 모조리 쳐내었다.

“괜찮, 괜찮으십니까?!”

내가 심각하게 다쳤다고 착각하는 듯 꽤나 절박한 목소리였다.

“괜찮으니까 쉬고 있어도 돼.”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내 눈에 보이는 레이첼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독성의 진행과 구슬의 회복이 서로 맞부딪히는 지금, 상당히 어지럽고 괴로울 터였다.

“아뇨······.”

레이첼은 계속 고집을 부렸지만, 쾅—! 내가 샷건을 격발하자마자 그 총성에 놀라 귀부터 막았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사방이 막히고 시야가 차단된 곳에서 살수의 기동력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바람이 말소되었으므로 방금처럼 날랜 움직임 역시 나오지 않는다.
나는 놈들의 심장에 산탄총을 박아 넣었다.

쿵—! 쿵—! 쿵—!

노도가 지면을 침범하는 소리, 혹은 벽력이 지축을 두드리는 울림이 토굴을 가득 채운다.
적들은 샷건의 화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었다. 아무렴 인간은 전차에 대항할 수 없는 법이었다.

콰직!

어디선가 눈먼 단검이 날아들어 내 어깨를 뚫었지만 상관없다. 나는 놈의 아가리에 샷건을 갈겼다.
후드드득-!
통째로 박살 난 머리에서 뇌수와 핏물이 튀었다.

“아으.”

역하고 비릿한 냄새가 방독면을 파고들었다. 속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었지만 참아냈다.
짓씹은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입안에서 쇠맛이 났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보이는 모든 것을 터트리고 파괴했다. 그럼에도 놈들은 포기 따위 없이, 죽음을 각오한 듯 달려들었다.
그렇게, 수십 번의 격발음이 울렸다.

“······후.”

사람이었던 것들은 인체의 형상을 잃은 채 곤죽이 되었고, 나는 그 한복판에서 구역질을 삼켰다.
이래서 근접전은 최악이다. 애당초 이런 상황을 피하려고 명사수를 선택한 건데······.
토벽을 해체하고 일대를 둘러보았다.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참살의 현장에서, 레이첼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어떤 감정이 깃들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괜찮니.”

레이첼에게 다가가 물었다.
레이첼은 대답 없이, 천천히 손을 들어 내 방독면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얼굴이 내게 닿을 듯 다가왔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더 없이 흐트러진 모습이 적응되지 않았다.
아니, 언젠가의 데자뷰였다.
“피······.”

그녀가 작게 읊조리며 방독면에 달라붙은 핏물을 닦아내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피 아니야.”

레이첼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는 방독면도 쓸모가 없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고, 아마 그녀도 내 눈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굳이 모양 빠지는 방독면을 썼을까. 괜히 아쉽다. 다른 멋진 얼굴 가리개도 많은데.

“!”

레이첼이 돌연 팔을 뻗어 내 뒷목을 감쌌다. 곧이어 단검이 쇄도했다. 나의 목을 노렸던 단검이, 레이첼의 팔에 가로막혔다.
나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웬 팔이 있었다. 박살 난 몸과 분리된 팔이, 저 혼자 움직여 단검을 내던진 것이었다.
나는 권총을 쏘아 팔을 부수었다.

위이이잉······.

이제 마무리로 접어들 즈음,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밖으로 새어나간 총성이 경찰을 부른 모양이었다.
나는 하늘을 보고, 다시 레이첼을 보았다.
게슴츠레 들썩이는 그녀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서히 힘을 잃어가던 두 눈은, 이내 평화로이 감기었다.


레이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천장에 형광등이 보였다.
깜빡, 깜빡, 깜빡. 보고 있자니 정신이 몽롱했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온몸이 두둥실- 두둥실- 출렁였다.

“일어났어요?”

흘러드는 목소리가 의식을 어루만졌다. 레이첼은 고개를 돌려 그곳을 보았다. 어떤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너무 오래전의 인연······ 하지만 어제 만난 것처럼 익숙한 김하진이었다.
역시, 꿈이 아니었구나.
레이첼은 얼굴과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말없이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어지러움에 몸이 잠깐 휘청거렸다.

“괜찮아요?”

상냥한 목소리가 영 적응되지 않는다.
레이첼은 쭈뼛쭈뼛 대답했다.

“······네.”
“그럼, 이거 보세요.”
“······.”

다른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레이첼은 일단 그의 말에 따랐다.
김하진이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여 파일들을 보여주었다.

[물어 뜯긴 시체 발생······]
[동시다발적인 살인 사건.]
[좀비 마약의 소행?]

레이첼도 김천밥국에서 보았던 속보였다. 다만 김하진은 이 사건의 최초 발생지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도, 클리어 목표가 이것과 관련 있는 것 같지 않아요?”
“······.”

레이첼은 파일들을 샅샅이 훑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할 말이 무척 많은 눈으로 김하진을 힐끔거렸다. 약간 쀼루퉁했다. 지금은 클리어 목표보다도 서로의 입장 정리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이 정말 Xtra인지, 맞다면 왜 자신을 도와주었는지, 또 제임스 핀리의 진실은 무엇인지······.

“랭커스터가 어떻게 이곳으로 침범했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그들이 전당의 깊숙한 곳까지 이미 관여하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어요. 아니면, 전당에 개입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공적치를 얻었거나.”

여러가지 궁금증을 차마 묻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레이첼에게, 김하진은 공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알려주지 않으려는 듯, 혹은 알 필요가 없다는 듯이.

“저희는 일단 이 사건에 개입하기 전에, 단원들부터 모아야겠죠?”
김하진은 그렇게 결론을 냈다. 마치 자기가 무슨 단장인 것처럼 굴었다. 레이첼은 왕실 길드의 부단장으로서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짜로, 성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는······.

꼬르르륵—

흡사 천둥에 가까운 소리가 방 안을 뒤흔들었다.
으아앗- 크게 놀란 레이첼은 허둥지둥 자기 배를 소파 쿠션으로 가렸다. 그렇게 가린다고 소리가 막히지는 않겠지만.

꼬르르르륵—

다시 한 번 배가 울렸다.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큰 소리였다. 레이첼은 생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수치심에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 이게······ 그러니······ 까······.”
“······.”

김하진은 그런 레이첼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뭔가 아이를 보는 듯한 그 시선의 뜻을 레이첼은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눈을 꾹 감았다.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텨내려는 시도였다······.

“배고파요?”
“······.”

김하진의 물음에 레이첼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괴로움을 가득 담아 말했다.

“노력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참아지지가 않아요······.”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생리현상이었다.
마력으로 강화된 육체는 필요한 에너지의 대부분을 마나에서 얻는다. 굳이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아도, 대기 중의 마나를 호흡으로 빨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마나가 사라진 이 세상에서는 그런 기본적인 호흡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몸에 필요한 에너지는 오직 섭식만으로 보충해야 하니, 결국에는 식충이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레이첼 입장에서는 영 적응할 수 없겠지. 기초 대사량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났을 테니. 굳이 동물로 따지자면 코끼리? 에 비유해도 과장이 아니다.

“아 괜찮아요.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김하진은 뭐가 되었든 일단 레이첼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정말 이게······ 나 왜 이러지······ 왜······.”

아닌 게 아니라, 안 먹이면 진짜 울 것 같았다.
하기야 당장 어젯밤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그 이후에는 거의 12시간 동안 기절한듯 잠만 잤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김하진은 일어나서 부엌으로 향했다. 에반젤이 좋아했던 음식을, 그대로 양만 네다섯 배 늘려서 해줄 생각이었다.

우선 냉장고를 열고 재료들을 꺼내는 척 랜덤 주사위를 굴렸다. 주사위는 최상급 식재료가 되어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꼬륵, 꼬르르······.

그때까지도, 배곯는 소리는 끊임없이 울렸다. 왕족으로서의 체통이 완벽하게 무너진 레이첼은 패닉에 빠졌고, 김하진은 애써 못 들은 척 음악을 틀었다.

볼륨을 최대로 키우니 어느 정도는 커버할 수 있었다.

< 몽중화 (20) > 끝

< 몽중화 (21) >

파스타 면을 냄비에 풀고 프라이팬에 안심을 올렸다. 대충 인터넷 레시피를 보면서 스테이크와 까르보나라 소스를 만들었다.
미디움으로 구워진 안심에 소스와 채소를 얹었다. 까르보나라도 비슷한 모양새로 꾸몄다.
양식만 있으면 섭섭할 것 같아 냄비밥을 지었고, 돼지 목살과 김치를 털어 넣어 찌개로 끓였다.
넉넉히 잡아 열 명이서 먹으면 충분히 배부르겠다- 싶은 양.
나는 그 전부를 레이첼에게 진상했다.

“감사합니다.”

레이첼은 사양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식사 예절을 지키려는 노력이 돋보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한 입 먹을 때마다 점점 커지는 눈과 동작이 에반젤을 닮아 귀여웠다.

그렇게 그녀가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창밖을 보며 사색에 잠겼다.
이 스테이지의 시공간적 배경은 2018년 대한민국.
이곳은 내가 작가였던 시절 마련한 보증금 2,000 월세 60의 투룸.
도어락의 비밀번호는 내 생일.
나는 마나가 없고 괴수도 없는 이 세상이 언제나 그리웠다.
그러나 전당은 어떻게 이 세계를 구현한 것일까. 어떻게 ‘나’라는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레이첼은 어째서 이 스테이지를 선택한 것일까······.

“후아~”

상념에 빠져 있던 나를 만족스러운 한숨이 일깨웠다.
레이첼이었다. 그녀의 식탁에는 빈그릇 뿐이었다. 시계를 보니 고작 7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괜찮아요, 이제?”

내가 묻자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레이첼은 진지하면서도 새초롬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네.”
“맛은 어땠어요?”
“맛은.”

레이첼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스읍-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이었어요, 난생처음.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 있는지······.”

나는 웃었다.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아무렴 드워프의 손재주로 만든 덕도 있겠지만,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옛 격언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니.

“다행이네요.”
“요리를 배우셨나 봐요. 수십 년 정도.”
“그건 아니고. 앞으로 이 스테이지가 끝날 때까지는 계속해 드릴게요.”
“······!”

레이첼은 감동을 넘어 경탄한 얼굴로, 식탁의 빈 접시들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뭔가 내면에 상당히 격렬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표정을 차분하게 가다듬고 말했다.

“······하진 씨.”

진지한 음색이었다.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말없이 기다렸다.
레이첼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떤 것을 물을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저는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레이첼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제임스 핀리를 살해했는지, 왜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도와주었는지, 왜 그때에는 못되게 굴었는지······.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의문을 묻지 않겠다고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대신 레이첼은 다른 것을 물었다.

“이 세상은 어딜까요?”

그러나 오히려 더욱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어서, 나는 그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이른 오전부터 나는 레이첼과 함께 거리를 걸었다. 목적지는 최근에 발생했던 좀비 살인 사건의 현장. 가장 중요한 ‘클리어 조건’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들어갈 순 없겠네요.”

사건 현장은 내 집에서 멀리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폴리스 라인이 둘러쳐졌고, 주변에는 경찰과 감식반이 서성거렸다.
우리는 적당한 거리에서 기웃거리며 구경했다.

“아, 잠시만요. 저기 흔적이 있네요.”

갑자기 레이첼이 눈을 감더니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검지에서 작은 정령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물방울처럼 생긴 정령이었다.
후-
바람을 불어서 정령을 내보냈다.
정령은 민들레 씨처럼 나풀나풀 현장으로 날아갔다. 그러고는 사건 현장의 땅바닥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레이첼에게 돌아왔다.

“뭘 한 거예요?”
“저곳의 땅의 정령과 소통을 했어요.”
“아~”

아무래도 싸이코메트리(Psychometry) 비슷한 능력인 듯했다.

“······.”

레이첼이 정령을 손가락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가 기억을 받아들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런데, 자꾸만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적인가 싶어서 경계했지만, 시선의 종류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히 호의적인 편에 속했다.

“아.”

그 원인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길거리의 어느 누구보다 빛나는 내 옆 사람. 숨만 쉬어도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끌어모으는 절세(
심지어 폴리스 라인 안쪽의 경관들마저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으니 원.

“알아냈어요.”

그때 레이첼이 눈을 뜨더니 위풍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데드와 관련된 주술 의식······?”
“잠시만요.”

세상 진지한 얼굴로 읊조리는 레이첼에게, 나는 내가 쓰고 있던 모자를 옮겨주었다. 레이첼이 커다란 눈으로 나를 보며 갸웃거렸다.

“저보다는 레이첼 씨가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여기는, 동양인밖에 없으니까.”

나는 간신히 쓰고 있던 모자가 레이첼의 머리에 닿으니 그대로 쑥- 들어갔다. 참 크기가 작고 예쁜 두상이었다.

“음, 약간 힙합 식으로.”

챙을 조금 비틀어 힙하게 바꿔주었다.

“어울리시네. 좀 큰 거 빼고는.”

별생각 없이 한 칭찬, 모자에 반쯤 파묻힌 레이첼이 맑은 미소를 지었다. 고운 호선을 그리는 눈웃음이었다.
심장이 잠깐 흔들렸지만 내색 없이 말했다.

“크흠. 나머지 얘기는 일단 자리부터 옮기고 합시다.”


레이첼의 정령은 그 날 땅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상히 말해주었다. ‘좀비 살인’이라 명명된 사건은 언데드를 숭앙하는 주술결사의 소행이었다.

“그럼 대충, 클리어 목표는 녀석들을 막는 거겠네요.”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레이첼이 약간 불편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말씀 편히 하셔도 돼요, 저번처럼.”

나는 ‘저번처럼’의 뜻을 잠깐 고민했다.
아마, 내가 Xtra였던 시절을 말하는 거겠지.

“예? 아녜요. 그때는 뭐, 제 정체 안 들키려고 억지로 그랬던 거예요. 사실 저도 반말하면서 괴로웠어요.”
“억지로라기에는 너무 익숙하시던데요. 즐거워하시는 것도 같았는데.”

레이첼이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뒷목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쀼루퉁한 레이첼을 보고 있자니, 괜한 오기가 샘솟았다.
아닌 게 아니라, 솔직히 존댓말을 하는 게 불편하긴 했거든. 자꾸만 레이첼 얼굴에서 에반젤이 떠올라서.

“그럼 그렇게 할게.”
“······네?”
“편하게 한다고.”

진짜 이럴 줄은 예상 못 했던 걸까. 레이첼은 사뭇 당혹스러운 듯 멍하니 있다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근데 영 불편하시면 안 그러셔도-”
“괜찮아. 아무튼, 그러면 지금은 그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야겠네.”
“그, 그렇죠.”
“방법은 있어?”
“있긴 있는데······.”

레이첼이 다시 정령을 불러냈다. 이번에도 물방울처럼 귀엽게 생긴 정령이었다.

“이 정령이 그곳까지 안내할 수 있을 거예요.”
“알겠어. 그러면.”

나는 준비해 두었던 가면을 꺼내어 썼다. 방독면은 너무 싼티가 나는 듯해서, 레이첼이 밥먹는 동안 제작한 가면이다.
그런 나를 보며 레이첼이 물었다.

“그건?”
“가면인데.”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누굴 바보로 아시나. 레이첼이 눈을 데퉁스레 좁혔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내 가면을 어루만졌다.
순간 나는 돌덩이처럼 굳었다.
아까부터 자꾸, 심장에 무리가 가는 행동을 너무 하시는데.

“무슨 문양이에요?”
“······연꽃.”

비원의 탑에서 내게 내어준 장비들 중에는 ‘연꽃’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그래서 가면에도 일부러 연꽃 문양을 새겼다.

“아, 연꽃. ······연꽃?”

레이첼이 뭔가 오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알 듯 말 듯 한 무엇인가를 애써 떠올리려는 모습이었다.

“왜?”
“아뇨.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아서······. 착각인가.”

레이첼은 갸우뚱하더니 포기하고 모자와 방독면을 썼다. 둘 다 내가 전에 쓰던 물건이었다.

“그리고, 이거 받아.”

나는 스마트폰을 건넸다.

“여기서 워치는 안 통하니 핸드폰으로 소통해야 돼.”
“아, 네.”

레이첼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기종은 애플사의 아이폰이었다.

“으음······.”

레이첼은 예쁘장한 핸드폰이 신기한 듯 두 눈을 깜빡이며 조작에 열중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 핸드폰에도 눈독을 들였다.

“하진 씨도, 스마트폰 쓰시게요? ”
“아, 난 그냥 워치 쓰려고. 이미 연동해 놨어.”
“연동이요?”
“응. 스마트폰이랑 워치랑 연동한 거야. 자격증으로 하면 돼. 난 공적치가 꽤 많이 남아서.”
“······.”

레이첼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연동이 뭔지 모르겠으니 일단 그 스마트폰부터 줘봐라-는 몸짓이었다.
나는 작게 웃으며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제 거랑 다르네요.”
“응. 이건 갤럭시라고 기종이 달라.”
“아······.”

꾹꾹— 꾹꾹—
레이첼은 스마트폰의 액정을 두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뭐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도 모르고, 아무거나 예쁜 아이콘을 누르는 듯했다.
나는 잠시 한눈을 팔았다.

“어?”

그런데 돌연, 레이첼의 어깨가 크게 한 번 떨렸다.
뭔지 싶어서 보니 레이첼이 세상 심각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뚫어지라 노려보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래?
덩달아 불안해진 나는 그녀의 손에서 폰을 빼앗았다.

“아.”

액정 화면에 핸드폰의 갤러리가 띄워져 있었다. 레이첼은 내 워치와 연동된 갤러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잠깐 가슴이 철렁였다. 처음에는 레이첼이 갤러리 속의 에반젤을 보고 놀란 줄 알았다.

“거기······ 왜 제 사진이······.”
“응?”

그러나 천만다행이게도 레이첼은 갤러리 속 사진을 넘기는 방법까지는 몰랐고, 다만 갤러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 자기 사진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뒤늦게, 이것이 안심할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잠깐, 다시 줘보세요.”

레이첼이 내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몸을 뒤로 접혀서 그녀의 손을 막았다.

“하진 씨.”

굳은 얼굴의 레이첼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두 볼이 약간 발그레했다. 수치심인지 부끄러움인지는 모르겠다만.

“······네?”
“줘, 줘보세요.
“······뭐를요.”
“제 사진이 거기 있었어요.”
“아, 그거요? 그거 설명 가능해요,”

어느새 나는 다시 존댓말을 쓰게 되었고, 레이첼은 내 핸드폰을 빼앗기 위해 폴짝폴짝 뛰었다.
레이첼과 나는 키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터라 상당히 위협적인 점프였다.

“잠깐. 잠깐, 설명할 수 있어요.”
“설명이 아니라, 제가 볼게요. 잘못 본 것 같아서 그래요.”
“아뇨, 안 돼요. 제 핸드폰이에요.”
“······제가 찍힌 사진 같았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그걸 설명하겠다는-”
“얼른 줘봐욧-!”
“아, 아 잠깐!”


두 시간 뒤.
우리는 정령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북한산으로 나왔다. 한참 동안 실랑이를 했던 터라 어색함이 없지 않아 있었다.

“······.”
“······.”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하늘 아래, 레이첼은 말없이 나를 인도했고 나도 별말 없이 레이첼을 따랐다.

“여기 어딘가인 것 같아요······ 흐흠.”

레이첼이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나도 쪽팔려 죽을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가요.”

레이첼은 정령의 힘을 빌려 비밀 결사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했다. 하여 막상 북한산까지 오기는 했지만, 이곳의 어디에 숨어 있다는 것인지, 정령은 그 구체적인 장소까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마냥 걷기만 했다.

“저어······.”

부엉이가 으스스하게 울고, 보름달의 희미한 빛이 내려앉는 산길.
바스락 바스락- 레이첼이 애꿏은 낙엽을 살살 차면서 말했다.

“네, 네.”

나는 괜히 간지러운 쇄골 언저리를 긁적였다. 레이첼은 그런 나를 힐끔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갑자기 사무적인 말투였다. 나는 말없이 있었다.
또 사진 이야기겠지. 진심으로 사과해야 하나, 아니면 스토커 따위는 절대 아니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당연히 사과를 해야겠지, 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아직 누군가의 마음을 받을 수 없고,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럴 처지가 아니에요.”
“······느에?”
“저는 조금 오랫동안, 아니 아마 평생동안, 누군가와 그런 아기자기한 마음을 교환할 수 없을 거예요.”

뭔가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티를 팍팍 내며 레이첼을 보았다.
그때, 오히려 레이첼이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레이첼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누구냐앗—!”

거대한 괴성과 함께 노면이 뒤집어졌다.
콰과과과과—!
어마어마한 흙무더기가 밤하늘을 가리며 치솟았고, 산사태처럼 우리 두 사람을 한꺼번에 덮쳤다.

< 몽중화 (21) > 끝

< 몽중화 (22) >

흙더미에 뒤삼켜지자마자 나는 정령석을 일으켰다. 늦지 않게 바람의 막이 형성되었고, 그 위로 웬 정체불명의 습격자들이 파리처럼 달라붙었다.

“으극!”

막에 부딪혀서 짓눌린 사람의 모습이 조금 흉하게 보였다. 그러나 레이첼과 나에게는 어느 정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레이첼은 놀란 얼굴로 막 너머의 사람, 그리고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진 씨. 방금, 혹시.”

레이첼은 내가 발현한 정령석의 기운을 느낀 듯했다. 일전에도 한 번 썼었지만, 그때에는 피차 정신이 없었으니.
나는 굳이 숨기지 않고 말했다.

“저도 조금은 정령을 다룰 줄 알아서요.”
“아?!”

레이첼의 두 눈이 달덩이처럼 둥그레졌다.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고, 그때 바람의 막에 달라붙어 있던 두 사람이 우리를 보며 크게 소리쳤다.

“어?!”
“부단장님!”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나도 안다. 각각 페르민과 케일. 여자 두 명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바람의 막을 해제했다.

“으갹!”

둘은 바닥에 거꾸러졌다가 스프링처럼 솟구쳐올랐다. 그리고는 곧바로 레이첼에게 달려들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꽤 오랜만의 재회인지라 포옹이 상당히 격했다. 레이첼은 눈물짓는 두 단원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주었다.

“괜찮아요. 울지 마요. 다른 단원들은요?”
“아직 못 만났어요······.”
“그럼, 두 분은 이곳에는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아!”

그때 페르민이 레이첼에게서 떨어지더니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클리어 목표와 관련된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여기, 부두 인형과 대못, 그리고 강령술에 필요한······.”

주섬주섬 배낭을 뒤적이면서 여러 주술 기구들을 꺼냈다. 언데드를 불러들이는 의식에 필요한 제기들이었다.
그렇게 여러 물건을 늘어놓던 페르민이 문득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가면이 얼굴을 잘 가리고 있는지 점검했다. 다행히 빈틈 따위는 없었다.

“저, 이분은······.”

페르민의 물음에 레이첼은 간단히 대답했다.

“저희 용병, Xtra예요.”
“아앗!”

페르민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스윽 훑었다.

“생각보다 키가 엄청 작으시네요?!”
“······.”
“190은 될 줄 알았는데.”

딱 대한민국 평균이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아무렴 키만큼은 설정 개입으로도 어떻게 해결하기 힘드니.

“······페르민?”
“아, 네. 네 죄송합니다.”

레이첼이 지적하자 페르민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작게 한숨 쉰 레이첼은 페르민과 케일의 흙투성이 몰골을 보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은 어디서 머무르고 계셨어요? 따로 거처를 구하셨나요?”
“아, 저희요? 저희는······.”


레이첼은 페르민이 안내한 토굴로 들어왔다. 입구에 들어설 때만 해도 너무 허름하지 않나 걱정이 되었지만, 토굴 내부는 나름 사람 사는 구색이 갖추어져 있었다.
기름 램프가 고즈넉한 불빛을 발하는 방 안에, 버너를 비롯한 취사용품은 물론 침대 비슷한 가구도 아담하게 놓였다. 어느 정도는 별장 같았다.

“저희는 여기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산짐승이 꽤 있어서 식량은 그걸로 충당했고요, 부족하면 민가에 가서 조금 빌렸습니다.”
“······빌려요?”
“넵. 근처에 정육점이 많더라고요.”
“아······ 이 가구들도 그러면?”
“넵. 빌려왔습니다. 돈 벌면 갚아야죠.”

레이첼은 약간 당황한 얼굴이 되어 침대에 걸터앉았다. ‘리꾸리꾸’라는 이름의 침대였다.
페르민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부단장님. 여태 그······ Xtra와 함께 계셨던 겁니까?”

레이첼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녀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알아버린 탓이었다.
내심 후회가 되었다. 차라리 그때 가만히 있었더라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음······ 무슨 일은 없으셨죠?”
“무슨 일은요. 덕분에 안전하게 지냈어요.”

레이첼은 애써 웃었다.
그가 그런 사진들을 모은 이유는 역시—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겠지. 꽤 오래된, 어쩌면 큐브 시절부터 계속되었을 해묵은 감정.
그 소중한 마음이 레이첼은 부담스러웠다. 그에게 말한 것처럼, 자신은 누군가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일단, 근처에 뭐가 있다고 했죠?”

레이첼이 쓰게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페르민도 대충 눈치를 챈 듯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네. 여기서 20분 정도 더 올라가면, 그 중턱에 비밀결사의 생츄어리가 있습니다.”

클리어 목표는 확실히 그것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갑시다, 그럼.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레이첼은 의욕 있게 움직이려다가도,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그의 워치에 갈무리되었던 사진들이 잔상처럼 되살아난다.
그가 한 장 두 장 모아둔 것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사진이라도 모으고 싶어지는 것일까.
그러나 자신은 아직 누군가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따라서 대처하는 방법도 모른다.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그저 내쳐야 하는 것일까. 냉정하게 그만두라고 뿌리쳐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미안하다고 타일러야 하는 것일까.
복잡하게 얽히고 꼬이는 심사를 가슴에 담아 둔 채, 레이첼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부단장님?”
“어디,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페르민과 케일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레이첼은 고개를 젓고서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어서 가요.”
“옙!”

세 사람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외부에서 사주경계를 하겠다고 자처했던 김하진은, 근처 나무 위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페르민이 레이첼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재잘거렸다.

“혼자 고독을 씹고 있는데요? 둘이 무슨 일 있으셨죠?”
“아, 아니에요. 무슨 일은 무슨.”

레이첼은 괜히 식은땀을 흘리며 페르민을 떨쳐냈다.
그때 김하진이 시선을 내려 이곳을 보았다. 페르민이 말했다.

“저희, 지금 갈 겁니다!”

김하진은 말없이 내려왔다. 페르민은 그와 그녀를 번갈아서 힐끔거리고는 길 안내를 시작했다.
사부작사부작- 낙엽이 쌓인 산길을 다 함께 걸었다. 레이첼은 앞서가는 김하진이 신경 쓰였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행히 장소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여깁니다.”

페르민이 어떤 수상한 수풀 앞에서 멈췄다. 나무 덩굴과 뿌리가 지리멸렬하게 흐트러진 수풀. 그 속에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바로 들어가고 싶은데, 이 안에 경보 기능이 있어요.”
“······.”

그때 김하진이 나섰다.
김하진은 모두에게 정령석의 바람을 부여했다. 바람처럼 가벼워진 그들은 이제 경보 따위에 포착되는 일이 없고, 물체와 충돌하지도 않을 것이다.

“와?”
“뭐지? 무슨 버프예요? 부단장님이 하셨죠?”

페르민과 케일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레이첼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정작 레이첼은 그들보다도 훨씬 놀라워하고 있었다. 마나도 없는 세계에서 이 정도의 정령 활용이라니······.
아니, 생각해 보면 김하진은 자신이 정령을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이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정령의 자질을 일깨웠겠지. 그렇기에 한계 따위에 얽매였던 자신이 답답했던 거겠지······.

레이첼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김하진의 뒤를 따랐다.
수풀의 내부는 개미집처럼 통로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김하진은 거침없이 걸었다.

“······.”

한 10분 정도 그렇게 나아갔을 때, 돌연 김하진이 말없이 손을 뻗었다. 멈추라는 동작이었다.
그가 스마트 워치로 문자를 보냈다.

[저 앞에 꽤 많은 사람이 있다.]

김하진의 시야에는 기백 명가량의 사람이 보였다. 전부 뭔가에 홀린 듯 의식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일단, 막아야 할 것 같다.”
“그래요.”

김하진이 [검은 연꽃의 활]을 든 순간이었다.
끄드드드득— 갑자기 사방이 어그러지더니, 스마트 워치에 웬 메시지가 도착했다.

[선점 시간이 만료되었습니다. 이제 12시간 뒤 다시 접속이 가능합니다.]

“뭣—”

뭔가 말을 하거나 놀라움을 표현할 시간도 없었다.
세상이 찢어지는 것처럼 급속도로 뒤틀리면서, 이윽고 푸른 수정으로 덮인 천장이 나타났다.

“뭐야!”

김하진은 벌떡 일어나 앞을 보았다. 휘둘러보니 장소는 전당의 휴게실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채나윤이 있었다.

“······.”
“······.”

두 사람은 서로 말없이 시선을 마주했다. 감히 예상 따위는 할 수도 없었던 만남이었다.
채나윤은 멍하니 입을 벌리더니 안에 있던 음료를 주르륵— 쏟아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녀의 옆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김하진?”

김하진은 급히 자신의 가면을 바로 썼다. 유연하는 흐음- 코웃음을 치더니 별말 없이 팔짱을 꼈다.
그 뒤, 휴게실의 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이 들어왔다.

“아, 저기 선발대가 돌아왔네요.”

김수호가 먼저 햄버거처럼 쌓인 영국 왕실 길드를 가리켰다. 더불어 윤승아, 이영한 등등- 레이첼이 떠난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모든 길드의 대표자들이 들어섰다.

“근데 다들 왜 이렇게 널브러져 있어?”

에일린이 앞으로 나와 어깨를 으쓱였다. 레이첼은 아픈 머리를 매만지며 단원들부터 살폈다.
자신을 포함한 단원들 모두 안전하게 귀환에 성공했다. 몇몇은 상태가 조금 좋지 않은 듯 피골이 상접했지만, 다행히 심각하지는 않아 보였다.
그때, 에일린의 우렁찬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자, 됐고-! 이제 다들 집중해-! 열두시간 이따가, 두 번째~세 번째 시험을 이어서 시작한다니까-!”


두 번째 시험의 선점 시간이 끝나자마자 왕실 길드는 전당으로 ‘강제 복귀’를 당했다. 그러나 어차피 12시간만 기다리면 다시 접속할 수 있고, 클리어 조건도 대강 알게 되었으니 상관은 없었다.
굳이 문제라고 한다면, 시험에 임하는 동안 불편한 사실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 정도?

“하아······.”

레이첼은 심란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숙소의 발코니로 나왔다.
전당 외부의 전경은 오직 자연뿐이라 평화롭고 또 아늑했다.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는 공주님이 저에게 닿을 수 있길 바라며, 그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곳은······ 어둠이 적고 햇볕이 잘 들겠지요. 조금 덜 차갑고, 조금 더 따뜻하겠지요. 저희가 있는 이 세상보다······.

그녀는 스테이지에서 만났던 랭커스터를 떠올렸다.
랭커스터는 분명 ‘그곳’에서 다시 만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일까. 랭커스터는 이 전당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우리가 정말, 그 날의 일을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일까.

“······설마, 어떻게 그러겠어.”

레이첼이 고개를 내저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위에 누가 계시는군요.”

그때, 아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레이첼은 듣자마자 음색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세히트 경이신가요?”
“오,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람은 잘 기억하는 편입니다. 목소리든, 얼굴이든.”
“대단하시군요.”

세히트가 박수를 쳤다. 레이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세히트 경은 스테이지에서 무엇을 하셨나요?”
“저희는 뭐 별게 없었습니다. 굶주림에 시달렸을 뿐이지요.”
“아······.”

레이첼이 작게 웃었다. 자기 혼자만 그랬던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괜찮아요. 클리어 목표는 저희가 어느 정도 알아냈으니까. 적당히 쉬었다가 함께 진입해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매번 도움만 받는군요.”
“뭘요. 동맹이잖아요.”

그때 세히트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했다.

“음, 저분이 Xtra였었죠?”
“네?”
“저기,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 말입니다.”

레이첼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세히트의 말대로, 연꽃 가면을 쓴 김하진이 유연하와 함께 있었다.
유연하가 먼저 무어라 말을 했고, 김하진도 무어라 대답을 했다. 너무 멀어서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것보다, 둘이 서로 아는 사이였나? 레이첼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세히트가 말했다.

“유연하 팀장과도 안면이 있는 듯하군요. 참 신비한 사람입니다. 저 가면 속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그런가요. 그럼, 저는 이만.”

레이첼은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방 안으로 돌아왔다. 발코니 문을 꽝- 닫고 내부를 서성이다가 홀(Hall)로 나갔다.
그렇다, 왕실 길드의 숙소에는 이제 홀(Hall)이 생겼다. 어마어마한 공적치를 쌓은 Xtra가 입장한 덕분에, 왕실 길드의 숙소 자체가 성처럼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집무실을 포함한 방은 스물네 개에, 세 층수나 되고, 하인 열 명도 자체적으로 고용되었다. 따라서 누군가를 손님으로 부를 수도 있으며, 숙박료를 받고 장사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지금은 현 동맹 라우슬라이퍼가 그 ‘손님’들이다.

“그러니까, 거기는 마나가 없다고.”
“마나가 없는데 언데드 놈들은 어떻게 조지지?”
“글쎄다. 아니, 마나가 없는데 언데드 소환을 어떻게 해?”

단원들은 숙소의 응접실에 모여서 얻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레이첼은 그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집무실로 향했다.

“······신기하다.”

무슨 중세의 영주나 쓸 법한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품속에서 자물쇠가 달린 수첩 한 권을 꺼냈다.
[일기장]

일기를 쓰면 심리적인 안정에 도움이 되리라는 조언을 받은 이후, 6개월 동안 억지로나마 이어온 습관이었다.
레이첼은 책상에 놓인 깃털펜을 쥐고, 오늘과 어제 있었던 사건과 자신의 감정들을 모두 적어갔다. 그렇게 글을 쓰고 있자니, 답답했던 마음이 느릿느릿 녹아내리는 듯했다.

“후우······.”

9페이지 분량으로 일기를 마무리했을 때, 시간은 벌써 30분이 지나 있었다.
레이첼은 일기장을 덮은 뒤 스마트 워치로 논문을 펼쳤다. 김하진이 제출한 첫 번째 시험의 답안지였다.
그것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고민하고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스르륵— 집무실의 책상에 엎드렸다.

새근······ 새근······.

집무실에 작고 고른 숨결이 희미하게 울린다.
유독 피곤하고 지난했던 탓일까.
그녀는 조금 이상한 꿈을 꾸었다.

< 몽중화 (22) > 끝

< 몽중화 (23) >

“······죽겄다.”
“후아······.”
“아이고 삭신.”

총 스물셋의 단원은 공터에 둘러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전당의 문자가 스마트 워치에 떠올랐다.

[클리어 목표 달성 — ‘멸망을 노래하는 결사대’ 처단.]
[‘라우슬로이퍼’와 ‘영국 왕실 길드’의 동맹이 ‘두 번째 시험 — 꿈속의 고향’을 통과합니다.]
[공적치가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분배됩니다.]
—공적치 순위—
1. 레이첼
2. 세티엔
3. Xtra······.

어두운 풀숲에 언데드의 시체들이 가득했고, 검붉은 피가 눌어붙어 악취를 풍겼다. 이곳저곳에 뜯긴 살점과 팔다리가 널브러졌다. 그토록 고약한 곳에서도 단원들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 기진한 터라 풍경의 잔악함을 불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두 번째 시험은 그만큼이나 힘겨웠다.
물론 주술사들이 언데드를 소환하리라는 예상은 했다. 그런데 설마 죽음의 기사(Death Knight)까지 불러들일 줄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울과 좀비를 비롯한 졸병 무리의 숫자는 가히 무량대수에 가까웠다.

“······역시, 큐브 2등 레이첼이네요.”

라우슬로이퍼의 ‘틸마’가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틸마는 동안의 미소가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레이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겸손한 척했지만, 사실 이번 승리에는 그녀의 공헌이 지대했다.
마나가 없는 세상에서 언데드가 움직일 수 있는 이유— 그 ‘연료’가 인간의 피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도 그녀였고, 혈액이 보관된 우물을 찾아내어 정령의 힘으로 모조리 증발시킨 것도 그녀였다.
따라서 이번 승리에 레이첼의 기여도가 1위인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아마 레이첼이 없었더라면, 장기전에 시달리다 패퇴했거나 아사했겠지.

“······그리고.”

틸마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없었다. 용병 주제에 웬만한 영웅보다도 맹활약한 Xtra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틸마는 흔적 없이 쇄도하던 화살의 궤적을 떠올렸다.
치열하게 흐르는 전투의 한복판에, 차마 포착하지 못한 공격이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순간마다 Xtra의 도움이 있었다. 그의 화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적만을 꿰뚫었다.

“용병은 없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왜 실력이 출중한 사수가 최전선의 전사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지, 틸마는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용병, 저희 용병이요?”

부상자를 치유하던 페르민이 손을 탁탁 털어내며 묻자, 틸마가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네. 소문으로는 백두산에서 왔다고도 하던데.”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의외로 큐브 선후배 관계였다.

“흐흐. 저희도 잘 모릅니다, 그런 건.”
“그래?”

틸마가 뒷머리를 쓸어 넘기며 레이첼을 보았다.
Xtra와 레이첼 사이에 산적한 소문들은, 차마 물을 수도 없는 루머였다. 하여 틸마는 그저 헛기침으로 말을 삼켰다.

“여기, 이거 받으십시오.”

그때 세티엔이 레이첼에게 무엇인가를 건넸다.

“뭔가요?”
“데스나이트의 시체에 있었습니다. 입장권이라고 합니다.”
“······입장권이요?”
“예. 이걸 사용하면 이 스테이지에 다시 입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스테이지에 무슨 볼 일이 있다고 다시 입장해? 레이첼이 의아해하던 때였다.
휘리릭— 어디선가 와이어가 날아와 입장권을 훽 낚아챘다. 흠칫 놀란 레이첼은 시선을 올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Xtra가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입장권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이건 내가 가지겠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무슨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뭐야. 지가 무슨 배트맨이야?”

틸마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원래 저래요. 뭔가 중2병 쎄게 걸린 것 같아.”

페르민이 쿡쿡 웃으며 틸마의 어깨를 두드렸다.
때마침, 주변의 전리품들을 모조리 갈무리한 마커스가 나타났다.

“자! 다들 모이세요 모여,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분배 시간입니다~”

전리품은 상당히 많았다. 당장 이 비밀 결사 녀석들이 뒤집어쓴 로브, 지팡이, 그리고 데스 나이트의 두개골·뼈·갑옷·검, 마찬가지로 듀라한의 갑옷·검·뼈······.

언데드의 시체는 조금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만, 정화 작업만 제대로 하면 충분히 좋은 장비로 만들 수 있다.

어디 괜찮은 물건 있나— 레이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심히 살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레이첼은 잠에서 깨어났다.

“······?”

눈을 뜨자 샹들리에가 보였다. 등판도 푹신했다.
부단장의 개인실이었다.
어젯밤 나는 분명 집무실의 책상에서 잤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페르민이 옮겨준 걸까? 아니면, 설마 그가······?

레이첼은 생각을 그만두고 몸을 일으켰다. 괜한 망상에 붉어진 얼굴을 팡팡 두드린 뒤 밖으로 나왔다.

영국 왕실 대저택의 홀에는 하인들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어, 부단장님! 같이 게임이나 하실래요?”

문이 활짝 열린 휴게실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마커스가 손을 흔들었다. 레이첼은 갸웃거리며 그쪽을 보았다.
왕실 단원인 페르민과 마커스가 라우슬로이퍼의 틸마, 마리츠와 함께 포커판을 벌이고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에이~ 같이하시지~”

레이첼은 아쉽지만 사양하고 문 앞에 섰다.
끼이이익—
별생각 없이 손잡이를 당겼다.

“하아아암······.”

화려하게 치장된 문 너머, 하품을 하면서 발을 내디뎠던 레이첼은 문득 풍경의 이상함을 깨닫고 멈춰 섰다.
노면에 웬 돌덩어리가 징검다리처럼 박혀 있었다. 레이첼은 그 동그란 돌들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

문밖은 전당과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문자 그대로 ‘다른 세상’이었다.
레이첼은 돌길 옆에 드리운 정원과, 그 앞으로 드러난 세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언덕 아래 키 작은 벽돌 혹은 목조 주택들이 늘어섰고, 마차와 사람들이 바쁘게 나다니는 상업지가 있었다.
적어도 ‘현대’라고는 부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멍하니 생각하는데 위에서 목소리가 내려왔다.

“이게 세 번째 시험이라네.”

레이첼은 흠칫 놀라 그곳을 올려다보았다.
정원 한편에 곧게 선 느티나무의 꼭대기에 김하진이 앉아 있었다. 왜인지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안색이었다.

“또 시계 안 보셨나?”

그가 쓰게 웃으며 스마트 워치를 툭툭 두드렸다.
레이첼은 급히 스마트 워치를 켰다.

[두 번째 시험을 끝낸 자들에 한하여 세 번째 시험을 시작합니다.]
[세 번째 시험 — 뒤섞인 이야기]
[1차 목표 — 당신은 명성을 쌓아 왕의 성에 초대되어야 합니다!]
[팁 — 왕은 예술과 무술을 좋아합니다!]
[현재 명성치 — 1%]

“신기하죠? 저 앞은 거의 중세예요. 르네상스인가? 아무튼, 반지 원정대에서나 보던 세계예요.”

저 도시에는 화가도 있고, 마법사도 있고, 주술사도 있고, 검사도 있고, 상인도 있다.
그러나, 오직 판타지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대도 뒤섞여 있어요.”
“현대요?”
“네.”

그가 힘 없이 말을 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복잡한 얼굴이었다.

“저 먼 곳에 다리가 있어요. 다른 대륙과 이어지는 다리. 그곳은 우리 현대와 닮았어요. 아니······ 아예 현대를 재현한 공간 같기도 해요.”

축 처진 목소리.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던 레이첼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벼락처럼 일었다.

“혹시, 그곳에는 영국의 건물도 있나요?”

레이첼이 사뭇 심각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김하진은 미간을 좁힌 채 먼 곳을 내다보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멀긴 하지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요. 빅벤······ 비스무리한 것이 보여요.”

레이첼은 심장이 내려앉는 추락감을 느꼈다.
랭커스터가 이곳에서 뭘 원하는지, 또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드디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하진이 스치듯 말했다.

“햄프턴 궁전도 있네. 확실히 영국이구나.”

순간 레이첼이 입술을 짓씹었다. 김하진은 그런 그녀를 유심히 살피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햄프턴은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아뇨.”

레이첼의 날 선 목소리가 김하진을 막아 세웠다.

“예?”
“······그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듣고 싶지 않아요.”

그날의 이야기는 세상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타인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그 날을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격이 없는 사람은, 그 일을 입에 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데 돌연, 김하진이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렸다.

“싫은데.”
“······예?”
“내가 왜.”
“······뭐, 뭐라고요?”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레이첼은 분노보다도 어이가 없어서 눈만 깜빡거렸다.

“답답하네······.”

김하진은 다만 레이첼이 답답했다. 레이첼은 그 날의 트라우마에 지나칠 정도로 얽매여 있었다.
물론 자신이 작성한 설정이긴 하나—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갑갑했다.
등장인물의 트라우마는 ‘극복하기 위해’ 설정된 난관일 터인데, 도대체가 극복할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있으니.

“너는 도대체 왜, 너한테만 짐이 있다고, 전부 다 네 탓이라고만 생각하는 거냐.”
“······.”
“너 혼자만 비련의 주인공이라서, 너 혼자만 그 멍에를 감내해야 된다는 거냐? 네가 영화배우야? 온 세상이 영화야?”

레이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싸우기 싫어서 그저 입을 다물었다.
김하진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레이첼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내가 여태 지켜본 너는······ 너무 한심해. 아니, 한심을 넘어 절망적이지. ······팬카페도 탈퇴할까 생각 중.”

까드득— 레이첼의 이가 갈렸다.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김하진은 레이첼을 그렇게 놔둔 채 먼저 길을 떠났다.

“······.”

레이첼은 몸을 떨면서 시선을 바닥에 처박았다. 작은 핏물이 물방울처럼 내려 노면에 닿았다.
너무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거리로 나왔다. 중세의 거리에는 여러 상점들이 많았다.
마법 물품, 괴수 사체, 정육점 등등.
또한 지하 투기장과 아카데미를 비롯한, ‘명성치’를 벌 수 있는 곳도 꽤 많이 보였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에일린을 발견했다.
싱글벙글한 에일린은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구경하기 바빴다. 반면 레이첼은 나와 꽤 먼 곳에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길을 걷고 있었다.

“하아.”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괜히 내 기분이 별로라서, 레이첼의 신경까지 긁고 말았다.
어쩌면 화풀이였을 지도.
여태 레이첼의 행동이 답답하긴 했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갈굴 필요는 없었는데.

[‘꿈속의 고향’ 입장권]

아무튼, 전부 이 입장권 때문이다.
꿈속의 고향. 그러니까 두 번째 스테이지에 머무를 수 있는 입장권.
처음에는 별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어젯밤부터는 자꾸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혹시, 만약에라도 저 스테이지의 저편에 내 엄마와 아빠가 있다면, 내 친구들이 있다면, 내 신분이 아직 남아 있다면.
비록 그곳이 가짜로 구현된 세상에 불과하다 하여도, 나만 그곳을 진짜로 여긴다면······

“그래그래! 다들 아무나 신청하라고! 어이 거기! 자네 몸 좋은데?!”

웬 거대한 외침이 내 상념을 잘라냈다. 나는 시선을 그쪽으로 두었다.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시장판의 단상 위에, 커다란 나무 팻말이 꽂혀 있었다.

[제13차 전국 대회 개최]
[참가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신청서를 작성하도록!]
—대회 목록—
1. 무술 대회
2. 궁술 대회
3. 사냥 대회······.

“참가 신청할게요.”

익숙한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흘러들었다.
레이첼이었다. 레이첼은 근처에 있는 나를 철저히 못 본 척했다.
역시 햄프턴을 언급한 것은 악수(惡手)였을까.
아무렴 내가 설정한 내막이긴 하지만, 지금의 나는 햄프턴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레이첼 입장에서는 같잖았을 수도 있겠지.
나는 일단 뒤로 물러섰다.

“흐음······.”

어떤 대회에 참가할까, 굳이 대회에 참가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하는데 문득 이름 모를 화가가 보였다. 화가는 강가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캔버스에 번지는 화폭은 썩 아름다웠다.

“······.”

나는 내 손을 보았다. 이 손은 어린 드워프의 손재주가 일렁이는 어마어마한 자산이다······
잠깐, 왕이 예술을 좋아한다고 그랬지?

[미술 상점]

주변을 둘러보니 미술품 상점은 금세 발견되었다.
곧장 들어가려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저기요.”
“······어? 뭐야.”

유연하였다.
아니, 얘네는 두 번째 시험을 벌써 클리어한 거야?

“잠시, 이곳으로 좀 와보세요.”

유연하가 근처 골목으로 턱짓했다. 나는 고민 없이 그녀를 뒤따랐다.
그 순간,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뒤통수를 노려보는 뾰족한 눈빛······ 그러나 금세 사그라들었다.
나도 굳이 신경 쓰지 않고 유연하 앞에 섰다.

“왜.”
“······워치. 내밀어봐요.”

손목을 내밀었다. 유연하도 손목을 뻗어 스마트 워치 끼리 맞대었다. 그것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뭐야 이건.”
“바깥에서 얻은 소식이에요. 위성으로 찍은 사진이죠.”

전당 외부의 사진 열여덟 장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 어떻다는 거······ 아?

“······사람과 마력이 찍혔네.”
“네. 이 전당에는, 우리보다 먼저 출입한 사람이 있는 거예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

내가 침묵하는 사이, 유연하는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저는 이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되어요. 저 나름 이 스테이지를 조사해봤는데, 총 네 개의 대륙이 있어요. 대륙이라기에는 전부 경기도 크기쯤 되지만. 아무튼, 그 대륙마다 왕이 있겠죠. 그 왕이, 아마 이들이 아닐까 싶은 거예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유연하를 바라보았다.

“만약 네 말이 맞다면, 왕 한 명이 누군지는 알 것 같아.”
“에, 누구요?”
“······랭커스터.”

유연하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 되물었다.

“랭커스터 정도면 그럴 수 있겠네요. 근거는요?”
“영국이 구현되어 있어. 햄프턴도.”
“······근거는 확실하네요. 알았어요. 일단 먼저 가 있으세요. 그런데, 명성 쌓을 방법은 알아뒀어요?”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대충은.”
“뭔데요?”

유연하는 호기심이 동했는지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뒷목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화가?”

이 한마디 하는 게 왜 이렇게 쑥스럽지. 화가가 너무 예술적인 직종이라서 그런가?

“화가······ 요?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시겠다고?”

나는 손가락으로 O 모양을 만들었다.
예상대로, 유연하의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흐, 흐흐······ 저놈이다······.”

깊숙한 골목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현상금 수배지와 남자의 얼굴을 대조하며 히죽 웃었다.
틀림없다.
놈의 가면, 인상착의, 전부 수배지 그대로다.

[현상금 ─ 5억 원]

생사 구분 없이, 잡아 죽이기만 하면 5억 원.
사냥꾼은 흥분에 몸을 떨며 침을 삼켰다. 벼려진 단검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목표물의 행적을 유심히 관찰하며 뒤를 쫓았다.

가장 절호의 순간,

그 기회를 노려 놈의 목을 앗아가겠다.
네가 죽는 것도 모르게 죽여주겠다.

스으으읍······.

입맛을 다신 살수는, 그늘 속에 몸을 숨긴 뱀처럼 움직였다.

< 몽중화 (23) > 끝

< 몽중화 (24) >

유연하와 함께 미술용품점으로 들어왔다. 깔끔하게 정돈된 내부에 이젤과 캔버스를 비롯한 도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의외로 고급스러운 느낌의 상점이었다.

“진짜 그림 그리실 건가?”

물건들을 유심히 살피는 나에게 유연하가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붓과 팔레트, 이젤, 캔버스, 유화 등 필요한 도구들을 쥐었다.

“얼맙니까?”

한 아름 짊어지고 카운터로 가서 물었다.
베레모와 팔토시 차림의 사장이 약간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림, 그릴 줄은 아시오?”

나는 그저 웃었다. 솔직히 그릴 줄은 모르지만, 일단 그려보면 잘 그릴 수 있을 거였다.

“그릴 줄 아니까 사지요.”
“······아니, 가면은 왜 쓰고 있으시오? 뭐 나병이라도 걸리셨나?”
“컨셉이니까 계산이나 해주시지요.”

사장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물건을 아무한테나 팔지 못하오. 법적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소.”
“아니, 진짜 그림 잘 그린다니까요? 제가 ‘아무나’가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

사장이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눈을 가늘게 좁히고 쏘아보는 모양새가, 조금 더 개기면 경찰이라도 부를 기세였다.
나는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일단 물건을 판매하세요. 그러면 내가 그림을 그려 오겠어. 그것을 보고 당신이 판단해서, 썩 좋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면 됩니다.”
“······흠. 자신이 있나 보군?”
“당연히.”
“오케이. 알았소.”

내가 전당 카드를 내밀자 사장이 훽 낚아챘다.

“얼마-”
“300만 원. 원래 30만 원이지만, 도망갈까 더 긁었소. 그림을 그려서 가져오면, 그리고 그게 내 마음에 든다면, 그때 전액 환불을 해드리리다.”

300만 원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주먹이 날아갈 뻔했지만, 전부 들으니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계산을 마친 나는 유연하를 바라보았다. 유연하는 왜 자기를 보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델이 필요한데.”
“······뭐요?”
“여 안에 들어갈 얼굴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품에 안긴 이젤과 캔버스를 툭툭 두드렸다. 유연하가 세상 어이없다는 얼굴로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 내가 왜-”

······그렇게 5분 뒤, 우리는 근처의 경치 좋은 숲으로 나왔다.

나는 유연하를 수풀에 앉히고 이젤을 설치했다. 그 위에 캔버스를 올리고 팔레트에 붓을 짰다.
색과 색을 섞고 배합하는데 유연하가 투덜거렸다.

“못 그리기만 해봐요. 만약 그림이 조금이라도 삐뚤빼뚤하다? 앞으로 내 얼굴 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아, 혹시 추상화를 그렸다는 변명은 하지도 마요. 나는 무조건 정석만 취급-”
“아 좀, 알았어. 시끄러. 말이 많냐.”

씩씩거리는 유연하에게 면박을 준 뒤, 본격적으로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휙휙- 그야말로 일필휘지, 거침없이 휘갈기며 물었다.

“근데 너희 두 번째 시험은 어떻게 클리어했냐?”
“나윤이가 다 했죠 뭐.”
“채나윤이?”
“네. 나윤이는 이제, 어떤 경지에 다다른 것 같아요. 실력으로 따지면 이미 상격 이상이에요. 반드시, 최상격이 되겠죠.”

유연하는 채나윤이 보였던 무위(武威)를 떠올리는 듯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는 그녀가 얼만큼 강해졌는지 몰랐다. 검으로 전향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유연하가 약간 뾰루퉁한 눈으로 말했다.

“심드렁하시네. 당신이 발견한 재능 아니에요?”
“······내가?”
“네. 그쪽이 나윤이 검사로 만들었잖아요.”
“아~”

조금 먼 옛날을 떠올리던 나는 작게 웃었다. 그러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붓을 움직였다. 유연하도 한숨을 내쉬더니 제대로 포즈를 잡았다.

붓은 내 시선을 따라,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와 여인의 분위기를 보다 조화롭게 재구성하며 캔버스에 이식했다.


채나윤은 세 번째 시험장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왕의 거처인 왕성, 마법사들이 머무는 마탑, 인재를 교육하는 아카데미, 예술인을 중점적으로 양성하는 아티스트 홀까지.
웬만한 기관과 시설은 모두 눈으로 확인했다.

“대회 참여가 이제 곧 마감된다! 어서 신청해라!”

그러다가 숙소 근처로 돌아오니 웬 웃통 벗은 남자가 난리를 치고 있었다. 힐끗 보니, 유연하가 꼭 참가하라 말했던 ‘무술 대회’였다.

“아. 저거 해야지.”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네.
참가 신청을 하려고 가는데, 근처 벤치에 침울하게 앉아 있는 한 녀석이 눈에 띄었다. 품격 있는 외모, 라는 묘사가 썩 어울리는 금발의 멍청이였다.

“······쟨 또 저기서 뭐 해?”

그냥 지나칠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세계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녀석이다. 일단 뭐 때문에 똥 씹은 얼굴로 있는지는 물어봐야겠지.

채나윤은 슬그머니 다가가 레이첼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레이첼은 자신이 앉은 것도 모른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크흠.”

헛기침을 하니 그제서야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을 바라본다.
채나윤이 퉁명스레 물었다.

“너 여기서 뭐 하냐?”
“······.”

레이첼이 힘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말할 여력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채나윤이 제일 싫어하는 무기력한 낯짝이었다.

“뭔데?”
“······.”
“왜 갑자기 병아리가 됐어?”

그때 레이첼의 병약한 목소리가 비죽 흘러나왔다.

“병아리가 아니라 벙어리······.”
“······앗.”

채나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그거나 그거나. 하, 나. 아니, 어이없네. 너, 일부러 웃기려고 한 말 아냐 인마. 근데 그걸, 하~ 나. 야. 내가 진짜 모르는 것 같냐?”

횡설수설이었다. 레이첼의 입이 꾹 닫혔다. 채나윤은 몇 번 더 일부러 무식한 척을 했지만, 레이첼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후.”

채나윤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지금 레이첼이 이렇게 고민할 만한 사안은······ 원래부터 레이첼과 친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자면······ 레이첼의 마음속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야. 너 혹시 김하진이랑 싸웠냐?”

채나윤의 물음에 레이첼이 흠칫 몸을 떨었다.
Xtra가 김하진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지? 레이첼은 가장 먼저 그것이 궁금했다.

“맞네. 뭐 때문에 싸웠냐?”

레이첼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너에 대한 사전 공부를 하고 왔단 말이지. 채나윤이 험험- 헛기침을 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진지한 음색이었다.

“······햄프턴?”

찰나, 레이첼이 몸을 크게 떨더니 채나윤을 돌아보았다.

“맞나 보네. 그 옛날 일을 가지고 왜 싸웠대?”

레이첼은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또한, 누군가에게 묻고 싶기도 했다. 그런 이중적인 마음 속에서 레이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어, 어어. 어 그래. 말해 말해.”

여태 침묵하던 레이첼이 깨어나자 채나윤도 사려 깊게 나섰다.
자세를 바로잡은 채나윤을 보면서 레이첼은 한숨 쉬듯 말했다.

“나는 햄프턴의 비극을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엉? 그걸 네가 왜 책임져야돼? 네 잘못도 아닌데?”

즉답이었다.
레이첼은 움찔 몸을 떨었다. 채나윤은 김하진과 비슷한 말을, 마치 코웃음 치듯 말했다.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뭐? 와, 얘 웃긴 애네, 이거. 야. 너, 내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솔직히 그 사건은 모르는 사람 없잖아.”

순간 레이첼의 말문이 막혔다. 설마 채나윤이 직접 ‘그 사건’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꺼낼 줄은 몰랐다.
이 아이는 벌써 전부 괜찮아진 것일까?
채나윤은 심통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면 우리 엄마 죽은 것도 나 때문이겠네? 내 잘못이겠네? 너 패드립하는 거냐 지금? 어? 왕실 길드 부단장이 지금? 어?”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럼 뭔데? 뭐냐고.”

채나윤의 짓궃은 공세에 레이첼은 식은땀을 흘렸다. 연신 입술만 뻐끔뻐끔 거리다가 침을 꼴깍 삼켰다.

“풋.”

채나윤이 히죽 웃더니 레이첼의 어깨에 탁 손을 얹었다.

“그니까, 네 잘못 아니라고 그거. 억지로 짊어질 필요가 왜 있어? 아, 보니까 김하진도 나랑 비슷한 말 했겠네. 맞지?”
“······.”
“아니, 나도 네 심정을 이해하기는 해. 원래 사람은 뭐, 다 자기 불행만 제일 크게 생각하니까. 나도 예전에는 그랬거든.”

채나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노을, 비늘처럼 반짝이는 햇볕이 지상을 적셨다.
문득 김하진이 떠올랐다.
나는 아직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지 모른다. 동시에 나는 그의 속마음을 나 혼자만 알고 싶고, 누구에게도 양보하기 싫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김하진은, 레이첼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채나윤은 서서히 눈을 내려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걔도 너만큼 커다란 상실을 겪었으니까, 그러니까 자꾸 스스로만 탓하는 네가 답답했겠지.”

스치듯 말하고 나서, 레이첼이 뭔가를 묻기 전에 화제를 전환했다.

“아, 것보다. 너도 무술대회 신청했지?”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신청할 건데. 나 만나면 웬만하면 기권해라잉? 나는 너 따위가 상대할 수 있는 몸이 아니거덩.”

채나윤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레이첼의 등판을 두드렸다.
팡팡팡— 꽤 따가운 통증에 레이첼이 미간을 세모로 좁혔다.

“아 하지 마.”
“알겠냐 아가야?”
“됐어. 놔.”

레이첼은 제 어깨를 감싼 채나윤의 손을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나윤도 따라서 그녀의 옆에 섰다.
그렇게 나란히 걷다가, 문득 어떤 사람이 눈에 띄었다.

“어, 뭐야. 쟤들 뭐해.”

채나윤이 어딘가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경치 좋은 정원에, 가면을 쓴 김하진과 유연하가 있었다. 유연하는 모델이 되어 땅에 앉았고, 김하진은 이젤 앞에서 그녀와 풍경을 그렸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저것들 지금 씨, 뭐하는, 저 미쳤나······.”

채나윤은 거의 분기탱천하듯 뇌까리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레이첼의 얼굴이 살얼음판처럼 날카롭게 일어나 있었다.

“야, 야.”

채나윤이 툭툭 치자 표정을 풀긴 했지만,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었다.

“갈게.”

레이첼은 채나윤을 힐끔 보더니 그렇게 한마디만 하고 떠났다.
상당히 서늘한 분위기로 멀어지는 레이첼을 지켜보면서, 채나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말은 놨네. 이제 조금만 더 친해지면 되겠다.”

소기의 목적 중 하나— ‘일단 레이첼과 어느 정도까지는 친해진다’는 달성.

“아니 근데 쟤네들은 뭐 하는 거야 씹.”

그러다 갑자기 또 화가 나서 유연하와 김하진을 보았다.
자연스레 포즈를 잡은 여자와 그녀를 그리는 남자. 저 두 연놈은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야 지금······?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회 참가를 마감하겠다—!”
“······어? 아, 아 씨바 잠깐만요! 나 그거 해야 되는데!”

채나윤은 황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다 됐다.”

약 60분 만에 유화가 완성되었다. 어린 드워프의 손재주로도 그림은 썩 익숙하지 않아서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외에 유화 말리는 시간도 필요하긴 하지만 성흔의 마력으로 스킵했다.

“야, 됐어. 일어나.”
“······어, 예. 그래요.”

꾸벅꾸벅 졸던 유연하가 아주 태연한 척 눈을 떴다.
유연하는 후우- 숨을 깊게 내쉬고 일어나서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반쯤 감긴 눈에 잠기운이 가득했다.

“흐암······ 그럼 전 이만 갈게요. 당신 때문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썼어.”

유연하는 내 그림을 확인도 하지 않고 돌아가려 했다.
나는 그렇게 떠나가려는 유연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그림 안 봐?”
“아 그걸 내가 왜 봐요. 시간 없어요.”

유연하가 약간 짜증 난 얼굴로 스마트 워치를 톡톡 두드렸다.
아니, 그래도 감상평은 들려줘야 할 거 아니야. 나는 이젤에 얹어놓은 캔버스를 그대로 들어서 유연하에게 주었다.

“아 됐다니까요. 뭘 보라······.”

유연하의 말이 중간에 멈췄다. 그녀는 멍하니 캔버스를 바라보다가 돌연 얼굴을 붉혔다.
화사한 정원과 흑발의 여인의 차가운 조화.
화풍이 인상파인지 야수파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생각해도 썩 잘 뽑힌 그림이었다.

“저······.”

유연하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왜.”

내가 되묻자, 유연하는 슬그머니 그림을 들어서 제 품에 안았다.

“······혹시, 큐레이터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일주일이 지나, 거의 모든 길드가 세 번째 시험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명성치’를 올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자원봉사를 하는 길드도 있었고,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는 길드도 있었으며, 던전으로 나가 공적을 노리는 길드도 생겼다.
그러는 와중에 무술 대회, 궁술 대회 등등······ 여러 대회의 예선이 시작되었으므로, 기한 내에 참가 신청을 한 소수의 길드는 대회에 집중했다.
창조주의 성은, 정수의 해협, 적막한 달,
혹한의 안식, 더 제너럴, 레이크 포드,
중화제국, 금화여순, 펜저 부르크, 라 길드 뤼미에르······ 쟁쟁한 길드 간의 각축전이 서서히 시작될 조짐이었다.

“······일단, 후원자를 찾고 있어요.”

나는 궁술 대회 예선을 끝내고 돌아와 유연하를 만났다. 유연하는 포장한 유화 두 점을 제 옆구리에 소중히 껴안고 있었다.

“후원자?”
“네. 일단 후원자가 있어야 명성치가 높아지거든요. 왕이 예술, 중에서도 그림을 특히 좋아한다고 하니, 귀족들도 화가 후원에 굉장히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뭐, 나야 좋지. 근데 너는 안 바쁘냐? 정협에서는 네가 제일 중요하잖아.”

정수의 해협은 지금 상당히 바쁜 축에 속했다.
여러 대회의 예선이 시작되었고, 당장 지역 귀족과의 인맥 쌓기뿐만 아니라, 정보망 구축 등에도 열을 올려야 할 테니.

“바쁘긴 한데, 저도 여기에 매달려야 할 이유가 생겼어요.”
“엉? 뭔데?”

유연하가 생각만 해도 짜증난다는 듯 입술을 짓씹었다.

“······채나윤이 대회 참가 신청을 못 했거든요.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진짜.”

세상 멍청하다는 듯이 뇌까리는 투가, 저번에 ‘나윤이는 이제, 어떤 경지에 다다른 것 같아요······’라고 자랑스레 말하던 목소리와 선명하게 대조되었다.

“씨 짜증 나. 아무튼. 따라오세요.”
“응? 나는 왜 또.”
“여기 귀족들은 화가가 직접 찾아오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미팅 자리에 함께 가야 해요.”

유연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아, 잠깐만요. 그전에.”

유연하가 스마트 워치를 톡톡 두드렸다.

[정수의 해협 소속 대표자 ‘유연하’가 영국 왕실 길드의 ‘Xtra’에게 개인 동맹을 신청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메시지가 도착했다. 유연하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동맹 받으세요’라 말했고, 나는 그대로 ‘예’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흐으음······ 이건 일하는 거 보고 받아줄게.”
“······예? 뭐라고요?”
“뭐가. 당연한 거 아니냐? 지금은 내가 갑이잖아. 일단 안내부터 해.”
“아니······ 예?”
“싫어?”
“······와.”

유연하는 눈코입을 죄다 벌렁거리며, 기가 막히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채나윤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진짜 가지가지······ 따라와요!”

그러다 이를 콱 깨물더니 씩씩대며 안내를 시작했다.

< 몽중화 (24) > 끝

< 몽중화 (25) >

이름 모를 귀족의 성문 앞에 섰다. 규모가 있는 성이었지만 유연하는 터럭만큼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대문을 지키는 경호병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말했다.

“저는 오늘 약속을 잡은 유연하랍니다.”
“······.”

두 명의 경호병이 유연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유연하?”
“네에.”
“흠.”

그들은 서로 무어라 속삭이다가 수정 구슬을 꺼냈다. 구슬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손님이시다—!”

경호병의 우렁찬 외침이 하인들을 불러냈다.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타난 그들은 유연하가 짊어 멘 그림 두 점부터 대신 들었다.

“으음. 반갑습니다. 케이든 가의 집사 루흐크입니다.”

정문에 서자 집사가 우리를 맞이했다.

“저번에 가주님께서 말씀하셨던 화가분들이시군요.”
“아. 화가는 저고, 얘는 제 매니저.”

나는 유연하와 선을 그었다. 아무렴 화가로서 매니저와 같은 취급을 받을 수는 없으니.

“하.”

유연하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집사는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 가면은 벗어주셔야 합니다.”
“······.”
“하~”

유연하는 코웃음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방금 것이 ‘재수없음’이었다면 이번에는 ‘통쾌함’.

“가주님 앞에서 벗으면 안되겠습니까? 제가 신분을 들키면 조금 곤란한 처지라.”

두 번째 스테이지에서는 가끔 맨얼굴로 있었지만, 그때는 감시의 눈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애당초 침범한 랭커스터의 세작들을 모두 처단한 이후였으니.
그러나 이곳은 아니다. 온 사방에 다른 길드와 랭커스터의 눈과 귀가 산적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집사가 정문을 열었다.
성안의 로비는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대리석 벽면이 샹들리에의 불빛을 반사하는 듯 내부 전체가 밝고 화사했다.
유연하는 초장부터 꽤나 유력한 가문을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가주님께서는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집사의 어조는 공손하고 정중했다. 우리는 그를 따라 회의실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 2층 회의실의 문 앞에 선 집사가 먼저 노크했다.
똑똑-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라 하게.

각본처럼 알맞게 이어지는 대사.
집사는 격조 있는 몸짓으로 문을 열었고, 회의실의 상석에 호방한 인상의 귀족이 앉아 있었다. 구레나룻의 털이 턱 끝까지 이어지며 상당히 마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귀족은 책을 읽다 고개만 살짝 들어 우리를 보았다.

“······자네가, 로한이 말한 화가인가?”

음색은 박한 느낌의 쇳소리였다. 예술 따위보다는 무예에 어울리는 스타일이었다.
유연하가 평온하게 답했다.

“예.”
“흠. 그래. 나는 리튼 데 케이든. 케이든 백작이라 부르면 되네. 자네들 이름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되니, 일단 물건부터 보여주시게”
“알겠습니다.”

유연하가 유화의 포장을 뜯고 귀족에게 내놓았다.

“호오······.”

하나는 전당의 전경을 담은 풍경화, 다른 하나는 노을에 젖은 사람을 그린 초상화.
참고로 ‘유연하 초상화’는 유연하가 개인 소장하기로 했다.

“겉보기에는 과연 흠이 없구만.”

귀족은 만족스레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하나, 가장 중요한 관문이 남아 있지. 어이?”

짝짝- 귀족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서재의 뒤편에서 다른 남자가 등장했다.
양손에 장갑을 끼고 머리에는 웬 밴드를 두른 ‘감정사’였다.

“감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약간 의아한 상황이었다.
감정사는 보통 진품을 감정하기 위해 있는 자다. 그런데 내 미술에는 진품 가품 따질 건덕지가 없다.
애당초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진품 가품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스며든 마력을 확인하시는 건가요?”

그때 유연하가 뒷머리를 스쳐 올리며 물었다.
귀족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지. 아무렴, 누가 그림을 그림 보고 사나? 좋은 화폭에는 마력이 내재되어 있지. 그리고 마나를 퍼트려 대기 중의 마나 농도에 영향을 끼치지. 그게 가장 중요한 게야.”

그제서야 나도 이해했다.
명인 혹은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작품에는 반드시 마력이 서린다. ‘행위’ 자체에 마력을 깃들게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내공과 경력을 지닌 자만이 가능한 경지다.

“······이럴, 이, 이게?”

그런 점에서, 내 그림을 감정하던 사내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유연하가 의문스런 눈으로 감정사를 보았고, 귀족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이 되어 엉덩이를 반쯤 일으켰다.

“당신. 무명 화가 맞소?”

감정사가 기겁하다시피 물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감정사는 입술만 뻐끔거릴 뿐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왜? 뭐가 문제인 것이냐?”

케이든의 재촉에 감정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떨리는 성대에서 쥐어짜진 목소리가 가까스로 흘러나왔다.

“이만한 작품은, 제 20년 경력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힙니다······.”

케이든은 그림 한 점당 10억을 주고 샀다.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덕분에 명성은 확실히 얻었고, 나는 약속한 대로 유연하와 동맹을 맺었다.

“자. 수수료 2억 원에 수고비 1억 원.”
“네. 고마워요.”

총 3억 원 수표를 유연하에게 제시했다. 유연하는 만족스레 받아 품속에 넣었다.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물었다.

“넌, 처음부터 마력을 볼 수 있었지?”
“네? 아뇨. 설마요. 저런 감정은 전문적인 교육과 학습을 받아야 가능해요.”
“······그러면 뭐야? 그냥 그림이 좋았어서?”

유연하는 입술에 손가락을 얹은 채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글쎄요. 당신을 믿었던 걸까요. 느낌이 좋았다고 할까요. 그런데 저도, 당신 그림이 그렇게 특별할 줄은 몰랐어요.”
“그래?”
“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감정사까지 감동시킨 거예요?”
“그건······ 일단 영업비밀.”
“풋.”

한 발자국 앞서나간 유연하가 빙글 돌아서 나를 마주 보았다.

“아무튼 오늘, 수고하셨어요. 다음 그림은 또 언제 그릴 계획이에요?”
“글쎄.”
“최대한 늦게 그려요. 일단은 명성을 최대한 부풀린 뒤에, 고객 대기명단을 최소 100명 정도는 만든 뒤에, 그때 비로소 한 점에서 두 점 정도 더 내놓아야 ‘폐하’께서도 관심을 가질 테니.”

과연 유연하다운 전략이었다. 나는 설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유연하는 인사를 하고 총총걸음으로 앞서갔다.
기분이 좋은 듯 발랄하게 걷다가 2억 원짜리 수표를 꺼내더니, 애완견 다루듯 사랑스레 쓰다듬고는 다시 갈 길을 걷는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돌아섰다.


······꿈을 꾸었다. 배경은 어떤 궁전이었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14세기의 건축물. 슬픈 설정이 자리한 공간이었다.

유독 사람이 많은 날이었다. 아이가 있었고, 노인이 있었고, 젊은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궁전 안에서, 혹은 궁전 밖의 정원에서 웃고 떠들었다.

그 화사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 자신을 숨기려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모자를 뒤집어쓴 아이는 젖은 눈으로 궁전을 둘러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곳에서 자신을 낳고 또 돌아가셨으므로, 한 번쯤은 꼭 와보고 싶었다. 그러나 왕실의 모두가 반려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엄마가 죽은 장소인데 왜 내가 가면 안 되지? 엄마가 죽은 곳에서 내가 무엇을 느낄까 봐? 살면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엄마인데?
아이는 오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가출했다. 사실 도망친 것이었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벌인 일이었다······.

아이의 모든 심정이 내게로 밀려들었다.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이의 흉중이 왜 나에게 스며드는지 알 수 없었다.

“······아저씨 괜찮아여? 어디 아프세여?”

그때 아이가 비틀거리는 나의 옷깃을 잡았다. 아이의 말간 얼굴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아득한 의문을 느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아이는 분명 꿈속의 존재일 텐데. 어떻게 나를 볼 수 있고, 어떻게 나를 만질 수 있을까······.

“괜찮아.”
“아닌 것 같은데여. 아프면 병원 가세여.”
“······그래.”
“흐응~”

아이가 손을 놓고 빙글 돌아섰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내 머릿속에 본능에 가까운 생각이 번뜩였다.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아이에게 다가갔다.
부웅— 작고 가벼운 아이의 몸을 번쩍 들어 어깨에 짊어 멨다.

“끄갹!”

아이가 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모야, 놔요!”

아이는 발버둥을 쳤지만 나는 궁전의 바깥으로 내달렸다. 아이가 무어라 소리치고,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고, 경호원이 달려드는 꿈속에서, 나는 말했다.

너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돼. 너와 모두가 위험해져. 나를 따라와야 해. 이곳에 있으면 안 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궁전의 풍경이 새하얗게 으스러져 갔다. 내 어깨 위에서 나를 퍽퍽 때리던 아이도 이 붕괴를 멍하니 보았다. 세상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았다······

“······으!”

레이첼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통증이 올라오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하아, 하아, 하아······.”

또다시 햄프턴의 악몽을 꾸었다. 레이첼은 치미는 구역질을 삼키며 약을 찾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무엇인가 바뀐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몸 상태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

“악몽이······ 아니었지.”

오늘의 악몽은 끝까지 재생되지 않고 무너졌다. 어떤 남자가 끼어들어서 어린 자신을 데리고 도망쳤다.
‘그날’의 반복이어야 할 악몽에,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을 구해준 남자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뭘까.”

뭐긴. 개꿈이지.
레이첼은 이불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옷 차림으로 화장실에 가서 세수부터 했다.
오늘은 대회가 있는 날이니 철저히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128강이라도 방심은 금물.
어푸어푸-
그렇게 레이첼이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는 와중.
자느라 풀어 놓았던 스마트 워치에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전당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 레이첼이 홀 쪽으로 나오자마자 페르민이 맞이했다.

“부단장님! 역시 일어나셨네요~”
“네. 페르민도 괜찮아요? 요즘 진료하느라 바쁘시던데.”

페르민은 불치병이나 난치병에 걸린 주민들을 치유함으로써 공적과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 덕분에 평단원 중에서는 제일가는 에이스로 등극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닷! 그것보다, 부단장님. 이거 보세요. 엑스트라 진짜 완전 개미쳤어요!”

—명성 순위—
1. Xtra : 2,000
2. 김수호 : 1,250
3. 윤승아 : 950
4. 채나윤 : 800
4. 유연하 : 800
───────

“자기 혼자 이천 점으로 일등이에요!”

레이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이게 어떻게?”

엑스트라가 어떤 방법으로 명성을 올렸는지, 레이첼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똑똑— 똑똑— 똑똑—
그때 갑자기 다수의 노크 소리가 울렸다. 전당 쪽, 그러니까 다른 길드의 손님들이었다.
레이첼은 험험,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네. 영국 왕실 길드의 숙소입니다.”

문밖에는 예상했던 것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다. 거의 서른 명은 될 듯싶었다. 개중에서 윤승아와 김수호, 그리고 더 제너럴의 레이건이 가장 눈에 띄었다.
평소의 왕실 길드는 감히 맞이할 수도 없는 거물들이었다.

“음······ 무슨 일로 오셨나요?”

레이첼은 옷매무새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고 화사한 미소를 띠었다.
처음에는 저들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 별건 아닌데요. 레이첼 부단장님. 혹시, 그 용병 Xtra 님은 지금 계신가요?”
“네, 하하. 레이첼 부단장님. 죄송합니다. 사실 그, 저희도 Xtra 씨를 찾고 있는데요······.”
“Xtra 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혹시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윤승아와 레이건은 물론 김수호까지 전부 Xtra를 찾고 있었다.
레이첼은 조금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쓰게 웃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Xtra는 지금 숙소에 없습니다. 궁술 대회에-”
“아, 그래요?”
“그렇구나.”
“그럼 뭐.”
“아이고 근데 숙소가 좋으시네. 잘 지내십쇼.”
“갈게요~”

많았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갑자기 북적거렸다가 또 갑자기 황량해진 곳에서, 레이첼은 혼자 우두커니 섰다.

“······허.”

저도 모르게 맹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여기는 엄연히 ‘영국 왕실 길드’의 숙소인데 Xtra만 찾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부단장은 나인데. 이거 너무 한 거 아니야.

레이첼은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꼈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문을 닫았다.
오늘은 검술 대회의 128강이다. 이런 사소한 일들에 정신이 빼앗겨서는 안 된다.


레이첼은 128강을 끝내자마자 궁술 대회장으로 달려왔다.
대회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면면을 둘러보았더니 역시 윤승아, 레이건, 김수호, 이영한, 유연하, 레프렌, 류 웨이 등등— 거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저들의 목적은 아마 전부 Xtra겠지.

“아무래도, 지금은 공적과 명성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같은 길드원 사이에서도 뭔가 알력이 벌어지고 있어요.”

어느새 레이첼의 옆자리에 앉은 세히트가 말했다.

“또한, 이 스테이지의 일반인, 그러니까 원래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길드원으로 거둘 수 있다고 합니다. 벌써 정수의 해협 채나윤이 흑범 기사단의 상급 기사를 자기 휘하로 넣었답니다.”

놀라운 소문이었다. 레이첼은 세히트 덕분에 몰랐던 정보를 알게 되었다.
채나윤의 머리 회전이 그렇게 빠를 줄이야.

“······그렇군요. 정보 감사합니다.”
“무얼요. 동맹이잖습니까, 저희는.”

레이첼은 대회장에 시선을 집중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세히트가 그녀의 분위기를 살피며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레이첼 씨는 Xtra를 지키러 오신 것입니까? 충분한 공적치를 지불하면 이제 길드 탈퇴도 가능해졌습니다만.”
“길드 탈······ 아뇨. 아뇨 전혀, 전혀요. 저는, 저는 다른 길드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왔습니다.”

레이첼은 눈 하나 깜빡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Xtra가 길드를 탈퇴할 리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사실 왕실 길드가 Xtra에게 준 것은 정말 얼마 없으니까.
레이첼은 초조함을 숨긴 채, 입술을 짓씹으며 대회의 시작을 기다렸다.

─자, 이제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Xtra는 128강의 첫 번째 경기였다.
무대 위로, 연꽃 가면을 쓴 한 남자와 나머지 열다섯 명이 올라왔다.

“아 참. 커피 드시지요.”

그때 세히트가 찻잔에 담긴 커피를 주었다. 마침 입이 심심했던 터라, 레이첼은 감사히 받아서 홀짝였다.

─표적 산개!
“······오?”

궁술 대회의 방식은, 진부한 토너먼트인 검술 대회와 달리 사뭇 신기하고 참신했다.
우선 첫 번째 경기에 참가하는 자가 자그마치 열여섯이나 되었고, 갑자기 지상에서 무엇인가가 파바밧-! 솟아올랐다.

대회장의 모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공으로 솟아오른 무엇인가가 빵-! 하고 터지더니, 웬 종이새들이 꽃가루처럼 번졌다.
처음에는 느릿느릿하던 종이새들은 곧, 말벌보다 빠른 속력으로 창공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저 표적을 가장 많이 격추하는 자가 승리한다!

“우와.”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렀다.
검술 대회와는 다르게, 뭔가 굉장히 보는 재미가 넘치는 대회 같았다.

“볼만은 하겠네요······?”

레이첼은 자연스레 시선을 내려 Xtra를 보았다.
그런데, Xtra 또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움찔- 몸이 떨렸다. 놓친 커피잔이 노면에 떨어져 부서졌다.
쨍그랑······ 튀어 오르는 유리 파편과 뜨거운 액체들. 그 사이에 Xtra는 자신의 활을 꺼내어 쥐었다.

< 몽중화 (25) > 끝

< 몽중화 (26) >

“······너는 왜 참가 안 했냠?”

에일린이 진세연에게 물었다. 양손에 든 닭꼬치에서 소스가 떨어지기 전에 얼른 집어삼켰다.
진세연이 웃으며 답했다.

“제가 참가해서 뭐합니까. 저는 감독관인데.”
“흠. 그래?”

에일린이 다 먹은 나무 꼬치를 바닥에 버리고 팔짱을 꼈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눈치를 보던 이름 모를 영웅이 음식 한 접시를 내밀었다.

“저, 에일린 공. 이것도 드셔보시겠습니까?”
“뭔데 이건.”
“이곳에서만 파는 길거리 음식입니다. 지수판이라는 떡입니다.”
“그래?”

계란처럼 생긴 빵이었다. 에일린은 한 입 먹어보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통째로 가져갔다.
이름 모를 영웅은 보이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떻게든 에일린의 점수를 따낸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궁술 대회가 시작되었다.
16명의 참가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개중에는 웬 연꽃 가면을 쓴 남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음? 저거 뭐야. 가면을 쓰고 있네. 관종인가?”

파바바바밧—!
이윽고 폭죽 같은 것이 터져 올랐다. 대회장의 온 사방에 푸드덕거리는 종이새들이 비상했다.

─표적 산개! 저 표적을 가장 많이 맞히는 자가 승리한다!

에일린과 진세연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대회의 양상을 지켜보았다.
다른 참가자들은 바쁘게 화살을 쏘아내어 표적을 맞추고 있는데, 웬 남자 혼자만 가만히 있었다. 본새가 괜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분위기만 잡는 것 같았다.

“······쟨 진짜 관종인데?”

에일린이 불만스레 중얼거리던 순간에, 윤승아가 그녀의 옆자리를 파고들었다.

“그러게~”

그리고는 떡 하나를 뺏어 먹었다. 에일린이 후다닥 접시를 회수했다.

“아 뭐야 너.”
“은근 맛있네. 이거 뭐야 언니?”
“뭐, 먹지 마. 내 거야.”
“······하여튼 식탐은. 아무튼, 언니. 얘. 소개할게. 우리 길드 김수호.”
“안녕하십니까.”

윤승아의 뒤에서 김수호가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김수호의 옆에는 이영한, 채나윤, 유연하 등등이 있었다. 그들도 에일린에게 인사했다.

“어, 어. 그래.”

그러는 사이에도 대회는 진행되고 있었다. 에일린은 귀찮다는 듯 손짓하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쟤네 전부 내가 아끼는 후배니까 어떻게 잘 좀 대해줘~”
“아 시끄러. 구경이나 좀 하자. 너 입 닫아.”
“······.”

윤승아의 입을 언령으로 막고 대회에 시선을 집중했다.

쏴아아아—!

궁수들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화살을 쏘아냈다. 가만히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노면에 뿌리를 내린 듯 가만히 있다가 활을 들었다.

까드드득—

그러던 남자가 드디어 시위에 화살을 끼웠다. 온통 새카만 화살이었다.
“······흐흠.”

에일린은 저 자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사실, 그가 쥔 활의 자태부터 다른 참가자들과는 격이 달랐다.
쏴아아······!
그가 화살을 쏘았다. 사선으로 뻗어나간 화살이 기괴하게 꺾였다.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경로에 있는 새들을 모두 집어삼키며 치달았다.
창공으로 치솟는 나선의 궤적. 하나의 화살이 수백의 종이새를 꿰뚫은 것이었다.

호오오— 감탄하던 에일린이 히죽 웃으며 진세연을 보았다.
진세연은 사뭇 심각한 얼굴로 현장을 감상하고 있었다.

“야. 쟤 너보다 센 거 아냐?”
“······예? 아니, 에일린 공. 뭐 그런 말을 하십니까.”
“풋.”

아무튼, 한 명이 쏘아낸 화살이 거의 모든 종이새를 잡아먹었다. 사회자는 조금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하고 Xtra의 승리를 발표했다.
그렇게 128강의 첫 번째 경기가 끝났다.
Xtra가 대기실로 돌아가자, 관객석도 술렁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대회가 끝나자마자 ‘참가자 대기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Xtra는 이미 밖으로 나간 듯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레이첼도 비척비척 저택으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어깨가 유독 무거웠다.

“부단장님 오셨네요~ 다들 인사햇!”

길드 저택에는 꽤나 많은 손님이 있었다. 단원들이 바깥세상에서 사귄 친구들이었다. 기사, 용병, 예술가 등등 면면이 다양했다.
레이첼은 그들에게 인사를 한 뒤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맞다, 부단장님!”

그때 마커스가 크게 외치며 다가왔다.

“저희 지하에 훈련장 생겼습니다!”
“······네?”
“이번에 저희 용병님이 만들어줬습니다.”

Xtra는 단원들 사이에서 용병‘님’이라 불리고 있었다.

“언제 한 번 내려가보세요. 시설 죽입니다. 마나 농도가 아주 죽여요.”
“아······ 네.”

레이첼은 곧장 대저택의 지하로 내려왔다.
마커스의 말대로 본 적 없던 훈련장이 생겨났다. 이미 데런과 케일이 서로 대련을 하고 있었다.

“어, 오셨습니까?”

땀 범벅인 그들이 웃으며 부단장을 맞이했다.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이고 훈련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최첨단(?) 인공 자연이었다. 노면에 흙과 모래가 깔렸고, 나무도 자라나 있었다. 심지어 자연풍마저 솔솔 불어왔다.
정령을 수련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저희는 이제 다 썼으니 가보겠습니다. 부단장님, 편히 쓰십쇼.”
“충성!”

데일과 케런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혼자 남은 레이첼은 눈을 감고 바닥에 앉았다. 편안한 정적 속에서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자연의 맑은 기운을 느끼고자 했다.

“후우······ 후우······.”

그렇게 호흡을 반복하는데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돌아보니, 벽면에 검은 실루엣이 달라붙어 있었다.
연꽃의 가면으로 제 얼굴을 가린 남자. 김하진이었다.
그는 가면을 벗더니 작게 웃었다.

“훈련장 어때요? 한 3억 투자해서 업그레이드 했는데.”

김하진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약간 어색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레이첼은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가 내어준 한마디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무거웠던 마음이 싹 흩어지고, 세상은 다시 밝아진다. 레이첼은 괜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조신한 몸짓이었다.

“다행이네요.”

김하진이 버석버석 걸어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았다.
선선한 미풍이 불어오는 가운데, 한참 동안을 침묵하던 그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첼 씨. 혹시, 꿈을 꿨나요?”

꿈. 레이첼은 그 순간 김하진을 보았다.
김하진은 훈련장 한편에서 살랑이는 나뭇가지를 좇고 있었다.
꿈이라는 현상, 그 속에서 서로가 관찰한 어떤 것들.
레이첼은 희미하게 남은 기억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네.”
“어떤 꿈을 꿨어요?”
“저는······”

레이첼에게는 기묘한 꿈이었다.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고, 본 적도 없는 공간의 영상. 마치 그 자리에 멈춘 듯 고여 있는 장면.

“······이상한 컴퓨터와 모니터가 있고, 그 화면에는······ 어떤 문장들이 빼곡히 있었어요. 또, 책상에는 담배와 커피가 가득했던 것 같아요. 그런 꿈이었어요.”

그러자 김하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입술을 살짝 달싹이더니, 짓눌린 듯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아무래도 저희는······ 뭔가를 공유하고 있는 것 같네요.”

김하진은 레이첼의 꿈이 어떤 장면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레이첼의 과거를 엿보았으니, 레이첼도 자신의 과거를 꿈꾸었다는 것일까.
그런데 왜, 어떻게 이런 ‘꿈의 공유’가 발생한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김하진은 한숨을 내쉬고 레이첼에게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일단, 자요. 받아요.”
“······?”

레이첼은 얼떨결에 받았다. 웬 종이였다.

“제가 이번에 그림을 팔았거든요. 아시다시피, 이 세 번째 시험장은 말만 시험장이니 그냥 사회잖아요? 사회에서는 돈이 제일 중요하고.”

레이첼은 별 생각 없이 그 종이를 보았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십억?
숫자를 헤아리던 눈코입이 튀어나올 듯 벌어졌다.

“이거, 이거······.”
“제가 번 돈이에요. 그런데, 이런 건 길드 책임자가 가지고 있어야죠.”
“······.”
“그걸로 뭘 하든 하면 될 것 같아요. 일단 돈이 많으면 공적이나 명성도 쉽게 쌓을 수 있겠죠. 저는, 전부 부단장님에게 일임할게요.”

김하진이 웃으며 말했다. 멍하니 있던 레이첼은,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감동을 받은 얼굴이 되어 김하진을 보았다.
그 솔직한 모습에 김하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역시, 돈이면 다 되는구나.


세 번째 시험이 시작되고 벌써 4주가 지났다. 탈락한 길드는 아직 없었지만, 도태된 길드는 분명 존재했다.
공적치와 명성치가 너무 낮거나, 내부에 분열이 일어났거나, 길드 자체가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거나······.
그런 점에서 왕실 길드는 꽤 끈끈한 우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실, 전적으로 내 덕분이었다. 본디 잘 나가는 집단은 안에서부터 끈끈한 법이거든.
나는 세간에 총 여섯 점의 화폭을 내놓았고, 귀족들은 치열한 경매를 벌여 그것들을 구매했다.
그렇게 얻은 돈은 전부 왕실 길드에 투자하여 숙소의 질, 단원들의 복지 향상을 도모했다. 또한 레이첼은 이곳 전당에 [영국 왕실 길드 — 전당 지점]을 출범시켰다.

“······어머. 오늘은 두 분이네요?”

그리고 오늘. 왕국의 귀족이 자주 드나드는 카페에서, 나는 레이첼과 함께 유연하의 미팅 자리에 참석했다.
“저는 하진 씨의 매니저라고 생각해 주세요.”

레이첼이 말했다. 유연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약간 쓴웃음을 지었다.

“예, 뭐······ 매니저든 뭐든. 아무튼, 바로 본론부터 들어갈게요. 지금 이 시점에서 Xtra의 가치는 나날이 오르고 있거든요?”

화가로서 ‘Xtra’의 가치는 벌써 고유명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당장 유력한 귀족들은 전부 경매 경쟁에 나섰고, 곧 있으면 왕실도 관심을 가질 것이라 했다.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왕을 만나 ‘개교’에 대한 허가도 곧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순간 레이첼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개교.
그 다리를 넘으면, 이제 랭커스터에게 성큼 다가가는 것이었다.
유연하가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은 몇 점 정도 그리셨어요?”
“아 그거? 그거······ 그림이 꽤 어렵더라고. 뚝딱 나오는 건 아니니까.”
“네. 저도 이해해요.”

드워프의 손재주로도 미술만큼은 꽤나 힘들다.
대충 모델이 필요하고, 영감이 필요하고, 내 의지가 필요하고, 그린 그림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뻔뻔함이 필요하고······.

“두 점 정도?”
“흠······ 좋아요. 저는 일단 개인 전시회를 생각하고 있거든요?”

유연하가 팜플렛을 내밀었다.

[Xtra 개인 전시회]
─정체된 미술계에 구원처럼 도래한 작가 Xtra의······.

벌써 팜플렛 제작까지 끝난 듯했다. 상당히 빠른 일 처리에 레이첼도 감탄한 눈치였다.

“만약 전시회가 열리면, 관계자들의 숙박 같은 것들은 저희 숙소에서 제공할게요.”

레이첼이 팜플렛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거야 고맙죠. 왕실 길드의 숙소는 나름 정평이 나 있으니.”

레이첼은 유연하의 칭찬이 쑥스러운 듯 어깨를 살짝 꼬았다. 기실 전당 바깥에서 유연하는 레이첼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위인이었으니.

“루프하스린 커피 두 잔 나왔습니다.”

그때 종업원이 나타나 커피 두 잔을 내놓았다. 그대로 커피를 마시려던 나를, 갑자기 레이첼이 나서서 제지했다.

“손 조심해요. 뜨거운 거 함부로 만지시고 그러면 안 돼요.”

귀한 손인데. 이 걸로 얼마를 버셨는데. 또 앞으로 얼마를 버실 건데.
레이첼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커피잔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다 식으면 드세요.”
“······허, 참.”

그런 레이첼이 기가막히다는 듯 유연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여기서 확실히 정합시다. 만약 개교가 열리면 여러분들은 어디로 가실 거예요? 웬만하면 동선 겹치는 일 없도록 해요, 저희.”

유연하가 다시 진지하게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우리는 무조건 랭커스터가 있는 곳으로.”
“······흐음.”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반대편으로 갈게요.”
“어. 그렇게 해.”
“그러면, 계약 성립인가요?”
“그렇지.”

나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유연하가 씩 웃더니 손을 잡았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지켜보던 레이첼도 유연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연하는 레이첼과도 악수를 했다.
그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유연하는 스마트 워치 메시지를 보냈다.

[정수의 해협의 책임자 ‘유연하’가 왕실 길드의 책임자 ‘레이첼’에게 동맹을 요청합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레이첼은 그대로 ‘예’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그리고는 ‘아니오’를 눌렀다.

“아직 동맹까지는······ 시기상조가 아닐런지요.”

유연하의 얼굴이 콰득 일그러졌다.

“아니, 이 사람들이 진짜 쌍으로 왜 이래 자꾸?”

< 몽중화 (26) > 끝

< 몽중화 (27) >

몽롱한 의식이 서서히 부유한다. 뿌옇던 시야가 안개 개듯 맑아진다.
레이첼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정체불명의 좁고 흐트러진 방, 콧속으로 커피와 담배의 냄새가 찔러들었다.
또다시 같은 꿈속이었다.

“······아.”

여느 때처럼 가만히 있으려 했지만, 문득 어떤 생각이 일었다. 탐험에 대한 호기심 비스무리한 것이었다. 오늘 만큼은 조금 다르게 움직이고 싶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쓸고 닦고, 책상 위의 담뱃재와 고이다 못해 썩은 커피를 정리하고, 모조리 쓰레기 봉투에 넣은 뒤 현관문 앞에 놓았다.
돌아서 보니 어느 정도 깨끗해진 느낌이었다.

“어딜까.”

그렇게 난장판을 거둬내고 나서야 내부의 구조가 드러났다. 거실과 부엌과 안방으로 이루어진 집.
······안방.
주변을 탐색하던 레이첼은 굳게 닫힌 안방의 문고리를 쥐었다.

“후······.”

고작 문 하나 열려는데 긴장이 되었다. 힘을 줬다가 뺐다가 반복하다가, 차마 열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

뒤로 돌아선 레이첼은 컴퓨터 위의 선반을 발견했다. 그곳에 액자가 놓여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 그것을 들었다. 세 명의 사람이 함께인 사진이었다.
한 명은 김하진이었고, 다른 두 명은 중년의 부부였다. 누가 보아도 가족사진이라 할 만큼 다정한 구도였다.

“······?”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첼은 자그마한 의문을 떠올렸다.
김하진, 그 사람에게 가족이 있었던가?

“!”

그 순간 레이첼은 눈을 떴다.
어두컴컴한 천장이 보였다. 꿈에서 되돌아온 현실, 대저택의 넓은 방 안에 오직 자신뿐이었다.

“휴우······.”

레이첼은 침대에서 일어나 얼굴을 쓸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꿈속의 기억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비척비척 바깥으로 나왔다. 야밤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이첼은 정신이라도 맑게 할 겸 지하 훈련실로 내려갔다.

“어?”

그런데 지하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훈련을 하다 잠들었는지, 노면에 드러누워 미동도 없는 사람. 김하진이었다.
저 사람도 나와 같은 꿈을 꾸었을까?
레이첼은 궁금해하며 김하진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괜히 괴롭히고 싶어져서 눈코입을 콕콕 찔렀다.

“······으브베.”

얼굴 근육을 파르르 떨더니 눈을 떴다. 그는 멍하니 자신을 보다가 방긋 웃었다.

“뭐야. 훈련하러 왔어요?”

레이첼도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이고······ 그럼, 도와드릴게요.”

끄응- 할아버지처럼 신음하며 일어났다. 레이첼은 쿡쿡 웃었다. 자다 깬 반응이, 아직도 잠이 가득한 두 눈이 이상하게 귀여웠다.

“자, 정령을 저에게 보내보세, 잠깐. 아 목말라. 잠깐만요. 저 물좀 마시고······”


Xtra의 전시회는 수많은 귀족의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고작 일곱 점의 화폭이 걸린 전시회에 백작이니 자작이니 하는 귀한 분들이 모조리 행차했고, 나는 생전 처음 전도유망한 화가로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잘돼서 다행이긴 하네요.”

그렇게 약 일곱 시간 동안 이어진 전시회의 결과는— 명백한 성공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아요. 내일부터 할 경매는 저희 단원들한테 맡겨뒀으니까, 오늘은 편히 쉬세요.”

대기실에서 유연하가 만족스레 말했다. 레이첼은 유연하의 옆에서 경매 스케쥴을 지그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기지개를 크게 한번 켜고 물었다.

“근데, 이래서 왕을 만날 수는 있겠냐?”
“뭐. 이상하리만치 반응이 없기는 한데요, 하다 보면-”

그때였다.
쾅—!
돌연 대기실의 뒷문이 부서지듯 열리더니, 기사들이 우루루 쏟아져 들어왔다. 급작스러운 사태에 레이첼이 먼저 일어나 경계 태세를 취했다.

“가만히 있거라—!”

나는 눈만 껌뻑거리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먼저 진입한 수십의 기사가 공간을 완전히 통제한 뒤, 웬 비단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들어왔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고급스러운 옷차림이었다.

“이노옴! 뽑았다면 봐라—!”

레이첼이 갈라틴에 손을 대자 기사 중 한 명이 외쳤다. 레이첼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반박하려 했으나, 귀객이 먼저 손을 휘저었다.

“되었다. 너희는 나가 있거라.”

맑고 단단한 여성의 음색.
순간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 하지만 전하—”
“나가 있어라 루텐. 나는 저들과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테야.”
“······예. 건물 뒤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기사들은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밖으로 나갔다.

“······.”

이해할 수 없는 사태의 급변이었다. 우리는 그저 가만히 서서 ‘전하’라 불린 자를 바라보았다.
전하는 가만히 서서 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왜인지 웃고 있는 듯했다.
그때 유연하가 조심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국왕 폐하를 만나뵙게 되어—”
“반갑구나.”

그런데 전하는 유연하를 무시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격조를 차리던 유연하는 입만 뻐끔거리며 전하의 뒷모습을 보았다.
왕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말했다.

“······오랜만이다.”

마치 붕우를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제야 나는 자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상당히 오래 전의 이야기지만,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특히 레이첼은 나보다 더 확신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조심스레 꺼냈다.

“토메르?”
“······아~ 오랜만이네 그 이름.”

토메르가 얼굴 가리개를 벗었다.
라틴계 특유의 건강함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구릿빛 피부. 자신감이 넘쳐나는 뚜렷하고도 시원한 이목구비.
그녀는 추억에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반가워, 김하진.”
“······그러게. 얼이 빠질 만큼 반갑구만.”

그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던 레이첼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나도 좀 봐주세요— 하는 얼굴이었다.

“아, 레이첼 너도.”
“······허 참.”

혼자만 소외된 유연하가 불퉁스런 얼굴로 일어났다. 그녀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 왕이 된 토메르와 나를 번갈아서 보았다.

“뭡니까 이 상황은? 저한테도 좀 설명을 해주시지요?”


“그런 전시회 같은 거 할 필요 없었는데. 굳이 귀찮게.”

토메르는 곧장 우리를 왕궁의 성찬장으로 안내했다. ‘성찬(盛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긴 테이블 위로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가득 나왔다. 죽 훑어보는 레이첼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도 뭐, 네 그림 나쁘지는 않더라.”
“······그러냐?”

그건 그렇고, 내 설정에서 벗어난 토메르가 이곳에 있었구나.
나는 안심과 혼란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그렇게 아련하게 쳐다봐?”

토메르가 피식 웃었다. 식사에 집중하던 레이첼이 돌연 고개를 돌려 나를 스윽 보았다.

“아무튼. 우리는 개교를 열고 싶거든? 요.”

혹시나 싶어 존댓말을 붙이자 토메르가 무릎을 치며 웃었다.

“크크크크. 아, 응. 편히 말해. 어차피 우리밖에 없잖아.”
“아, 그래. 그러면······ 이 세 번째 시험장에는 대륙이 네 개가 있다고 하던데?”
“응. 네 개가 맞아.”
“그러면, 그중에는 랭커스터가 왕으로 있는 대륙도 있나?”

레이첼이 먹던 랍스타를 내려놓고 다시 신경을 집중했다.

“응. 맞아. 랭커스터도 있어. 랭커스터는 가장 큰 대륙에서 영국을 재현했지.”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나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놈이 뭘 하려는지도 알아?”
“흠······ 글쎄.”

한편, 유연하는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아까부터 랍스터 속살만 콕콕 찌르더니, 방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라면에 넣어서 끓이면 맛있으려나-

“너는 있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 것 같아?”

토메르가 웃으면서 되물었다.

“······글쎄. 전당이 구현한 존재 아닌가?”
“비슷하지만 달라. 원래 이곳, 중앙아시아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의 영혼이야. 사자(死者)의 혼령이 전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이루었지. 따라서 이곳의 인간은 바깥으로 나가면 존재할 수 없어.”

콱! 토메르가 젓가락을 들어 랍스터의 등허리에 꽂았다.

“그리고, 랭커스터는 이곳에서 과거의 영국을 구현하고 싶어 해.”
“······.”

레이첼의 눈에 경악이 스며들었다. 토메르는 레이첼을 보며 입매를 삐딱하게 굳혔다.

“놈은 그날, 그러니까 햄프턴에서 죽은 사람들을 모두 되살리려는 거지. 그런데, 아무리 전당 내부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도, 근본적으로 죽은 사람을 그대로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해.”

토메르가 젓가락에 꽂힌 랍스터를 다른 접시로 옮겼다.

“즉 이미 죽은 혼령을 한정적으로 되살릴 수는 있어도, 그들의 기억, 습관 등등은 재현할 수 없다는 거지. 그런데 놈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저 너머 대륙에 영국을 구현했어.”
“그러면, 지금 거기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레이첼이 침착하게 물었다.

“착실히 과거를 재현하고 있지. 놈은, 자신이 만드는 영국과, 지금 세계의 영국을 갈아 끼우려는 거야. 그것으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간다’, 즉 ‘회귀한다’고 자위하려는 거지.”
보통 상식으로는 감히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가만히 듣던 유연하가 오만상을 찌푸린 채 되물었다.

“그게 실제로 가능합니까?”
“‘기적’과 ‘희생’이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토메르가 다시 레이첼을 보았다.

“전당이 품은 기적과, 영국민 수천만의 희생만 있다면 말이야.”
“······.”

레이첼이 두 주먹을 쥐었다. 나는 억세게 흔들리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그런 점에서, 개교는 없어. 랭커스터가 개교를 부수었거든.”
“그러면-”
“그래도 갈 수는 있지. 지하 통로가 있거든.”
“통로?”
“응. 내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전체가 황량한 대지였거든. 사토뿐이었지. 3년 전인가. 아무튼 그때는 네 대륙이 서로 하나였는데, 그때 남은 흔적이야.”

토메르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로 통로 내부의 영상이 투사되었다.

“최대 세 명이 이용할 수 있는 통로야. 세 명이 넘으면 랭커스터에게 들켜. 이틀에서 사흘 정도 걸으면 가짜 영국에 도착할 수 있어. 그런데, 그동안 너무 방치했던 터라 안에 괴수가 있을지도 몰라.”

레이첼이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다른 대륙은요?”

유연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대륙? 아~ 응. 다른 세계는 아마 괜찮을 거야. 랭커스터만큼 욕심 있는 녀석이 없거든. 일단 다른 하나는 레고 나라, 또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띠리리리리리링—
그때 스마트 워치에서 요란한 알람이 울렸다. 긴급을 알리는 사이렌이었다.
토메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레이첼과 나를 보았다.

[케일 : 얘들아 우리 금고에 있던 거 다 어디 갔어? 돈이랑 그 그런 것들]
[페르민 : ? 무슨 소리야? 다 금고에 있자나]
[케일 : 아니 그니까. 우리 금고에 돈이랑 황금이랑 뭐 그런 거 다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없는데? 부단장님이 가져가셨나? 공적치 수표화한 것도 거의 다 사라졌어]
[페르민 : 어? 아 설마. 야 잠깐. 지금 바로 갈게. 기다리고 있어봐. 우리 금고 당번 누구였지?]

[영국 왕실 길드의 단원 ‘마커스’가 길드를 탈퇴합니다.]

[페르민 : 어? 아 씨바 잠깐. 야 마커스 저 개새끼 뭐야······.]

“······아.”

레이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도 입술을 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야? 봐봐. 무슨 일인데?”

토메르가 묻자 레이첼이 스마트 워치 화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음. 얘도 랭커스터 끄나풀이었나 보네.”

토메르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근데 뭐, 얘가 도망칠 곳이 어디겠어. 당연히 영국이겠지. 어디, 지금 당장 지하 통로로 갈래?”

나는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레이첼은 세상 그 어느 때보다 냉랭한 얼굴이 되어 앞으로 나섰다.

“가겠어요.”
“좋아. 그럼, 따라와.”

토메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찬장 밖으로 나오자 수행인 두 명이 큼지막한 보따리를 가지고 왔다.

“여기에 식량이랑 이것저것 다 넣었어. 영국 가서 써.”
“감사합니다.”

우리는 보따리를 쥐고 토메르를 따랐다. 외부에는 보는 눈이 많은 탓에 경어를 썼다.
아무튼 왕궁에는 엘리베이터 비슷한 도르래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타고 지하로 내려왔다.

“잠깐만.”

그렇게 도착한 왕궁의 지하.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토메르가 먼저 불을 피웠다.
네 사람의 얼굴이 주홍색으로 빛났다.

“천천히, 계속 내려와.”

우리는 가까스로 드러난 어둡고 긴 계단을 끊임없이 내디뎠다.
그러다 한 15분 정도 지났을까.
토메르가 먼저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횃불로 앞을 비추니 초라한 나무문이 있었다. 우리는 그 앞에 가만히 섰다. 토메르가 작게 웃더니 주머니에서 스마트 워치를 꺼냈다.

“자, 위험하다 싶으면 나한테 문자 해. 바로 소환해 줄게.”

[국왕 ‘유토르 대제’가 영국 왕실 길드의 ‘Xtra’에게 동맹을 요청합니다.]

“어때. 내 거 조금 구형이긴 한데, 작동해?”
“어. 잘된다.”

나는 곧장 토메르와 동맹을 맺었다.

“그럼 잘 갔다 오고. 뭐 별다른 준비는 필요 없지? 어차피 금고 다 털렸다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웬만한 장비와 물품은 죄다 금고에 보관했었으니, 금고가 털린 지금은 준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없다.

“고맙다.”
“무얼.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토메르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문을 열었다. 어둡고 축축한 바람이 스산하게 밀려나왔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그 안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그런데 걷다 보니, 옆에 레이첼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정체가 모호한 검은 실루엣이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져서 돌아보았다.
유연하였다.

“으어! 아, 아 깜짝이야. 야, 뭐냐 너?”
“······뭐가요? 나 처음부터 같이 있었는데.”

유연하가 퉁명스레 되받았다.

“아니, 네가 왜 따라와?”
“동맹이잖아요. 그럼 저도 가도 되지. 그리고, 저 처음부터 같이 있었다니까요? 왜 이제 와서 놀란 척이래?”

나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레이첼을 보았다. 레이첼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레이첼도 어느 정도는 출세지향적인 인물인지라, 바깥세상에서 상당히 도움 되는 유연하와의 인맥을 원하는 눈치였다.

“······그래. 그럼 따라와라. 허락할게.”
“아니, 이 사람이 진짜. 처음부터 같이 있었다니까 뭔 허락이야-”
“가자.”

< 몽중화 (27) > 끝

< 몽중화 (28) >

[레이첼 : 괜찮아요. 곧 도움을 줄 사람이 갈 거예요.]
[레이첼 : 제가 마커스를 잡으러 갈 테니, 일단은 그분들에게 협력해주세요.]

부단장은 그렇게 격려했지만 페르민의 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개새끼. 진짜 싹 다 가져갔네.”
“어쩐지, 그놈 뭔가 수상하더라니.”

데런이 앞꿈치로 노면을 툭툭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민이 눈을 크게 치뜨고 돌아보았다.

“진짜? 어디가? 어디가 수상했어?”
“어? 어······ 아 그, 맨날 밤늦게까지 놀러 다니고······ 요즘은 유독 개인 활동이 잦더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커스는 그간 불손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왜 하필 이 순간에 도망쳤는지도 페르민은 의문이었다. 당장 경매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으면 훨씬 더 많은 재물을 들고 튈 수 있었을 텐데.

“아, 죽겠다 진짜······.”

그러나 뭐가 되었든, 텅 빈 금고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비틀리는 것만 같았다.
저택의 지하 금고에는 정말 모든 물건이 보관되어 있었다. 현물, 현금, 보석, 그리고 길드 간의 거래에 사용되는 수표화(化)된 공적치까지······.
마커스는 그 전부를 털어갔다.
남은 것이라고는 화랑에 전시해 두었던 Xtra의 화폭 일곱 점뿐.

“하아······.”

금고의 안쪽에서 세히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왔다. 그의 곁에는 탐색과 관련된 재능을 지닌 단원이 있었다.

“마커스의 흔적은 꽤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흔적이 어디로 향하는지 오리무중입니다.”

라우슬로이퍼는 영국 왕실의 동맹으로서 손을 거들었다. 페르민은 감사하다고 말한 뒤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근데, 부단장님은 마커스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가신다는 거야?”

케일이 묻자 데런이 대답했다.

“모르지. 아직 검술대회도 안 끝났는데······.”

그때였다.
대저택의 외부가 요란해지더니 웬 발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급작스러운 기세는 지하 금고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페르민은 벌떡 일어났고 세히트는 검을 쥐었다.
숨을 죽인 채 경계하던 와중, 백금 갑주를 걸친 기사 세 명이 지하로 내려와 섰다. 그들은 다짜고짜 서신부터 내밀었다.

“저는 근왕 기사 루인입니다. 왕명으로 여러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왕명. 즉 왕의 명이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도움을 준다니 페르민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순간 스마트 워치에 알람이 울렸다.

[영국 왕실 길드는 스무 길드 중 최초로 왕의 뜻과 마주합니다.]
[모든 단원들이 공적치를 습득합니다!]

“이건 폐하께서 당신들에게 보내는 선물입니다.”

루인이 웬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검, 지팡이, 활 등등 다양한 장비가 들어 있었다.
단원들은 각자 멍하니 보다가 하나둘 손을 뻗었다. 페르민은 후다닥 지팡이를 두 손에 쥐었다. 치유계열인 페르민에게 꽤나 효율적인 장비였다.

“그리고 곧 진행될 Xtra의 화폭 경매는, 폐하께서 전매(前賣)한 뒤 귀족들에게 하사할 예정입니다. 귀족에게는 저희가 알릴 터이니 그림을 넘겨주시면 됩니다.”

페르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 그림들이 얼마나 귀한데, 고작 이런 장비들로 퉁치려고 하는 건가. 개당 몇십억은 호가할-
왕의 기사 루인이 수표를 내밀었다.

“이건 왕실에서 지불할 금액입니다.”

페르민은 데퉁스런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바로 다음 순간,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다. 눈알이 밖으로 튀어나와 데구르르 굴러간 것 같았다.
“······와?”

세상에, 수표에는 0이라는 숫자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한 손에 횃불을 든 채 앞으로 나아갔다.
깊고 아득한 지하, 걷잡을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나는 통로의 저편을 주시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귀신이나 괴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커스가 왜 그랬을까요.”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한 듯, 여태 침묵하던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에게 알릴 만큼 확실하지가 않았고, 마커스 본인의 행적도 다소 기이했다.
오늘 크게 뒤통수를 치긴 했지만, 일전에 레이첼을 걱정하던 모습은 진심에 가까웠으니.

“그건 나중에 생각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유연하를 보았다. 유연하는 스마트 워치로 정수의 해협과 교신하고 있었다. 그 대화 내용을 힐끔 훔쳐본 뒤에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그냥 돌아가지 그러냐?”
“······예? 아~ 무슨. 아니에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갯짓하며 스마트 워치를 껐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같이 가야죠. 저 영국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근데, 길드한테는 뭐라 그랬냐?”
“그냥 잠깐 자리 좀 비운다고 말했어요.”

나는 방금 훔쳐보았던 문자 내용을 읊었다.

“······왕실 길드의 금고가 털렸으니 지금부터 더 분발하세요. 지금 현금이 가장 많은 길드는 아마 저희일 것입니다······.”
“아.”

유연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레이첼과 내 눈치를 살피더니, 갑자기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갑시다, 어서 가요. 영국에 뭐가 있든, 어서 빨리 랭커스터를 막아야지요.”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시간의 흐름이 모호했다. 걸을수록 스마트 워치의 숫자만 바뀔 뿐이고, 풍경에는 아주 작은 변화도 없다.

“폐소 공포증이 왜 생기는지 알겠네요.”

암갈색 토벽을 찰싹-! 두드리면서 유연하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검은 연꽃의 활을 들었다. 유연하와 레이첼이 움찔 멈췄다.

“······앞에 뭔가 있나요?”
“어.”

괴수가 보였다. 하나가 아니라 다수였다. 두더지처럼 생긴 녀석들이었다.

“쏴 죽일게.”

쒜에에엑—!
시위에서 튕겨 나간 화살이 두더지들의 미간을 꿰뚫었다. 한 번의 사격으로 여덟쯤 되는 무리가 고꾸라졌다. 다소 기하학적인 궤적이었다.
나는 다시 등에 활을 메었다. 거의 동시에 스마트 워치 알람이 울렸다.

[경계를 가르는 지하 괴수를 사살합니다.]
[이전 대륙과 연결된 스마트 워치가 차단됩니다.]

“······어?”
“음?”

나뿐만 아니라 레이첼과 유연하의 스마트 워치에도 똑같은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뭐지 이게? 무슨 뜻이에요?”

유연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일단 계속 걷자고.”

그렇게 한 삼 분 정도 걸으니 내가 사냥한 두더지들의 시체가 나타났다.
약 500m 지점이었다. 이곳에서 내 시야의 한계가 500m쯤 되는 듯했다.

“우윽.”

유연하가 코를 막았다. 레이첼도 얼굴을 찡그린 채 시체들을 지나쳤다. 그 외에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유연하가 말했다.

“저기요. 뭔가 공기가 좀 탁해진 것 같지 않아요?”
“시체 냄새겠지.”

공기가 탁해지기는 했다. 구린내라고 하나, 아마도 시체 썩는 냄새가 풍긴다.
레이첼과 유연하는 마력으로 방독면을 만들었고, 나는 가면을 썼다. 이게 나름 방독면과 비슷한 기능을 하거든.

“이제 좀 낫네요. 가요”
“그러게······?”

걸음을 재개하려던 때, 돌연 몸이 기울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다리가 휘청이더니 풀썩- 노면에 쓰러졌다.
축축한 진흙이 몸에 튀었다.

“하진 씨, 괜찮아요?”

레이첼이 내 팔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나는 무릎에 묻은 진흙을 털며 쓰게 웃었다.

“아, 네. 뭐에 걸려서 넘어졌나 봐요.”
“조심하세요.”

유연하가 코웃음을 쳤다. 다소 아니꼬운 시선이 우리 둘을 스윽 훑었다.

“아주 둘이 그냥, 보기 좋네요.”

뭔가 ‘좋’의 발음이 약간 거슬렸다.
유연하의 발음이 문제일까, 아니면 내 귀가 문제일까.
아무튼 나는 다시 걸었다.
그런데 몸의 균형을 잡기가 영 힘들었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 내 몸을 밀고 당기는 것 같았다. 생각도 잘 이어지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아, 통로였지.
근데 너무 어둡다. 통로가 이렇게 어두워도 되나.
그래도 일단 걷기는 해야지.
풀썩—!
몸이 다시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조금 제대로, 온몸이 진흙 속에 파묻혔다.

하······ 진······ 씨······?

누군가의 목소리가 기이하게 늘어졌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대로 엎어진 채 나는 생각했다
이거 뭔가 이상하다······. 약에 취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래도 이럴 리가 없는데······. 내 체질 중에 ‘약성기억육체’라는 것이 있어서······.

의식이 뒤흔들렸다. 세상이 멀어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귀가 멍하니 울리고, 흐릿한 시야에 뭔가 어둑한 형상이 끼어들었다.

그 형상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나 누구인지 영 볼 수가 없었다. 일단 사람인 것 같기는 한데······.

────!

목소리가 어그러졌다. 고장 난 테이프처럼. 아니면 누가 TV를 되감았나?
자꾸 머릿속이 꼬이는 듯했다.
아니, 실제로 꼬이고 있었다.

────!

다시 한번 큰 목소리가 울렸다.
머리통을 뒤흔드는 소리였다.
너무 시끄러워서 미간을 얻어맞은 것 같았다.

────!

세 번째 소리가 울렸을 때, 온 사방이 암전되었다.
맥없이 이어지던 의식이 끊겼다.


“······.”
“······.”

김하진이 어버버— 헛소리를 뇌까리더니 의식을 잃었다. 레이첼과 유연하는 서로 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적막 속에서 바람 헛도는 소리가 울렸다.
가면을 벗기려는 유연하를 레이첼이 제지했다.

“왜요?”
“······중독이에요.”

레이첼은 침착하게 진단을 내렸다.
녹색으로 달아오른 혈관, 보랏빛으로 물든 입술, 초점을 잃은 홍채. 명백한 중독이었으나, 어떤 독에 언제 어떻게 중독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어······ 괜찮아요. 언제든 문제가 생기면 연락을 주라고 했으니까—”

유연하가 스마트 워치를 켰다.

[경계를 가르는 지하 괴수를 사살합니다.]
[이전 대륙과 연결된 스마트 워치가 차단됩니다.]

스마트 워치는 이미 먹통이 되어 있었다.

“아 맞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냥 왔던 길을 돌아가면-”

쿠르르릉-!
뒤편에서 기이한 괴성이 울렸다. 어떤 괴물체가 땅을 뚫고 올라오는 소리였다.
혹시, 방금 사살했던 두더지의 친족들일까.
유연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레이첼?”

유연하가 레이첼을 불렀다. 그러나 레이첼은 한겨울의 호수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김하진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에에에에—!
등 뒤에서 괴수들의 소리가 울렸다.
그으으으으—!
그 외침에 공명하듯, 앞에서도 괴성이 되돌아왔다.
메아리처럼 주고받는 괴수들의 울음 속에서 유연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괜히 왔나.”

유연하는 다시 레이첼을 보았다. 이번에는 패닉에 빠진 듯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를 꽉 깨물더니 김하진을 들쳐맸다. 겉옷을 벗어 김하진과 자신을 묶었다. 그 상태로 벌떡 일어나서 유연하에게 말했다.

“어서, 달립시다.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요.”

레이첼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알았어요. 저 두더지들 그렇게 강한 것 같지는 않거든요?”

김하진도 고작 화살 한 방으로 몰살한 녀석들이다. 그리 품격이 높은 괴수는 아닐 터이고, 무엇보다 이 몸도 나름 ‘중상격’ 영웅이거든.
유연하가 입술을 삐뚜름히 올리고는 소매를 걷었다. 허리춤에 메어놓은 채찍을 꺼내 쥐었다.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할 시간이구나.

“엄호는 저에게 맡기고, 당신은 그 사람이나 신경 써요. 해독은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

레이첼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유연하가 혀를 찼다.

“하긴, 독(毒)의 정령은 아직 당신의 경지로는 무리겠죠.”

유연하가 김하진의 상태를 힐끔 보았다. 호흡도 제대로 못 하는 모습이 사뭇 위독해 보였다. 저토록 무력한 김하진은 솔직히 처음이었다.
그만큼 의문이었다. 김하진이 저 지경이 되었는데, 우리는 왜 멀쩡한 걸까?

파스스스슷—!

그 따위 의문은 일단 나중에 해소해야겠지.
유연하는 채찍에 전류를 일으켰다. 무기라기보다 전도체로서 기능하는 장비. 음습하고 축축한 이곳에서, 전하(電荷)의 위력은 보다 극대화된다.

“신호하면 달려요.”

그으으으으— 두더지들이 이쪽의 냄새를 맡은 듯 위협적인 소리를 내었다.
바로 그 순간, 유연하가 크게 외쳤다.

“지금!”

노면에 채찍을 강하게 후려갈겼다.
타아아앗—!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채찍이 내리친 노면에서 전류의 해일이 발생했다.

< 몽중화 (28) > 끝

< 몽중화 (29) >

유연하가 일으킨 전류의 해일이 양방향으로 치달았다.
파동은 대기를 불태우며 번졌고, 초고온의 전열(電熱)이 두더지 떼를 휩쓸었다. 전류에 살갗이 타오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훗.”

유연하가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낀 채 또각- 하이힐을 내디뎠다.

“어딜 감히······?”

바로 다음 순간, 두더지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크에에에에—!
유연하의 미소가 흠칫 굳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앞을 보았다.
그르르르······ 암흑 속에서 두꺼비가 붉은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약간, 아주 약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지짓—

놈들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겼다. 뿐만 아니라, 표피가 전류를 통째로 빨아들인 듯 날카롭게 번뜩였다.
과연, 유연하는 평범한 두더지를 전기 두더지로 진화시킨 것이었다.

“······.”
“뭐 하신 거예요?”

침묵하는 유연하에게 레이첼이 물었다. 당황한 유연하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레이첼의 옷자락을 쥐었다. 우물쭈물거리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으음. 제가 그 사람을 업는 게 효율적인 전력분배일 것 같아요.”
“네?”

그르르릉—! 두더지가 짖자 따끔한 정전기가 튀었다.
앗 따거! 유연하는 제 팔뚝을 만지작거리며 레이첼의 뒤에 숨었다.

“그, 저 녀석들이 전기에 저항이 있는 것 같거든요? 제 천적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빨리.”
“아······ 조심히 부탁드려요.”
“빨리 주기나 해요. 나 쟤네 무서워.”

레이첼은 고민하다가 김하진을 내주었다. 유연하는 곧장 김하진을 업고 채찍으로 묶었다. 뒤늦게 쪽팔림이 몰려들었지만 아닌 척 헛기침을 했다.

“갈게요.”

레이첼이 말했다. 유연하는 그녀의 등에 바짝 붙었다.

“흡······!”

레이첼은 한 호흡으로 지면을 박차고 내달렸다.
크에에에에─!
그와 동시에 두더지들이 앞뒤로 달려들었다.

레이첼은 갈라틴으로 전방을 돌파하며 나아갔다. 뒤편의 두더지들이 독침을 쏘아냈지만 유연하가 전류로 배리어를 형성했다. 독침은 전류의 가닥에 마찰하며 사그라들었다.

“놓치지 마세요!”

레이첼은 필사적으로 길을 뚫었다. 갈라틴의 섬광이 번뜩일 때마다 살점과 핏물이 높이 치솟았다. 어느새 레이첼의 몸은 흙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유연하가 말했다.

“뒤에는 보지도 마세요. 두더지 대군이 우리를 쫓고 있으니까.”

유연하는 약간 비위가 상한 듯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내쫓기듯이 달렸다.
암흑이 가득한 지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이어지는 듯한 저편에 정녕 통로가 있는지도 의심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레이첼은 유연하에게 업힌 김하진을 보았다.

“앞에 봐요, 앞!”

유연하가 외치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두더지 하나가 통로를 제 몸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레이첼은 갈라틴에 삭풍의 날카로움 담아 휘둘렀다.

───!

사선으로 압축된 바람이 두더지의 몸체를 이등분으로 절단했다. 그렇게 갈라진 두더지의 틈을, 세 사람은 파고들었다.
시체의 부산물과 핏물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아이 씨앙 진짜······.”

덕분에 유연하는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한편, 토메르는 왕의 서재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오직 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 노트북은 전당 외부와 통하는 거의 유일한 매개체였다.

[검색 : Xtra ]
[검색 : 레이첼]
[검색 : 김하진]

토메르는 여러 키워드를 검색했다. 평범한 포털사이트는 물론 자색연회도 이용했다.
날 때부터 유명인이었던 레이첼은 물론, 최근 일약 집중을 받게 된 Xtra의 기사는 꽤 있었지만, 김하진과 관련된 소식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간 뭘 하나 했더니.”

토메르가 옅게 웃었다. 큐브에서 자퇴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어서 그간 꽤 궁금했는데······.
그러다 돌연 무거운 얼굴이 되어, 품 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긴 편지. 김하진이 아니었더라면 평생을 알지 못했을 당신의 진심이 담긴, 토메르의 보물이었다.

“후······.”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자신은 김하진에게 진 빚이 많다. 그가 없었더라면 평생을 방황하다가 마인이 되어 인생을 망쳤을 테니.

······그 날, 김하진에 의해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후, 토메르는 도망자가 되었다.

패악의 구속에서 벗어났으나,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쫓기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우습게도 그 시절의 도주 경험 덕분에 지금처럼 강해질 수 있었지만.
아무튼 3년 전 언젠가, 그녀는 중앙아시아의 동굴에 숨어서 부상을 치유하고 있었다. 물론 패악에게 쫓기는 상황이었고, 바로 그때 전당의 초대장이 날아왔다.
기이한 메시지가 스마트 워치에 수신된 것이었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전당의 베타테스터로 선택되었습니다. 전당에 참여하시겠습니까?]

평소였다면 스팸이라 여기고 무시했겠으나, 외부의 적들이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토메르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 버튼을 눌렀다.
그 직후, 그녀는 텅 빈 암흑 속으로 소환되었다.
그곳에는 자신 말고도 기백 명의 사람이 있었다. 전당은 그들 모두에게 시험을 내렸고, 토메르는 최후까지 살아남았다.

“······아, 걱정되네.”

그렇기에 자신이 몸소 나설 수는 없었다. 한 대륙의 책임자로서 김하진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직접적인 간섭을 해서는 안 되었다.
가장 최선은 결국 김하진에게 조력자를 붙여주는 것인데······ 그 또한 전당 외부에서 들어온 ‘산 사람’이어야 하고, 너무 많으면 곤란하다.
즉, 혼자서도 많은 것을 능히 잘해낼 수 있고, 전적으로 김하진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아!”

곰곰히 생각하던 토메르의 머릿속에 어떤 사람이 떠올랐다.
그녀는 노트북을 두드려 그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통로에는 다양한 괴수가 있었다.
두더지뿐만 아니라, 웬 아나콘다 같은 녀석이 아가리를 벌린 채 도사렸다. 마치 자기 입이 통로의 출구인 양.
거의 속아서 산 채로 놈의 먹이가 될 뻔했다.

그러나 레이첼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그 모든 것들을 격퇴했다. 완벽했던 정령과 검술의 조화. 그야말로 아름다운 검무(劒舞).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깨부순 듯 가히 무결점의 기량을 선보였다.

“저기다!”

그리고 마침내, 저 먼 곳에서 희끄무레한 빛이 흘러들었다.
유연하의 만면에 환희가 번졌다. 약 하루 동안의 고행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달려 그 빛 속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공간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뒤바뀌며—
추격해 오던 두더지와 촉수들의 기척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하아, 하아······.”
“아······ 우욱······.”

두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숨을 고르고 나서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온통 어두운 터널 같은 곳에 물결이 찰랑이고, 양옆으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이 난 장소.
하수도였다.

“······아. 죽겠네.”

유연하가 씩씩거리고 있는데 레이첼이 다가왔다.
온몸이 땀과 피로 범벅된 레이첼은 헥헥거리며 말했다.

“이제, 하아, 주세요.”
“뭐를요.”
“하진 씨요, 하아.”
“······.”

유연하가 헛웃음을 짓더니 레이첼의 등에 김하진을 옮겼다.
레이첼은 그를 등에 업은 채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갑시다.”
“······지치지도 않아요 당신은?”
“지칠 시간도 없어요. 빨리 와요.”

레이첼이 유연하를 지그시 쏘아보았다. 동료가 위독한 상황에서 왜 이렇게 여유로운 건지, 레이첼은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그 사람, 그렇게 걱정할 만큼 약한 사람 아니라니까요.”

유연하는 오히려 그런 레이첼이 답답했다.
유연하의 입장에서 김하진은, 솔직한 말로 당장 상격 영웅에 비견되어도 부족함이 없는 위인이다. 고작 중독 따위에 당할 리가 없다는 거다.

“그럼 혼자 있으세요.”

레이첼이 퉁명스레 돌아섰다.
하는 수 없이 유연하도 한숨을 내쉬고 따라붙었다.

“에휴······ 갑니다. 가요.”

다행히 하수도에는 괴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위로 향하는 사다리가 나타났다. 아마 지상의 맨홀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었다.

“잠깐만요. 올라가기 전에.”

레이첼이 성급히 사다리를 오르려 하자 유연하가 제지했다. 그녀는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꺼냈다.
물통과 로브였다.

“······몸부터 씻고 가요. 눈에 띄어요.”
“아.”

그제야 레이첼도 자신의 몸이 피로 범벅이 되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유연하가 물을 쏟자, 레이첼이 정령을 동원해 자신과 유연하의 몸을 깨끗이 닦았다.
그렇게 온몸을 씻어낸 뒤 로브를 뒤집어썼다.

“갑시다.”
“······네, 네~”

두 사람은 함께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꽤 높은 사다리를 두 손으로 쥐고 올라, 맨홀 뚜껑을 열고 목을 쭉 내빼고 보니, 과연 영국의 풍경이었다.

“끄응~”

맨홀을 빠져나온 유연하가 기지개를 켰다. 반면 레이첼은 멍하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맑은 듯 탁한 하늘. 오래전의 대화재로 목조와 벽돌이 혼합된 독특한 도시 구성.
개혁 전의 런던이었다.
옛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듯했으나 곧장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감상 따위에 젖을 때가 아니다.

“병원부터 갑시다.”
“아뇨.”

레이첼이 급하게 나서자 유연하가 막았다.

“거기 갔다가 랭커스터 눈에 띄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급한 건 알겠는데, 생각까지 급하게 하지는 마요.”

랭커스터의 눈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하여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된다.
물론 김하진이 혼수상태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오히려 중독보다 외적(外敵)이 훨씬 더 위험하다.

“저희 신분증도 없는데 병원 가면 어떻게 하려고요? 병원 가면, 거기 관계자들이 바로 경찰 부를 거예요.”
“······.”

곱씹을수록 타당한 말이었다. 레이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지금은 일단 눕힐 수 있는 곳이 필요해요. 해독이나 치유는 저도, 당신도 배웠잖아요? 너무 오래되긴 했지만.”
“······네.”

의견이 일치한 두 사람은 일단 런던의 일대를 둘러보았다. 시가지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레이첼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랭커스터는 어떤 세계를 만들려 하는 걸까. 그는 가짜를 진짜로 여기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문득, 가판대가 눈에 띄었다. 신문과 여러 잡지를 팔고 있었다.
레이첼은 그쪽으로 다가가 먼저 날짜를 확인했다.

‘그 해’의 1월 9일이었다.

“음. 따라와봐요. 집은 구할 수 있겠네요.”

레이첼이 싸늘하게 얼어붙은 그때, 유연하가 말했다. 그녀는 신문 맨 뒷면의 광고를 보고 있었다.

[쉐어 하우스 – 빈집을 나눠드립니다]


“······일단, 밥이나 먹을까요, 우리?”

유연하가 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하루 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뛰고 싸우기만 했더니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가장 고생했던 레이첼이 고개를 저었다. 식욕이 없다는 제스처였다.

“그래요, 그럼 뭐. 저도 어쩔 수 없이······ 어휴, 라면이나 끓여야지 그러면. 저도 식욕이 없거든요. 라면 이거, 평생, 어휴······.”

이게 참 맛도 없고 교양도 없고 격식도 없지만 그래도 먹어야 살잖아요. 빨리 끓기도 하고, 돈이 덜 들기도 하고. 유연하는 변명하면서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렸다.

레이첼은 다만 대꾸도 없이 김하진만을 바라보았다. 파랗게 질린 그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죄책감이 일었으나, 동시에 그라면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걱정하지 마요.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 아니라니까. 오히려 지금은 자연 치유되는 과정이에요. 보세요. 안색이 훨씬 나아졌잖아요.”

유연하의 말대로 김하진은 나아지고 있었다. 그의 몸을 파고든 독기가 스스로 소멸되어가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알지 못하는 체질—약성기억육체—의 작용이었다.

“흥흐흐흥흥흐흐~”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첼은 걱정스러웠지만, 유연하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라면에 계란을 풀었다. 레이첼은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이윽고 라면이 완성되자, 유연하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떠듬떠듬 물었다.

“······한 젓가락, 한 젓가락 하실래요?”

레이첼이 끼기긱-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유연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새삼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레이첼은 과연 무어라 말할 것인가······.

“아니요.”

레이첼이 작게 도리질을 쳤다. 유연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뭐. 어차피 라면이니까 안 드셔도 되긴 하겠죠.”

후루룩— 유연하가 면발을 꼬아서 삼켰다.
그리고 레이첼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보기만 했다.
유연하는 레이첼의 시선을 무시하다가, 무시하다가, 무시하다가, 계속 무시하다가, 결국에는 무시할 수가 없어서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뭐요, 왜요.”
“······.”
“먹고 싶어요?”
“······.”
“아니, 말을 해요.”
“······.”
“······그럼 나 혼자 먹어야지 뭐.”

그제서야 레이첼의 뱃속이 꼬르륵- 울었다.
그녀는 길 잃은 고양이처럼 움찔 떨더니 소심하게 대답했다.

“한 젓가락만······”
“······하, 참 내.”

자그마한 방에서, 세 사람의 첫째 날이었다.

< 몽중화 (29) > 끝

< 몽중화 (30) >

레이첼은 거리로 나왔다. 유연하의 부탁으로 전자기기점에서 노트북을 구매했다.
거래 방식은 물물교환이었다. 노트북의 성능은 별로였지만 뉴스나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정보를 얻을 수는 있었다.
확실히, 이 세계는 과거의 영국이었다.

“오셨네요? 노트북은, 사 오셨어요?”
“네.”

거처로 돌아온 레이첼은 옷걸이에 로브를 걸었다. 유연하는 김하진의 혈액 샘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럼 줘보세요. 저도 중독 분석은 마쳤어요.”

그 말에 레이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왔다. 그녀는 정말이냐-고 표정으로 물었다.

“혈액에 전류를 흘리니 여러 반응이 생기더라고요. 은근 유명한 독이라서 금세 알아봤죠.”

순간 레이첼은 긴장이 되었다.
독이 유명할 경우에는 그 이유가 중요하다. 너무 흔해서 유명한지, 아니면 너무 강해서 유명한지.

“이건 ‘환몽’이에요.”
“환몽······.”
“아주 귀하고 희귀한 독이지요.”

환몽은 온갖 귀한 재료를 끌어모아야만 제조할 수 있는 독이다. 독의 위계 중에서도 최상위라 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이는 독은 아니다. 다만 그 이름처럼, 거의 영원한 잠에 빠져들게 할 뿐.

“······위험하네요, 많이.”
“깨어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어요.”

레이첼의 심각한 표정을 두고 유연하는 옅게 웃었다.
김하진은 언젠가 자신이 김수호보다도 뛰어나다고 판단했던 사람이었다. 비록 어느 순간 열정을 잃고 궤도에서 이탈해 버렸지만, 그 단단함은 분명 여전할 것이었다.

“괜찮아요. 금방 깨어날 거예요. 이 사람은.”
“······.”

레이첼도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영 안심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유연하는 그녀의 걱정이 이해되면서도 약간 아니꼬웠다.

“······아무튼, 걱정하지 말라고요. 꿈은 깨라고 있는 거니까.”

유연하가 노트북을 가지고 책상 앞에 앉았다.
자판을 두드리는 유연하를 지켜보던 레이첼은 문득, 어떤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환몽은 꿈을 꾸게 하는 독이다. 한데 자신은 김하진과 원인 모를 ‘꿈의 공유’를 경험한 전력이 있다.
그렇다면 혹시······.
레이첼은 침대 속으로 꾸물꾸물 비집고 들어가서 김하진의 옆자리에 누웠다. 그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였다.

“저기요, 레이첼 씨. 이것 좀 한번 봐요······. 뭐, 뭐야?!”

그때, 뒤를 돌아본 유연하가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 당신 뭐 하는 거예요?”
“혹시 모릅니다. 이렇게 하면-”

유연하가 황급히 다가와서 레이첼의 몸을 잡아끌었다.

“너무, 음란하잖아욧!”
“뭐가 음란, 아, 놔요. 여기서 자야-”
“일단 나와요! 얼른!”
“그런 게······ 이잇-”

억지로 끌려 나온 레이첼은 뚱하니 유연하를 노려보았다.
유연하의 얼굴이 웬 인주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 어디, 낯뜨겁게. 아침부터. 왜 이러는 거래 정말. 미쳤어요? 미쳐써 당신!”
“아니, 그게 아니라······.”

아기새처럼 빽빽거리는 그녀에게, 레이첼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레이첼은 첫 번째 꿈을 꾸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 언젠가 보았던 김하진의 집이었다.
그녀는 굳게 닫힌 안방 문 앞에 섰다. 용기를 내어 그곳의 문을 열었다.
자그마한 침대에 한 남자가 자고 있었다.
레이첼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시선을 느낀 듯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의 꿈도 깨어졌다.

레이첼은 두 번째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햄프턴 궁전이었다.
그곳에서는 김하진이 자신을 찾았다. 어린 자신을 어깨에 짊어 메고 도망쳤다. 그의 품 안에서 아늑함을 느꼈다.
햄프턴 궁전이 새하얗게 무너졌을 때, 그녀의 꿈이 깨어졌다.

레이첼은 세 번째 꿈을 꾸었다.
김하진의 집이었다. 서로가 마주 보고 있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그녀는 침대 옆에서. 그러나 대화의 내용은 잠에서 깨어난 순간 희미하게 잊혔다.

그렇게 이어지는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꿈······.

두 사람은 꿈 속에서 서로의 과거를 공유했다. 과거는 점점 더 길어지며 깊어졌다. 서서히 의식의 밑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지극정성이시네요.”

레이첼이 두 눈을 비비적거리며 눈을 떴을 때, 유연하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도, 꿈은 공유했어요?”
“네. 대화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으레 꿈이 그렇듯 어렴풋한 상황만 기억날 뿐이다.
아무리 선명했던 꿈이라도 잠에서 깨어나면 희끗해지고, 조금만 더 지나면 의식에서 흩어진다.

“그럼 우리, 산책이나 나가요.”
“······.”

레이첼은 말없이 김하진을 보았다. 김하진은 여전히 환몽 상태에 빠져 있었다.
유연하가 쓰게 웃으며 레이첼의 어깨를 툭 쳤다.

“괜찮아요. 여기는 이미 공방 수준의 결계를 갖추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알 수 있어요. 무엇보다, 시간 여행은 흔치 않은 기회랍니다?”

유연하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창밖을 보니 오늘 날씨가 참 맑아 보이기는 했다.
영국에 드문 밝은 햇살과 선선한 바람. 새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 수채화처럼 선명한 풍경이었다.

“······30분만입니다.”
“좋아요.”

그렇게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영국의 길거리는 밝고 활기찼다.
마침 주말이었던 터라 나들이를 나온 가족이 많았다. 아이와 부모의 웃음이 바람과 뒤섞이며 울렸다.
개혁 이전, 그러니까 햄프턴 사건 이전의 영국은 언제나 이런 분위기였을까.
“와~ 이거 교과서에서나 봤던 건데.”

유연하가 붉은색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하곤 그 옆에 기대어 섰다. 레이첼은 포즈를 잡는 그녀를 보며 작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굳은 얼굴이 되어 멈춰섰다.

저 먼 곳에 버킹엄 궁전이 보였다.

등골에 한기가 어렸다. 긴장에 목이 죄었다.
이곳은 랭커스터가 재현한 과거의 영국.
그렇다면, 이미 죽은 과거의 사람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일까.

“음. 저기 버킹엄이 있었네.”

유연하의 말에 레이첼이 흠칫 떨었다.

“근처로 가볼까요?”

레이첼은 고개를 저었다.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랭커스터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자각은 있으시네요. 저희는 가면 안 되는 거 알긴 아시나 봐요.”
“······.”

사람 무시하는 거야 뭐야. 레이첼이 입술을 삐죽이며 유연하를 흘겨보았다.

“풋. 그래요 뭐, 너무 감상에 젖지는 마요. 어차피 이곳은 전부 가짜니까.”
“······가짜.”

레이첼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이 세상은 가짜다. 진짜가 아닌 것에 불과하다.
다만 거짓된 영혼이 모인 세상일 뿐······.

“자. 조금만 더 구경하고 돌아갑시다.”

유연하가 레이첼의 팔을 잡아끌었다.


“······.”

새벽녘의 어스름 속에서 레이첼은 깨어났다.
오늘의 꿈도 역시, 기억에 남지 않았다. 눈을 감고 떠올리려 애썼으나 머릿속은 이미 새하얗게 되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만이 희미하게 남아 귓전에서 윙윙 울렸다.

“부단장님.”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음성.
레이첼은 눈을 부릅뜨고 그곳을 보았다. 그 순간, 온몸이 굳었다.
어떤 사람이 창틀을 딛고 서 있었다. 마치 박쥐처럼, 후드를 뒤집어쓴 불청객.
그는 곧 제 얼굴을 드러냈다. 레이첼의 눈에 얼마간의 분노가 깃들었다.
마커스였다.

“······너!”

레이첼이 갈라틴을 집어 들자마자 마커스가 양손을 번쩍 들었다. 항복의 표시였다.
레이첼은 일단은 갈라틴을 움켜쥔 채 턱짓했다. 뭐든 말하라는 뜻이었다.
마커스는 주변을 살피더니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동거라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마커스가 물었다. 그는 같은 침대의 김하진을 보고 있었다.

“······이 자식이!”

얼굴이 화끈해진 레이첼은 곧장 갈라틴을 뽑았다. 마커스가 입에 검지를 대었다.

“쉿. 지금 겨우 짬 내서 온 겁니다. 큰 소리 내면 안 돼요. 할 말이 있습니다.”
“하아암······?”

한창 잠자던 유연하도 기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유연하는 마커스를 보더니 제 두 눈을 비비적거렸다.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본론만 말해라.”

레이첼은 존칭도 거두었다. 배신한 동료에게 그런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마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말했다.

“어떻게 찾아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랭커스터는 영국의 국민 전부를 희생시키려 합니다.”

레이첼의 미간에 험악한 주름이 잡혔다.

“혹시, 부단장님. 두더지를 보셨습니까.”

지하 통로에서 마주한 놈들을 일컫는 것이겠지. 레이첼은 침묵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들이 지금 이곳의 땅을 파고 있습니다. 초거대(超巨大) 규모의 진을 그리고 있는 겁니다. 아마, 영국 본토에도 완전히 동일한 진이 그려지고 있겠지요.”

마커스는 불안한 기색으로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놈들은 그것으로 진짜 영국과 가짜 영국을 통째로 뒤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

어느덧 진지한 얼굴의 유연하가 다가와서 말했다.

“배신자가 한 말을 잘도 믿겠네요.”
“예. 저도 처음에는 랭커스터에게 세뇌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영국, 그리고 부단장님 탓인 줄로만 알았죠.”

그러나 마커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날의 비극에 있어서 부단장님 잘못은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저는 부단장님과 함께하며 깨달았습니다.”

결의가 서린 음색이었다.

“지금 저는 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부단장님과 영국을 돕고 있습니다. 금고를 가지고 도망친 건 랭커스터에게 신뢰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단원들이 저를 쫓다 통로를 발견하여 이곳으로 올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레이첼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급박하게 말을 이었다.

“제 말을 무조건적으로 믿어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제 머지않은 ‘그날’에, 랭커스터는 햄프턴 궁전에서 ‘전당의 기적’을 시전할 겁니다.”

마커스가 슬픈 눈으로 레이첼을 보았다.

“······그날, 제가 입구를 열어드리겠습니다. 놈들을 막는 것은 저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부단장님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뒤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의 말이 진심인지 레이첼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배신한 동료를 믿어야 하는 것일까.
레이첼은 침대에 걸터앉아 마커스를 바라보았다.
문득 밀려든 바람이 마커스의 몸을 작은 입자로 만들었다. 마커스는 고운 가루처럼 흩어졌다.

창 밖을 보니 어슴푸레 서광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 희미한 빛무리가 김하진을 비추었다.

······여전히 잠에 빠진 이 사람은 ‘그날’까지 깨어날 수 있을까.
레이첼은 김하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레이첼은 마커스와 만난 이후로 훈련에 매진했다. 주된 목적은 검과 정령의 완벽한 조화였다.
‘그 날’은 아주 소수의 힘으로 해결해야 하므로, 1초라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

“뭐, 아직도 상황만 기억난다는 얘기죠?”

그러면서 꿈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훈련도 병행했다. 다만, 대화 내용을 떠올리는 일은 정령을 다루는 것보다 어려웠다.

“······네.”
“대화내용은 아주 조금도 기억이 안 나요?”
“아주 희미해요.”
“어떻게 희미한데요?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걸 말해봐요.”

유연하의 말에 레이첼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으으으- 괴로울 정도로 고뇌하다가, 겨우 한마디를 툭 떠올렸다.

“무슨······ 주머니? 쥐 주머니?”
“······쥐 주머니? 쥐가 담긴 주머니요?”

유연하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레이첼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어요.”
“쯧. 됐어요. 아무튼, 이제 밥이나 먹읍시다.”
“······네.”

그렇게 두 사람은 수저를 들었다. 오늘 아침은 돼지고기 김치찌개였다.

“오늘 맛있게 잘됐네요.”

유연하가 자찬하자 레이첼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하진만큼은 아니지만, 유연하의 요리실력은 상당히 괜찮았다.

“천천히 들어요.”
“네.”
“천천히요. 그쪽, 먹는 속도가 너무 빨라요.”

나름 맛있게 식사하던 그때였다.
돌연 유연하가 수저를 내팽개치더니 눈을 번쩍 떴다.

“······아, 설마 ‘제 주머니’인가?!”

화들짝 놀란 레이첼이 수저를 든 자세 그대로 굳었다. 처음에는 너무 많이 먹어서 화난 줄로만 알았다.

“주, 주머니요?”

유연하는 대답하지 않고 김하진에게 달려갔다. 김하진은 여전히 처음에 입은 옷차림 그대로였다.
목욕과 세탁은 물의 정령으로 하고 있으니 갈아 입힐 필요 자체가 없었다.
유연하는 김하진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지 주머니, 안 주머니, 외투 주머니······ 주머니가 하도 많아야지.

“흐흠.”

레이첼이 불편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흐흠, 크흐흠.”
“······.”

유연하는 무시하고 계속해서 뒤졌다.
저러다 옷이 벗겨질 것 같았다.

“크흠! 크흐흠!”
“아, 알았어요. 금방 끝나요.”

참다못한 레이첼이 자기가 하겠다며 나선 그때였다.
주머니를 파고든 유연하의 손에, 무엇인가가 찰랑이며 걸려들었다.

“어······? ······뭐야 이거.”

유연하가 그것을 꺼내었다.
아름답게 세공된 목걸이였다. 창밖의 태양 빛이 닿자 찬란한 광채를 발했다. 이만큼 조화로운 목걸이는 유연하도 처음이었다.

“······부럽네요.”

그녀는 눈만 껌뻑거리다가 목걸이를 내던졌다.
레이첼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손안에 담긴 목걸이의 자태는 곱고 부드러웠다. 환상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저게 뭐야 진짜. 난 무슨 해독제라도 있는 줄 알았네. 아, 짜증 나게.”

단순한 선물이라 생각한 유연하는 입술을 삐죽이며 분노했다.
반면 레이첼의 볼에는 홍조가 올랐다. 김하진이 어떤 마음으로 이것을 준비했는지,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상상이 전개되었다.

“······어?”

바로 그때, 품속에 있던 정령이 제멋대로 일어섰다. 유연하는 다시 진지한 얼굴이 되어 레이첼을 보았다.
정령과 목걸이가 서로 공명(共鳴)을 하고 있었다.

< 몽중화 (30) > 끝

< 몽중화 (31) >

텅 빈 동공이 한 줌 빛을 응시했다.

그 눈에 담긴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무섭고 차가웠겠지.
내가 원망스러웠겠지.

나를 바라보던 아이의 눈.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스러지던 아내의 눈.
아직도 선연하게 떠오르는 죽음의 눈동자.

궁전이 붕괴하고 대지가 무너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끔찍하게 죽었다. 찢긴 사지가 나뒹굴었고 선혈이 강을 이루었다.

지옥이 현현한 듯 멸렬한 그곳의 한복판에, 핏물과 살점을 뒤집어쓴 연약한 공주.

일생을 다해 지키겠노라 맹세했던 나의 주군이 있었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나는 나의 전부를 죽였다.

잔해에 짓눌려 죽어가는 아내와 아이를 둔 채,
나는 공주를 구했다.

······랭커스터는 암흑 속에서 솟아난 어떤 빛을 보았다.

그것은 반딧불이처럼 떠올라 먼 옛날의 과거를 비추었다.

빛을 거두어라.

그의 한마디에 빛은 사그라들었다.
세상이 무결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점점, 의식이 옅어지고 있었다.
때가 머지않았다는 의미였다.

이제 그 날이 오면—
모두가 죽고 모두가 다시 태어난다.

그것으로, 일어나서는 안 되었을 비극을 교정한다.

결국 어긋난 톱니를 모조리 파괴하고 새로이 건축하는 일.

랭커스터는 그 대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준비가 되었다.

자신의 타락한 영혼이 부수어지면, 아직 절망과 좌절에 물들지 않은 기사(騎士)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곧 도래할 그 날을 위해,
깊은 의식의 심연 속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들의 눈동자 속으로,
랭커스터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꿈처럼 아늑한 그곳에는 아직 어린 공주가 있었다.

한 줌의 재가 되었던 아이와 아내가 있었다.

랭커스터는 다만 바랄 뿐이었다.

이 꿈속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기를.
영원한 꿈으로 남아 모두의 슬픔을 거두어가기를.

······그날 보았던 꽃은 유달리 아름다웠다.

마지막 기회를 얻었으므로,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갈라틴이 창연한 빛을 내뿜었다. 초고압으로 응축된 물의 정수. 증폭된 절삭력은 대기조차 베어내는 듯 불투명하게 일렁였다.

쏴아아아······.

레이첼이 갈라틴을 내질렀다. 부채꼴로 펼쳐진 검의 궤적이 푸르게 얼어붙었다. 새파란 기류가 칼날에 휘감겼다.
절삭 이후의 냉각. 가장 파괴적이라 할 수 있는 속성의 조합이었다.

짝짝짝—

곁에서 지켜보던 유연하가 박수를 쳤다. 레이첼은 정령을 갈무리하고 그쪽을 보았다. 갈라틴이 평소의 은빛으로 되돌아왔다.

“좋아요.”

마치 동굴에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울렸다.
실제로 이곳은 동굴과 유사한 환경이었다.
훈련할 터가 따로 없었기에 두 사람은 지하로 내려왔다. 즉, 하수도를 임시 단련장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비위생적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령의 정화로 물과 공기가 맑아져 더없이 쾌적했다.

“뭔진 몰라도, 목걸이가 정령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건 확실하네요.”

유연하의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끄떡였다.
이 정도면 기존의 1.5배, 아니, 최대 2배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건 정말 어디서 구한 걸까요?”

유연하가 레이첼의 쇄골을 보며 중얼거렸다. 레이첼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고작 목걸이 하나로 이만큼이나 강해질 수 있다니. 이런 보물을 도대체 어떻게 구했을까. 그리고, 왜 나에게 주었을까.

“음. 전 이만 올라갈 건데, 뭐 더 하실 거예요?”
“예. 조금 더 훈련하다 갈게요. ”
“하긴, 목걸이 덕에 훈련도 재밌겠죠. 그럼 즐기다 와요.”

유연하가 사다리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후우.”

홀로 남은 레이첼은 하수도의 한복판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호흡을 반복하며 심법을 시작했다. 하수도는 지맥과 가까운 지하이므로, 심법의 효율은 지상보다 훨씬 나았다.

쉬이이이이······.

그녀의 호흡에 감응하듯 하수도의 수면이 상승했다. 물이 서서히 불어나며, 역류하는 폭포처럼 그녀를 공중으로 떠올렸다.

그렇게 정령을 통제하던 순간— 아주 작은 잡생각이 끼어들었다.

“아.”

촤아아악-! 정령이 흐트러지며 물길이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하수도 속으로 빠졌다. 하수(下水)라 하기에는 너무 맑고 깨끗한 물이었다.
레이첼은 가만히 누워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젖은 두 볼이 이상하게 화끈했다.
“······.”

그녀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정말, 이 목걸이는 그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걸까.
진짜, 진짜에 진짜로 오직 나를 위해서? 진짜에 진짜에 진짜로?

묘하게 부끄러워져서 괜히 옆으로 돌아누웠다. 시원한 물이 첨벙이며 얼굴을 적셨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뜨거웠고, 이제는 심장마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걸까. 아니면 나도 어떤 독에 중독된 걸까.

레이첼은 가슴에 손을 대고 눈을 꾹 감았다. 콩콩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자 심호흡을 했으나, 울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왜 이러지.”

결국 포기한 레이첼은 대자로 드러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보며 수면을 둥둥 떠다녔다.
찰랑거리는 물결과 불어오는 바람. 이렇게 있자니 눈이 솔솔 감긴다.

“······.”

평온하고 아늑한 고요.
그 속에서, 반가운 꿈이 그녀를 찾아오고 있었다.


[최고급 외상 회복 포션]
[왕실의 아대]
[종이학]
[대마법 스크롤]
[마법 스크롤······.]

“대충 물건은 이 정도 있네요.”

이튿날, 유연하가 왕실에게 지원받은 보따리를 풀었다.
최고급 외상 회복 포션과 마법 스크롤뿐만 아니라, ‘마력 증폭’과 ‘마력 저항’ 등 유용한 인첸트가 부가된 아티팩트들이 많았다.

“‘그날’은 2월이라고 그랬죠?”

유연하가 아대를 착용하며 물었다.

“네. 2월이에요.”
“음, 그런데 아시다시피 저희 전력이 조금 많이 부족해요. 고작 두 명뿐이잖아요? 그놈들은 군단을 이루고 있을 테죠. 적어도 수천 명은 될 거란 말이에요? 그들을 저희 둘이서 처리할 수는 없어요.”

타당한 말이었다. 아무리 정령의 힘이 증폭되었다 한들 혼자서 수천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좋은 장비가 있다 해도······ 와, 이거 되게 좋다.”

유연하가 왕실의 망토를 두르더니 입을 헤벌렸다. 뒤질세라 레이첼도 비슷한 망토를 잡고 어깨에 걸쳤다.

“활공 기능도 있는 듯해요.”
“그러게요. 허투루 된 지원은 아니었네. 디자인도 되게 예쁘지 않아요?”
“네. 고급스럽고, 기품이 있다고 할까요.”
“맞아 맞아. 누가 왕실 아니랄까 봐 되게 명품 같아요. 나중에 서울 가서 입고 다녀도 안 쪽팔리겠는데요?”

망토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품평하던 두 사람은, 이내 입을 다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시 본론이었다.

“혹시······ 당신, 마커스를 믿을 수 있나요?”
문득 유연하가 물었다.
레이첼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마커스는 자신이 이중첩자임을 알렸으나, 이중(二重)이 아니라 삼중(三重)인지, 삼중이 아니라 사중(四重)인지는 어느 누구도 모르는 것이었다.

“문을 열어놓겠다는 그 말이 뭔가 의미심장해요. 뭔가 뒷문을 열어서, 군단과 마주치지 않고 곧장 랭커스터와 붙을 수 있게끔 도와주겠다는 뉘앙스가 있지 않았어요?”

그러나 마커스의 도움이 진실이라면, 고작 둘이라도 어느 정도 승리를 노려봄 직하다. 정령력이 증폭된 레이첼은 랭커스터와의 1대 1에서 쉽게 지지 않을 테니.

“마커스랑은 어떤 사이예요?”

레이첼이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작게 대답했다.

“······마커스도 햄프턴에서 부모님을 잃었어요.”

유연하의 콧등에 주름이 잡혔다.

“그걸 알면서 왕실 길드로 받아들였대요?”
“죄가 아니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마커스의 큐브 학비까지 후원해 주었다.
유연하가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칼을 쓸었다.

“······아! 좋은 생각이 났어요.”

그런데 갑자기 침대보를 북 찢었다. 레이첼은 흠칫 놀란 눈으로 보았다.
유연하는 찢어발긴 침대보를 이리저리 엮더니 웬 동물처럼 만들었다.

“뭐 하시는······?”
“딱 보면 몰라요? 정령 그릇 만들고 있잖아요.”
“······아?”

그제야 레이첼도 뭔가 깨달은 얼굴이 되었다.

마지막 매듭을 엮은 유연하가 침대 위에 새 한 마리를 올렸다. 침대보로 만든 것 치고는 상당히 디테일한 형상이었다.

“자. 여기에 정령을 불어넣으세요.”
“근데 전 아직 한 번도-”
“괜찮아요. 당신 스승이 이런 거 잘하잖아요. 당신도 잘할 수 있을 거예요.”
“······.”
“빨리요. 지금은 탐망꾼이 최우선으로 필요해요.”

유연하의 말대로, 적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지금은 탐색이 절실하다.

레이첼은 새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단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고, 상당히 어려운 기술이라는 말만 들었지만, 목걸이 덕분에 자신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정령을 불러내어, 침대 위의 새에게 스며 넣는다.
속성은 바람. 자신의 의지를 따르도록 하는 ‘의념’ 또한 필요하다.

그렇게 뇌를 뽑아낼 기세로 집중하길 몇 분 정도 지났을까.
자그마한 새의 날개가 갑자기 펄럭였다.

“엇!”

깜짝 놀란 유연하가 단말마를 내질렀지만, 레이첼은 관심도 주지 않고 정령에 집중했다.
날개만을 펄럭이던 새는 곧 정령사의 ‘의념’과 ‘바람의 속성’을 부여받아, 끼루우우우— 낭랑한 울음을 내뱉으며 비상했다.

“흐읏-”
“괜찮아요?”

레이첼이 비틀거리며 눈을 떴다. 유연하는 그녀를 부축한 채 날아오르는 새를 지켜보았다.

끼루루- 끼루루룩-

은색으로 빛나는 새의 자태가 아름다웠다. 녀석이 흩뿌리는 고운 가루는 정령의 상징이었다.


레이첼은 정령새와 더불어 정령쥐까지 햄프턴으로 보냈다.
과연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것인지- 쥐와 새는 탐망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햄프턴의 외부와 내부는 물론, 그곳을 순찰하는 랭커스터의 하수인들까지 모조리 파악한 것이었다.
레이첼은 그렇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궁전의 도면을 그렸다.

“여기서, 원래 햄프턴의 구조와 다른 곳은 단 하나뿐이에요.”

궁전 지하의 바닥에 생겨난 통로.
레이첼이 펜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아마도 마커스가 언급한 ‘문’이었다.
유연하가 흐응- 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저희 목적지는 여기겠네요. 저 아래에 랭커스터가 있겠고”
“만약 마커스를 믿는다고 한다면, 그럴 겁니다.”
“뭐, 어떻게 해요? 안 믿으면 방법이 없잖아요. 믿는 수밖에 없어요, 지금은.”

유연하가 손가락으로 햄프턴의 도면을 톡톡 두드렸다.

“일단 여기로 가려면, 저희도 땅을 파야겠네요.”

유연하의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와 쥐의 조사에 의하면, 햄프턴으로 가는 길목은 곳곳마다 하수인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여 지상 루트는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 이제 자리부터 옮깁시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위험해요. 거처는 지하로 삼죠.”
“예. 근데 하진 씨는 제가-”
“알았어요. 뭐, 내가 건드리기라도 하나.”
“······아뇨. 그건 아니구.”

그렇게 두 사람은 김하진을 업고 하수도로 내려왔다.
이제 하수도의 풍경도 나름 익숙해졌다. 유연하가 먼저 간이침대를 폈고, 레이첼이 김하진을 눕혔다.

“흐음~ 여기 뭔가 운치 있네요. 무슨 계곡에 텐트 친 것 같아.”

반짝이는 정령의 빛 덕택에 물이 맑아지고 새싹이 돋아났다. 하수도라기보다는 어떤 정원 같은 공간이었다.
유연하가 방긋 웃으며 물결 위에 회의 탁자를 놓았다.

“자. 그럼 이제-”

다시 회의를 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둥······.

어디선가 불길한 진동이 일었다. 레이첼은 곧장 갈라틴을 빼어 들었고, 유연하는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둥······ 둥······ 둥······.

멀지 않은 곳에서 천천히 울리는 낮게 깔린 소리.

“······뭐, 뭐예요?”

유연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레이첼은 경계를 유지한 채 그쪽으로 다가갔다.

쿠웅······.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쿠웅······ 쿠웅······.

진동과 더불어 굴강한 마력이 드세게 몰아쳤다.
레이첼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고였다. 그녀는 정령을 불러내어 탐색을 보냈다. 나비 정령이 날개를 펄럭이며 저편으로 날아갔다.
눈을 감고, 정령의 눈과 귀를 빌린다.

쾅—! 쾅—! 우지끈—! 푸와아아아—!

뭔가 의성어로 표현하기 힘든 괴성이 가득했다.
깨지고 찢어지고 부서지고 뜯어지고 얻어터지고 폭발하고······ 이윽고 정령마저도 그 난장에 휩쓸려 파괴되었다.

눈을 뜬 레이첼이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연하 씨. 하진 씨를 부탁해요.”
“넵.”

유연하는 사양하지 않고 김하진을 업었다. 뭔가 큰일이 생기면 당장에라도 도망칠 태세였다.

“······누구냐.”

레이첼이 갈라틴을 뻗었다. 칼끝에서 발한 푸른 빛이 서서히 나아가며 하수도를 밝혔다.
이윽고 빛이 닿은 저편에는······.

“선빵필승—!”

웬 괴생명체가 괴상한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윽!”

레이첼은 검을 내뻗어 막았으나, 곧장 날아든 주먹이 그녀의 아구창을 후려쳤다.
뎅──
문자 그대로 골이 뒤흔들렸다.

< 몽중화 (3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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